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知行合一’ 실천한 '무등산 문인화' 대가를 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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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6-0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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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⑦ 의재 허백련, 예향 광주의 큰 화인(畵人)

의재 허백련


“제자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준다. 그들은 춘설헌 남향 방에 누운 나를 보고, 나는 그들에게 춘설차 한잔을 권한다. 차를 마시는 그들을 보며 내 한평생이 춘설차 한 모금만큼이나 향기로웠던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붉히곤 한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년)이 1977년 2월 86세로 세상을 뜨기 전 병석에서 한 말이다.(『뿌리깊은나무』 1977년 3월호)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의 거목이 남긴 이 한마디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누구든 이렇게 물을 법하다. 내 삶 또한 뜨거운 한잔의 차만큼이나 가치가 있었던가. 죽음 앞에서 그렇게 되물을 수 있을 만큼 겸허했던가.

이선옥 의재미술관 관장은 의재를 “한국화의 6대가 중 한 분으로서 남종문인화풍의 담담하면서도 품격 있는 화풍으로 근현대 화단을 이끌어간 대표적 화가”라고 했다. 귀에 익은 말은 그 다음에 나왔다. “이로써 남도를 자타공인의 예향(藝鄕)이 되게 한 주역이다.” 역시 그랬다. 예부터 광주는 어디를 가도 동양화 몇 점은 볼 수 있었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소치(小癡) 허련(許鍊), 미산(米山) 허형(許瀅), 남농(南農) 허건(許楗), 그리고 의재의 낙관이 찍힌 그림들도 만날 수 있었다. 광주는 그걸로 그냥 ‘예향’이었다.

의재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서 소치(1808∽1893)로 이어지는 남종문인화의 맥을 잇는 화가다. 남종화는 중국 명나라 말기, 서화가 동기창(董其昌 1555∽1636년)과 막시룡(莫是龍 1539?∽1586?)이 중국의 산수화를 화가의 신분, 이념적 배경, 준법(皴法‧산과 바위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 등을 기준으로 북종화(北宗畫)와 남종화로 나눈 데서 비롯됐다. 북종화는 직업적 화공(畫工)들이, 남종화는 사대부와 문인들이 주로 그렸다. 그래서 남종화를 남종문인화, 또는 그냥 문인화라고도 한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수묵산수화나 사군자가 대개 여기에 속한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1844년)가 대표적인 문인화다.

“정신을 풍부하게 하는 그림을”
 
의재는 어릴 적 진도(珍島)에서 종친인 미산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혔을 때도, 뒷날 광주에서 연진회(鍊眞會)를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을 때도 오직 문인화만 그리고 연구했다. 이 점은 한국화단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인화는 단순한 기예(技藝)가 아니라 정신(예컨대 선비정신)과 사상의 표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선옥 관장의 말이다. “의재가 남종문인화풍을 지닌 것만으로 문인화가인 것이 아니다. 유교적 교양과 박학한 지식, 동양적인 교양의 복합으로서 시‧서‧화를 두루 잘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각과 삶, 작품이 일치하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춘설헌 벽에는 정갈하게 쓴 ‘대학’(大學)의 주요 부분이 길게 붙어있었다고 한다.…그는 근현대기에 매우 드문 진정한 문인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의재 자신도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동양화 부문에서 최고상(1등이 없는 2등상)을 받은 후 수상 답사에서 “물형(物形)을 취하는 것보다 정신을 풍부하게 그린 그림을 숭상한다”고 했다. 심사위원장 가와이 교쿠도우(川合玉堂)는 “중국 것도 일본 것도 아닌 독특한 개성을 지닌 조선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좋은 작품”이라고 했다고 한다. 의재는 남종화를 남도의 실경 속으로 끌어와 조선 풍의 새로운 ‘남도 남종화’를 그렸다.

“무등산 살아, 필법도 무등산 닮아”

이선옥 관장은 의재가 날카롭고 딱딱한 골필(骨筆)보다도 피마준(披麻皴‧대마의 올을 풀어서 늘어놓은 듯 거친 선들의 모습으로 주로 흙산을 묘사할 때 쓰는 준법)과 같은 갈필(渴筆)을 즐겨 쓴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의재는 생전에 “골필보다는 흠뻑한 중묵이 마음에 들거든. 아마도 무등산에 사니까 필법도 무등산 같이 두리뭉실하게 달라진 것인지도 몰라”라고 했다는 것이다.(‘의재 허백련의 삶과 사회공헌활동’, 이선옥, 2015년)

의재가 문인화의 한 바탕이 되는 유교적 가치관을 습득하게 된 것은 어려서 구한말의 관리이자 대학자였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년)로부터 10년간 제대로 된 한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조참의, 승지, 궁내부 참의관 등을 지낸 무정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당해 1896년 진도로 유배된다. 이곳에서 한문서당을 열게 되는데 당시 8세였던 의재와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의재’라는 호도 무정이 지어준 것이다. (‘의재 허백련 선생의 생애와 사상, 양천허씨대종회, 강행원, 2010년)

의재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일제의 창씨개명을 거부할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한 사상가이자 실학적 교육의 실천가였다. 그는 무등산에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세워 미래의 농촌 지도자를 양성했고,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무등산에 ‘개천궁’이라는 단군신전까지 짓고자 했다.

