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겹겹이 만든 넋전, '망자의 혼' 달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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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 기자
입력 2021-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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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를 정신적 물질로 삼아 무구 제작...중.일 '설위설경' 전통도 포괄

  • 겹과 층 매개로 직조하는 공간조형...국제갤러리서 '황홀망' 연작 선봬

양혜규 작가의 ‘황홀망‘ 전시 전경 [사진=국제갤러리 제공]


세계적인 설치 미술 작가 양혜규가 무속 전통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신작은 특별했다.

전시장에서 아름다운 색과 어우러진 낯선 문양을 아무 생각 없이 한참 동안 바라봤다. 누군가의 한을 풀거나 영혼을 달래기 위한 무속 전통은 다소 어두운 분위기라는 선입견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망자에 대한 슬픔보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아름다운 추모’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양혜규 작가의 ‘황홀망‘(恍惚網)이 오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 K1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2020년부터 연구 및 제작에 착수한 황홀망 연작 중 12점을 선보였다. 이후 오는 15일부터는 국제갤러리의 새로운 한옥 공간인 리졸리 스튜디오(Rizzoli Studio) 내 뷰잉룸으로 자리를 옮겨 6점 정도를 추가로 소개할 계획이다.

평소에는 다소 낯선 무속 전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다. ‘까수기’라고도 불리는 설위설경(設位設經)은 종이를 접어 오린 후 다시 펼쳐 만드는 여러 가지 종이 무구(巫具) 혹은 이런 종이 무구를 만드는 무속 전통을 지칭한다. 무구는 무당이 굿을 할 때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말한다. 

설위설경을 제작하는 행위는 종이를 ‘까순다’, ‘바순다’ 혹은 ‘설경을 뜬다’ 등으로 표현하는데, 오늘날 한지로 무구를 만드는 전통은 충청도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기메’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여러 호칭으로 두루 이어지고 있다.

주로 물리적인 공간을 다루어 온 작가는 설위설경을 통해 종이라는 미미한 물질에 정신을 불어넣는 영적인 행위에 바탕을 둔 종이 무구 전반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예를 들어 무속에서는 한을 풀거나 영혼을 달래기 위해 한지로 넋전을 만들어 영혼을 불어넣고 의식을 치른다. 넋전은 망자의 영혼을 상징화한 종이 무구로, 굿을 할 때 망자와 동일시하여 사용된다. 

‘장파 충천 넋전 - 황홀망恍惚網 #5‘ [사진=양혜규 스튜디오 제공]


서리화는 ‘서리를 닮은 꽃’이라는 의미로, 길고 가는 흰종이 꽃잎을 얇은 나뭇가지 전체에 달아 만든 종이꽃이다. 서리화는 전국적으로 사용되지만, 지역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황해도에서는 서리화, 서울·경기 지역에서는 눈설화꽃, 전라도에서는 국수발이라고 부른다.

뿌리 없이 눈 위에 피어난다고 믿어지는 이 상징적인 꽃을 떡 등의 제물에 한가득 꽂아두기도 하는데, 신령이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에 내려올 때 이것을 타고 내려온다고 믿어진다.
 
작가는 물질과 정신이 서로 공명하는 관계를 상정하는 종이 무구 전통에 주목한다.

양혜규 작가는 종이 표면을 뚫어 숨 쉬게 하거나, 접혀진 겹을 통해 한지 특유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칼로 문양이나 형상을 떠내는 등의 방법론을 연구하고 심화했다.

정신적인 의례와 공예적인 전통에 기인한 문양 및 장식을 통해 추상적인 겹과 층을 매개하고 직조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작가가 블라인드, 짚풀공예, 방울 등 재료의 가공을 통해 해왔던 일이다. 이러한 공간 조형은 궁극적으로는 물질과 의식이 공명하는 관계성을 상정한다.

이번에 선보이는 황홀망은 크게 방안지와 한지를 함께 사용한 작품군과 한지로만 구성된 작품군으로 구분된다.

이 중 한지로만 구성된 작품의 경우,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진(陣)’과 ‘철망(鐵網)’ 등을 활용한 추상적인 문양의 배치에 역점을 둔 작품군 그리고 망자의 영혼을 상징하는 ‘넋전’이 서사적 형상을 구성하는 작품군 등으로 다시 세분화할 수 있다. 

철망은 잡귀를 체포하고 가두거나 ,굿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잡귀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게 차단시키고자 경청 혹은 해당 집 둘레에 설치하는 종이 무구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철망과 그 형태와 기능이 비슷하여 철망이라 이름 붙여지게 된 이 무구는 한지를 칼로 파내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크기나 형태에 따라 대철망·소철망·병철망 등으로 분류된다. 

영혼을 달래는 무속은 전 세계적으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설위설경을 원형으로 한 이러한 방법론은 중국의 전지(剪紙)공예, 일본의 키리가미, 유대 전통문서 장식 등에서 유사하게 발견된다. 황홀망 연작은 한국의 무속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나라의 전통을 포괄하고 있다.

문양이나 장식이 자주 등장하는 공예적인 전통에 꾸준히 주목해온 작가는 황홀망에서 종이를 단순한 재료가 아닌 삶을 서사하는 정신적 물질로 상정한다.

그동안 양 작가는 꾸준히 평면 작업을 제작해왔다. 래커 회화 연작(1994~), 편지 봉투 내부에 인쇄된 보안 무늬, 사포 등을 콜라주한 신용양호자 연작(2010~), 벽지 작업(2011~), 향신료와 야채를 재료로 한 판화 작업(2012~), 그리고 종이접기를 활용한 다양한 작업 등이 있다.

평면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은 평면성과 입체공간이 서로 교차하고 중첩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특히 작가는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오행비행’에서 5점의 현수막 끝단을 설위설경으로 장식한 바 있고, 그 이후에 이 가능성을 발견하며 여러 연구와 답사 과정을 거쳐 황홀망 연작에 이르렀다.

황홀망 연작을 다름 아닌 서울에서 최초로 선보이게 된 데는 그간의 연구 과정을 함께한 이들을 특별히 기리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

양혜규 작가는 “한국민속극박물관의 심하용, 이재선 법사, 이영희 법사, 강노심 법사, 샤머니즘 박물관의 양종승 박사, 정지수 태안문화원 사무국장, 장윤주 우란문화재단 학예사 등이 설위설경의 의미 및 의의의 이해를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며 “이번 작업은 지금까지 무속연구에 정진했던 많은 학자와 연구기관의 활동에 힘입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히고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조소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국립미술학교인 슈테델슐레에서 공부한 양 작가는 설치작품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양 작가는 2009년에는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선정됐고, 2018년에는 아시아 여성 최초로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가에게 주는 세계적 권위의 독일 ‘볼프강 한 상’을 받았다. 현재는 스튜디오가 있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작업을 하며 모교인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에서 정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낙하하는 해오름 - 황홀망恍惚網 #11‘ [사진=양혜규 스튜디오 제공]

 

‘고깔 풍차진 - 황홀망恍惚網 #7‘ [사진=양혜규 스튜디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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