[이수완의 월드비전] 초인플레이션 공포 현실로? '독불장군' 볼커가 지금 소환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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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논설위원
입력 2022-03-0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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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금리 인상 예고한 파월 미 연준 의장 (워싱턴 AFP=연합뉴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2일(현지시간) 하원 금융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인플레이션이 2%를 훨씬 웃돌고 강력한 노동시장으로 인해, 우리는 이달 회의에서 연방 금리의 목표 범위를 올리는 게 적절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나는 0.25%포인트 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볼커의 뚝심

폴 볼커(1927~2019) 전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의장은 미국 경제의 고질병인 인플레이션을 잡아낸 인물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79년 9월 그가 민주당 카터 대통령에 의해 연준 의장에 지명될 당시 미국 경제는 베트남 전쟁 여파와 중동發 석유 파동으로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는 경기 침체와 실업난, 고물가에 허덕이는 미국 경제를 치유하기 위해 경기부양보다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강성 매파'인 볼커는 정치권과 기업인, 농민들의 거센 압박과 반발을 무릅쓰고 물가를 잡기 위해 강력한 긴축과 초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였다.  

전통적으로 세계 각국은 성장과 물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고용이나 성장을 앞세우면 물가 상승을 용인해야 하고, 물가를 잡자니 성장이나 고용이 뒷전으로 밀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경기불황이 닥치면 수요 감소와 불안 심리로 물가가 내려가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1970년대 미국은 경기 침체 속에  물가가 마구 치솟는 일반적 경제 상식을 초월한 현상, 즉 '스태그플레이션'이  오랫동안 기승을 부려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볼커는 13%대까지 폭등한 최악의 인플레이션 상황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미국 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갑자기 기자회견을 열고 연 11.2%였던 정책금리를 4%포인트나 올렸다. 소위 '토요일밤의 학살'로 불렸다. 1980년 4월에는 17.6%까지 끌어올렸다.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한 1981년에는 20%대를 넘겼다. 무려 3년 동안 진행된 그의 무자비한 '금리 쿠데타'로 미국 경제는 고통이 더해갔다.    

우려했던 대로 볼커의 초긴축 강력 드라이브는 1980~1982년 W형 또는 "더블 딥(double dip)" 경기 후퇴(recession)로 이어졌다. 당시 자동차와 기계장비업체 건설회사 등 제조업 분야의 대량 해고로 전국 실업률은 10%대까지 상승했고 고금리에 반대하는 정치권의 원성은 물론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업인,노동자, 농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마침내 효력을 발휘했다. 시중에서 인플레이션 기대감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물가 상승률이 1983년 3%대로 급락했다. 경제가 이젠 충분히 고통을 받았다고 판단한 연준은 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고용과 경기는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잡아내 1990년대 미국 경제 붐의 초석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가 많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미국 역사상 지금까지의 연준 의장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는 이유이다.

1987년 볼커의 뒤를 이어 연준의장이 된 앨런 그린스펀은 18년 6개월이나 최장기 재임하며 미국의 장기 호황시대를 이끌었다. 1996년부터 3년간 미국 경제는 연속으로 3.5%대의 성장을 기록하는 가운데 2%대의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하는 등 소위 '골디락스 경제' (goldilocks economy)를 구현해 냈다. 그린스펀이 미국 경제의 체질을 몰라보게 개선하고 세계 경제사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난치병을 극복하기 위해 미 행정부의 압력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통화긴축과 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인 볼커의 '뚝심' 덕분이다. 한국도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당시 물가와 실업률이 10%를 넘는 등 단기적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당시 IMF가 강요한 고금리 정책으로 기업들은 줄도산하고 실업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는 기업의 체질 개선과 함께 건강한 모습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아무튼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불청객은 강력한 긴축 정책을 통해 몰아내는 것이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독불장군'의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볼커는 인플레이션 퇴치에 온몸을 던졌다. 경제학사적으로 그는 중앙은행의 최대임무가 물가안정에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또한 1985년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내 추락하던 미국의 달러 가치를 지켜냈다. 미국이 1970년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는 물가를 잡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1971년 결국 달러와 금을 고정가격에 교환할 수 있는 '금본위제도'를 갑자기 중단시켰다. 소위 '닉슨 쇼크'는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지게 했다. 둘째는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으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한 '오일 쇼크'이다. 셋째로 뛰는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의 직접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임금 인상과 제품 가격을 통제하려 시도했지만 지나친 규제로 상황이 오히려 악화된 점이다. 마지막으로  잘못된 연준의 통화정책이었다. 연준은 경제가 힘들어지자 물가를 우선적으로 잡아야 한다는 책무를 외면한 채 돈 풀기에 바빠 통화량이 너무 급속도로 증가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정책을  유지했던 연준은 7년 만인 2015년 첫 금리인상을 시도했다. 금융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통화공급을 서서히 거두어들이는 이른바 '테이퍼링(tapering)'은 재임기간(2014~2018) 기준금리를 다섯 번 올린 재닛 옐런 전 연준 의장의 성공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준은 트럼프 대통령의 금리인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점진적 금리인상 정책을 계속 펼치다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되자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인하하고 사상 최대의 빚잔치를 벌였다. 몇 달 전만 해도 미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듯했다. 사상 최대 규모로 풀린 돈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물가는 비교적 안정이 됐고, 고용도 급속히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4분기 미국은 6.9%의 성장을 기록했다. 작년 한해 전체 5.7% 성장한 것으로 잠정 집계, 2020년 마이너스 3.4%의 역성장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반등에 성공했다. 실업률도 2020년 4월의 14.7% 고점에서 하락하기 시작하더니 지난달에는 4% 수준으로 내려왔다. 1987년부터 미국의 주택시장을 모니터 하는 S&P의 케이스 실러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집값은 역대 최고치인 18.8%나 상승했다. 주가도 폭등하고 임금도 상승하며 미국인들의 소득과 자산은 크게 증가했다. 