학교 어려울 때마다 그림 팔아
 
1946년 의재는 오방 최흥종 목사와 함께 일제치하에서 피폐해진 나라를 부흥시키려면 농업을 살려야한다고 믿고 무등산에 ‘삼애학원’을 조성하기로 한다. 삼애(三愛)란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덴마크의 개척 목사 그룬투비(Grundivg 1783∽1872년)의 삼애사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삼애학원은 1953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승격되고, 1977년 운영난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2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수업료는 없고, 학생들이 자신들이 먹을 쌀을 가지고 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오전에는 이론공부, 오후에는 실습을 했다. 의재도 한문과 역사를 직접 가르쳤다. 아침 조회 시간이면 의재는 학생들에게 사서오경의 명구(名句)를 한 구절씩 읽어주곤 했다. 학교가 운영난으로 어려울 때마다 의재는 그림을 팔아 헤쳐 나갔다.

의재의 제자이자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의 졸업생인 정병춘 한국고구마산업중앙회 상임이사(72)는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매사에 지극정성 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했으며 선비정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회고했다.
 
“차(茶)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해”

의재는 초의선사의 다맥(茶脈)을 계승해 차(茶)문화 보급에도 앞장섰다. 1946년 무등다원을 정부로부터 사들여 삼애다원으로 개명하고 차를 재배했다. 의재의 설명이다. “다산 정약용이 차 마시는 국민은 흥하고 고춧가루 먹는 국민은 망한다고 해 웃어 넘겼지만 그 후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켜버려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차는 마음을 열고 부지런하게 하고, 고춧가루는 기가 열려 나른해져서 사람이 게으르게 된다.”

허백련은 1891년(고종 28년) 11월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雙井里)에서 허경언(許京彦)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의재는 같은 집안인 소치 허련의 아들 미산 허형에게 묵화를 배웠다. 무정 정만조가 12년 만에 서울로 돌아가자 의재도 그를 따라 상경해 기호학교(畿湖學校, 지금의 중앙고)에 입학한다. 그러나 도중에 학업을 중단하고 서화로 방향을 바꾼다. 1913년 22살 때 도일(渡日),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가 메이지(明治)대학으로 옮겨 청강한다. 1916년을 전후해 일본 각지에서 개인전을 열고 큰 성공을 거둔다.

1920년 가세가 기울자 일본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해 광주로 이주한다. 이 무렵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섭렵하고 진경사생화(眞景寫生畵)를 두 권의 화첩에 담기도 한다. 그 뒤 다시 일본에 가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가와이 교쿠도우 등과 교류한다. 1939년 1월 광주시 금동에 연진회(鍊眞會)를 개설한다. 연진회는 1944년 문을 닫을 때까지 많은 서화가를 배출함으로써 한국 남종화의 산실이 된다. (연진회는 1978년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자리에 연진회미술원을 세우고, 1984년 미술원 동문들로 구성된 ‘취묵회’가 출범한다.

게오르규, “한국인의 참모습”

해방 후 1949년 국전이 시작되자 추천작가로 추대되고 국전 심사위원을 맡는다. 196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고 1966년 예술원상을 수상한다. 1971년 ‘동양화 6대가전’에 ‘춘강활원’(春江闊遠) ‘하산심원’(夏山深遠) 등 4점을 출품한다. 당시 미술평론가 이구열은 “동아시아의 심상, 즉 정신을 담은 작품으로…전통철학을 넣은 높은 차원의 남종화를 호남에 뿌리 내리게 하고 호남인의 삶 속에 전파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무등산 춘설헌은 청빈한 사상가들과 진보적 계몽가들이 자주 찾는 호남 문인정신(文人精神)의 중심이었다. 해방 후엔 소설 '25시'를 쓴 루마니아의 망명작가 게오르규, 독일의 여류소설가 루이제 린저,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러트 주교(한국명 노대영)도 이곳을 방문했다. 1974년 춘설헌을 찾은 게오르규는 허백련과 춘설차를 마시고 나서 “한국인의 참모습을 만났다”고 했다. 러트 주교는 “동양의 일등 멋쟁이는 무등산 허백련이다. 꾸밈이 없고 담백한 사람이다. 화려한 다섯 가지 색이 들어 있는 그의 묵화는 획, 선마다 화심(畵心)이 담겨있다”고 했다.

의재의 손자인 허달재 의재문화재단 이사장의 회고다. “할아버지는 정신과 몸이 조화를 이뤄야 좋은 세상이 되고 화가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물질적인 풍요를 좇지 말고 늘 근검, 절약하라고 강조하셨다. 돈이 많으면 잘 쓸 줄 알아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돕거나 명분 있게 써야 잘 쓰는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와 춘설헌에서 합작

 

허백련, 대풍, 1976년, 종이에 엷은 색, 69.0 x 70.5 cm, 의재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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