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다 바꿔라' 삼성에서 '길을 열어라' 삼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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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원 수석논설위원
입력 2021-12-10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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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새 대표에 한종희·경계현 '투톱 체제' (서울=연합뉴스) 사진은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이재용(JY)이 이건희(KH)의 혈통을 확실히 이어받았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지난 7일 삼성전자를 이끄는 3명의 최고경영자를 전원 교체한 인사를 두고 과거 핵심 위치에 있던 삼성 OB들이 표출한 공통된 소감이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부친 이병철 회장의 사망으로 부회장에서 회장으로 오른 게 1987년 12월 1일이었다. 45세의 나이다. 그리고 5년 반이 흐른 1993년 6월 7일 그 유명한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 즉, ‘신경영’을 발표한다. 51세였다. 지난 2012년에 부회장에 오른 이재용은 이건희 회장이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자 이때부터 사실상 그룹 총수 역할을 해왔다. 46세였다. 그리고 2020년 10월 25일 이 회장이 세상을 뜨고 1년 뒤인 2021년 11월 23일 이재용 부회장은 캘리포니아 선언 즉, ‘뉴삼성’을 발표한다. 그는 지금 53세다. 참으로 유사한 승계와 뚜렷한 비전을 앞세운 새 체제구축의 방식이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는 선언에서 출발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은 “초격차만으로는 위기극복에 한계가 있다. 이제부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선언에서 출발한다.

이건희 회장 체제가 시작된 1987년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2조3813억원, 영업이익은 1127억원을 기록했다. 삼성그룹의 연매출도 10조원이 안 됐다. 그가 취임하고 30년간 그룹 연매출은 약 400조원으로 40배나 늘었다. 당시 이 회장은 삼성전자의 매출액이 10조원, 영업이익이 1조원을 넘을 때 최고의 회사, 최고의 대우를 할 수 있는 세계적 기업으로 키울 자신감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간부들 가운데 이를 그대로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가족승계 문제와 비서실과 원로층의 권력화 등 골치 아픈 과거의 유산을 털어내면서 미래 성장 사업을 찾아갔다.
1992년 세계 최초의 64메가D램 개발은 글로벌 삼성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에 힘입어 1993년 삼성전자는 매출액 8조1570억원, 영업이익 1조3090억원을 기록했다. 바로 이 해에 미국 LA-일본 도쿄-독일 프랑크푸르트의 회장 주재 CEO 연속회의가 열렸고, 마침내 프랑크푸르트의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 후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1994년 10조원을 돌파한 뒤 1998년에는 20조원을 넘어섰다. 불과 2년 뒤인 2000년에는 34조원대로 급증했다. 2008년 100조원 시대를 열고, 2012년에 200조원을 돌파했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2013년 229조원을 정점으로 찍은 뒤 약간의 기복을 거치며 2020년까지 7년간 정체되었다. 이 기간은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있던 기간과 겹친다. 이재용 부회장의 활동은 자제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부회장이 가졌던 위기감은 이따금씩 언론에 내비쳐졌다.
 
삼성전자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지만 반도체 실적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전체 영업이익 중 반도체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육박한다. 업계에서는 중장기 계획을 통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이재용 부회장은 글로벌 무대로 신성장 동력 찾기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인공지능(AI), 전장 등 미래 먹거리 발굴을 통한 차세대 경쟁력을 확보하고 기울어진 실적 쏠림 현상을 바로잡기 위한 돌파구로 풀이된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석방된 후 수차례 해외 출장길을 강행하며, 미래 사업 투자를 위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한국 AI 총괄센터 설립을 시작으로 올해 1월 미국 실리콘밸리, 5월 영국 케임브리지, 캐나다 토론토, 러시아 모스크바에 글로벌 AI 연구센터를 개소했고, 최근 미국 뉴욕과 캐나다 몬트리올까지 7번째 연구센터를 열었다. 앞서 열린 ‘삼성 AI 포럼’도 같은 맥락이다. 삼성 AI 포럼은 AI 분야의 세계 석학들을 초청해 최신 연구 동향을 공유하고 응용과 혁신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로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주관으로 열린다.
 