확산되는 인플레이션 공포

외견상 양호한 회복세로 향하던 미국 경제는 지난해 말부터 갑자기 인플레이션이라는 복병이 나타났다.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에너지와 곡물, 원자재 가격까지 일제히 폭등하면서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는 갑자기 물가폭등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1월 전년 동월비 미국의 소비자물가(CPI) 상승률은 40년 만의 최대폭인 7.5%를 기록하며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노동력 부족사태는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며 기업의 생산성 저하가 불가피해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가 장기화 된다면 인플레이션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위협으로 악화될 조짐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물가 폭등이 갑자기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면서 미국은 물론 전 세계는 긴장하고 있다. 급격한 인플레이션은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분을 상쇄시켜 그들의 실질소득이 감소된다. 또 기업이 일단 한번 올린 제품가격은 여간해선 다시 내려가지 않는 것이 통념이다. 연준이 일시적이라도 경기침체를 유도해 수요를 억제하지 않으면 제품 가격이 내려가긴 힘든 상황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미국의 고(高)인플레이션은 10여 년에 걸쳐 물가 상승 요인이 복합적으로 더해진 결과였다. 이번엔 다르다. 연준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단기적이라고 주장해왔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물가 상승이 몇 달째 지속되자 태도를 갑자기 바꿔 통회긴축과 금리인상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오미크론 확산으로  코로나 종식 시점이 불투명해지면서 글로벌 경제는 앞으로 급속한 반등보다는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의 길로 들어설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까지 악화되면서 유가가 폭등하고 공급망 문제까지 다시 불안해지면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작금의 미국 경제 상황은 1970년대에 비해 인플이레이션에 훨씬 잘 대처할 수 있는 여건이다. 카터 대통령이 불황 속에서 뛰는 물가를 잡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듯이 현 바이든 대통령도 물가 상승을 잡지 못하면 올해 중간선거는 물론 재선의 꿈도 접어야 할 운명이다. 현 연준의장인 제롬 파월은 볼커 전 의장과 달리 공화당 출신 트럼프에 의해 임명됐고 민주당 출신인 바이든 대통령에 의해 재지명되었다. 그동안 중립적 성향을 보였던 파월 의장은 물가상승 속도에 놀라 드디어 매의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파월은 지난 1월 26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경제가 더 이상 높은 수준의 지속적 정책지원(sustained high levels of policy supports)이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베이비 스텝'이냐 '빅스텝'이냐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올해 들어 금리인상이 2~3차례 단행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최근에는 5~6차례나 올리는 초스피드 통화긴축이 대세이다. 현재 거론되는 방식은 연속 금리 인상과 빅스텝이다. 연준은 2006년 이후 통화정책 회의마다 연속적으로 금리를 올린 적은 없다. 앞으로 연준의 통화정책 회의는 3월, 5월, 6월, 7월, 9월, 12월 등 총 7번 예정돼 있다. 오는 15~16일 개최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최대 관건은 정책금리 인상 여부가 아니라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는 '베이비 스텝'이냐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이냐이다. 파월 의장은 이달 회의에서 0.25%포인트 인상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일부 연준 의원들은 0.5%포인트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연준의 빅스텝은 시장의 충격을 고려해 2000년 5월 이후 한번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세계 경제는 이제 그동안 마구 풀린 돈을 거두어 자산의 거품을 제거하는 긴축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경제학자들 사이에는 연준이 볼커 전 의장처럼 물가를 우선적으로 잡기 위해 초강력 긴축정책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주장과 고용과 성장에 대한 약영향을 우려해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시장이 매를 맞을 준비가 돼있는 상태에서 이왕이면 빨리 크게 한방 맞는 것이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해 장기적으로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하여 연준이 이번 달 금리를 0.5%포인트 올려도  큰 충격으로 이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달 월가에서 회자가 된 금리전망 보고서가 하나 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졸탄 포자르 금리 분석가가 쓴 글이다. 그는 '볼커 모멘트가 필요하다'는 소제목의 보고서에서 "연준이 경기침체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을 늦추려 하고 있는데, 이건 과거 성취해 본 적이 없는 것"이라며 볼커의 충격 요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각국의 정책 입안자들 머릿속은 복잡하다. 세계 경제가 그동안 멀리 있다고 느껴졌던 고(高)인플레이션에 이어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불청객이 다가오고 있다는 관측에 무게가 점점 더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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