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사 졸업 후 정치군인 길 걸어...12·12 사태 후 정권 잡아
  • 5‧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등 현대사 비극에 사과 없어
  • 최근까지 사자명예훼손 소송 중... 추징금 미납하고 생 마감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부 쿠데타 주동 세력으로서 민주주의를 무력으로 진압한 비판을 받는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정치적 탄압 중 하나다.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아버지 전상우와 어머니 김점문의 6남 5녀 중 4남으로 태어난 전 전 대통령은 대구공고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을 한 신군부 세력.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노태우 전 대통령, 다섯 번째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1952년 입학한 육사 11기에는 전 전 대통령을 비롯해 노태우 전 대통령 등 훗날 신군부 세력 주축이 되는 인물들이 모였다. 이들의 리더격이었던 전 전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지지 시가행진’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30살의 나이에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 자리를 맡는다.

‘정치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전 전 대통령은 육사 동기들과 함께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만들어 군내 요직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1961년 소령으로 진급한 전 전 대통령은 1963년 중령으로 진급할 때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1969년 대령,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1976년부터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 대통령을 등에 엎고 1978년 소장 진급까지 승승장구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된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에 전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군사 반란)를 일으킨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까지 체포하고 전방 육군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키며 군 내 권력에서 사실상 최고 권력으로 등극했다.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고 군권을 잡은 전 전 대통령은 이듬해 자체적으로 중장 진급을 하고 정적 숙청에 나섰다. 이러한 전 전 대통령 행보를 본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고 1980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은 민심 달래기 대신 무력 진압을 택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바람이 불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조치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군 병력을 투입해 시민 시위대를 유혈진압했다. 이러한 행위는 전 전 대통령이 사망 직전까지 국민적 비난을 받았던 이유 중 하나다.
 

1980년 9월 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모습. [사진=연합뉴스]

결국,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8월 대장 진급 후 전역함과 동시에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7년 단임 대통령제에 간선제를 유지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켰다. 1981년 2월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제12대 대통령까지 연임하며 제5공화국 문을 열었다.

전 전 대통령은 불합리한 당선과정을 거친 만큼 국민의 시선을 돌릴 것이 필요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부흥한 3S가 이를 위해 나온 대표적인 문화정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S란 영상(Screen)·스포츠(Sports)·성문화(Sex)를 의미한다.

전두환 정부는 문화정책을 통해 컬러TV 보급을 확대하고 영화 상영 검열을 파격적으로 완화했다. 또한 프로야구, 프로축구, 씨름 등 스포츠 리그를 대거 창설했다. 당시 한국 경제 상황도 문화정책 구현에 한몫했다. 저유가‧저금리‧저달러를 의미하는 ‘3저 호황’을 누린 한국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잇달아 유치하며 위상을 높였다.

그 사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국민의 분노는 더 커졌다. 대통령 취임 전 삼청교육대 등 사회보호법을 실시했던 전 전 대통령은 꾸준히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고 언론 통폐합 조치, 보도지침에 이어 각종 비리·부패를 일으키고 호헌조치까지 발표하며 독재 정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사망 사건을 계기로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는 극에 달했다. 이는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전두환 정부는 굴복했다. 전 전 대통령이 후임자로 점 찍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간선제 대신 직선제 개헌을 택하고 6월 항쟁이 일어나자 6‧29 선언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12·12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사진=연합뉴스]

1988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전 전 대통령은 사망 전까지 정치군인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노태우 정부에 5공화국 과오 청산에 대한 요구가 빗발치자 전 전 대통령은 부인 이순자씨와 재임기간의 실책과 잘못 및 비리에 대해 사죄하고 백담사로 향했다. 이날은 1988년 11월 23일로 공교롭게 사망일과 같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5년에는 반란수괴죄와 살인,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무기 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으나 2년 만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특별사면됐다.

이후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추징금 2628억원을 완납했으며 유언으로 5·18 희생자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올해 8월 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연희동 자택을 나서는 전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반면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을 앓던 전 전 대통령은 추징금 약 1000억원을 미납한 채 사망했다. 전 전 대통령은 추징금 2205억원 중 532억원을 납부한 뒤 “예금 자산이 29만원밖에 없다”는 희대의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전 전 대통령은 고(故)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항소심 재판 공판기일 6일을 앞두고 사망했다.
 

[사진=아주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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