이렇게 보면 이재용 부회장의 캘리포니아 선언과 이번 삼성전자 CEO인사는 준비된 ‘뉴삼성’ 의 비전이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가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현재로선 인사와 조직개편을 보고 그 일단(一端)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4년 만에 3명의 CEO 교체를 하면서 스마트폰과 가전을 총괄하는 세트(제품)부문과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디바이스 부문 등 2개 부문 체제로 줄였다. 신임 CEO의 2명에게 강한 권한을 갖게 해 의사결정 스피드를 빠르게 하고, 인사와 조직의 대폭적인 쇄신으로 신사업 창출을 서둘러 중국의 추격을 뿌리친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미국 출장길에서 기업 경영환경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삼성의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가전, 디스플레이 등에서 중국 기업의 맹추격을 실감했다. 삼성제품의 성능이 중국 제품보다 뛰어나지만 스펙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현장에서 들었을 것이다. 경쟁에 말려들기 어려운 사업이나 제품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을 갖고 그는 돌아왔다. 고 이건희 회장이 누누이 강조했던 초격차도 이런 환경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말을 뉴삼성 선언에서 털어놓은 이유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시장의 격변기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번 인사에서 물러난 김현석 전 사장이 11월 9~1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23회 닛케이포럼 세계경영자회의 인터뷰에서 20~30대 젊은층의 기호가 세계적으로 균일해지고 있다며 지역과 국가별로 달리하던 제품 전략을 전환할 뜻을 밝힌 것이다. 삼성전자는 TV와 스마트폰, 가전에서 높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하드웨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계 인구의 25~30%가 매일 삼성 제품을 쓰고 있다는 조사도 있다. 그는 “삼성은 이 같은 통계에 근거해 기기들을 연결시켜 어떤 서비스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스마트 워치와 텔레비전을 연결하면 컨디션에 맞춘 운동 프로그램을 표시하는 등 새로운 부가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 상태에 따라 요리를 AI가 선택하는 미래도 멀지 않았다. AI는 모든 가전에 탑재된다. 개인화(개별 대응)와 자동화를 가져온다. 소유자를 대신해 가사를 하고, 추천 프로그램이나 상품을 선택해 준다. 가정용 로봇 개발도 할 것이다.
가전 분야에서는 물론 중국 업체도 약진하고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 성능만으로 이기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김 전 사장은 “거기서 ‘멀티 디바이스 익스피리언스’가 중요하다. 삼성의 기기를 연결해 데이터를 축적하고, 지금까지 없었던 경험을 제공한다. 미국 애플과 비슷한 고객 포섭의 접근법이지만 삼성은 생활 전반에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디자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냉장고 비스포크는 완전히 새로운 콘셉트로 성공하고 있다. 20~30대를 지칭하는 MZ 세대는 브랜드 충성도가 낮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사는 경향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삼성은 MZ 세대를 제품 개발·마케팅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지역이나 국가별로 제품이나 판매 전략을 바꾸는 것이 상식이었지만, 그 차이는 줄어 균일화가 진행되고 있다. 온라인상의 동영상이나 SNS(교류 사이트)를 공유하는 세대는 기호가 비슷할지도 모른다. 이런 추세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더욱 확산되고 있다. 김 전 사장의 인식은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 비전과 궤를 같이한다. 세트 부문과 디바이스 부문으로 슬림화한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삼성은 이번 인사·조직개편과 관련해 미 BCG(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자문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BCG가 어떤 항목을 중점적으로 다뤘으리라는 점을 유추할 수는 있다. BCG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디지털화, 원격 작업, 인력의 분산, 비동기·가상(버추얼) 협업, 기술 재교육과 기술 고도화 등 이미 근로 공간을 재편하고 있는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업은 추진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데 필요한 것과 인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배경으로 일(노동)의 미래를 과감하게 설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분석한다. BCG가 지난 6월, 6개 국가에서 1만명 이상의 지식 근로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3%가 유연한 일정을 원했고, 76%는 근무지의 유연성을 원했으며, 56%는 이직할 의사가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BCG는 이런 논리와 조사결과에 따라 기업의 리더는 일(노동)의 미래를 탐색할 때 두 가지 기본 목표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사내 복귀와 관련된 단기적인 의사 결정과 운영 문제를 관리해야 하는 동시에 고객과 직원의 달라진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혁신적인 업무와 인재 모델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실행한 경영진 쇄신과 이에 앞서 11월 말에 발표한 직원 평형 인사제도 개편이 BCG의 콘셉트와 맞물리는 모습이다. 연차등급 개념을 폐지해 성과를 내면 30대에도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 제도로 고쳤다. 능력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수평 조직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의도다.
 
고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발표할 때 삼성전자는 성장커브를 올라탈 때였다. 언덕을 치고 올라가는 힘이 생겨나는 시기였다. 이재용 부회장의 뉴삼성은 7년간의 장기정체가 끝나고 올해부터 재도약의 기미가 보이는 때에 시작된다. 지난 3분기 매출이 분기기준 70조원을 처음 돌파하고 3분기 누적 매출도 203조원을 기록해 4분기까지 합치면 역대 최고치인 2018년 연간 매출 243조7700억원을 크게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호조가 결국 CEO 3명을 퇴출시키는 인적쇄신과 조직개편을 가능케 한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 신경영 체제는 윤종용 전자 부회장(기술)-이학수 부회장(전략기획실장, 사실상 비서실장)-최도석 전자 경영총괄사장의 3각체제로 중후장대(重厚長大)형의 모습이었다. 이번에 갖춰진 이재용 뉴삼성 체제는 한종희 부회장(세트부문)-정현호 부회장(전자 사업지원 T/F장)-경계현 사장(디바이스부문) 의 3각 체제로 경박단소(輕薄短小) 형의 모습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11월 14일부터 열흘간 캐나다·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미국 출장은 2016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모더나, 버라이즌,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구글 등 글로벌 기업 경영진과 연쇄 회동을 했다. 특히 한스 베스트베리 버라이즌 CEO와는 차세대 이동통신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와는 시스템 반도체,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자율주행, 플랫폼 혁명 등 차세대 ICT·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또 백악관과 연방의회 의원들을 만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문제 등도 논의하고. 양국 정부·민간의 ‘전략적 협력’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이런 것이 이 부회장이 앞으로 더 챙겨야 할 일이다. 젊어진 3각 체제는 내실을 다지고, 이 부회장은 외곽을 돌며 파이를 키워가는 전략이다. ‘뉴삼성의 기회= 제4차산업혁명 x 코로나19 팬데믹 x 기후위기’라는 등식을 그려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부회장은 기술 중시의 의지를 더욱 다져야 한다. 삼성에 대한 기술경영학계의 조언이 의미심장하다.

“결국 지금의 삼성을 있게 한 것은 기술이며, 미래의 삼성을 만들어 갈 것도 기술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에 나서는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에게 등불이자 나침반은 바로 기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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