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공산유토피아 때문에 사람 죽여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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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5-2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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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 ⑲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3>

-다석이 종교는 ‘상놈의 종교’가 돼야 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시대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다석은 스스로 19세기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1890년에 태어났는데 1910년에 조선조가 멸망했습니다.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쇠약해지듯 나라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라다가 20살이 되었을 때 기어이 조선조가 사라졌습니다. 15살 때 기독신자(크리스천)가 되어 연동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의지할 나라가 없어지자 교회라도 의지해보려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하자 나라를 찾으려는 우국지사들이 종로 YMCA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기염을 토했습니다. YMCA에 한국인 김정식(金貞植) 총무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연동교회를 지키며 교회에 살고 있었습니다. 김 총무는 일제 헌병에 체포돼 옥살이를 할 때 선교사들이 죄수들에게 신약성경을 넣어주고 전도를 해 크리스천이 됐습니다.
 YMCA 김 총무의 인도로 15살의 소년 류영모는 크리스천이 됐습니다. 장마에 냇물이 불어나듯 교인이 늘어나 교회 가건물이 좁아서 일 년에 몇 번이나 교회를 넓히는 공사를 하였습니다. 20살이 된 류영모 청년은 생각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나라는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는가? 나라의 힘이 없어서다. 어찌하여 나라에 힘이 없는가. 국민이 힘이 없어서다. 왜 국민이 힘이 없는가. 국민이 관료들에게 수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누구인가? 조선조에 공자 맹자를 숭상하는 유학자인 양반 귀족들이다. 귀족 양반들은 일을 안 하면서 일하는 상민을 천대하고 수탈했다. 상민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 삶의 의욕을 잃은 이들이다. 그들이 망하니 나라도 저절로 허물어진 것이다. 일본 포병 중대병력이 서울 남산에 포진하고 있으니 임금을 비롯한 나라의 대신들은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바치는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것을 아는 청년 류영모는 나라를 망친 귀족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크리스천이 되어 성경을 읽어보니 예수의 말씀이 분명하게 들려왔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들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5~28)
 이렇게 예수가 남을 섬기라는 종교를 가르치셨으니 상놈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귀족의식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지금 미얀마도 군인들의 귀족의식 때문에 나라가 결단이 나고 있습니다.”

다석의 제자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이 2005년 6월 안성 성베드로의 집에서 열린 다석사상강좌에서 예수 석가모니 공자 노자는 모두 하나님이 내신 인류의 등불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진제공=안성신문]



-다석은 1977년 87살에 가출해 객사(客死)를 시도했는데 예수와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박영호 선생은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나이를 보면 치매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요.
“다석은 1975년 1월 1일에 일기 쓰기를 멈추었습니다. 잠시 멈춘 게 아니라 끝낸 것입니다. 사고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창작이 안 됐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이가 85세에 들어섰을 때입니다. 2년 뒤인 1977년에 가출했습니다. 돌아가신 해는 4년 뒤인 1981년 2월 3일입니다. 사모님이 그 한해 전인 1980년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인지능력이 떨어져서 사모님이 돌아가신 것을 잘 몰랐습니다. 밤늦도록 마루에 앉아 있는 제자들을 보고 ‘왜 집에 안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밤이 되었으니 손님들은 귀가해야 하는 줄은 안 것입니다. 통 말이 없는 것뿐이지 이상한 행동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나는 이튿날 사모님 장지에 동행하고 홍일중 선생 차로 스승을 모시고 가족들보다 구기동 집으로 먼저 왔습니다. 다석은 집안으로 문 열고 들어가면서 ‘잘들 가세요’라고 인사까지 했습니다. 3년 전인 1977년에는 사고 능력이 온전했고 평소의 의지를 실행할 용기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혀 치매와는 관계가 없는 사건이라고 나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석이 톨스토이처럼 객사를 하려고 가출(家出)한 사건이라고 나는 단정하고 있습니다. 판단 근거가 되는 전말을 간단하게나마 회상해보겠습니다. 가족들의 말을 들어서 내가 아는 사실들입니다. 1977년 스승의 연세가 87세가 되는 해 여름철인 6월 19일에 서울 영천동 독립문 근처에 살고 있는 전병호 님을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혼자 집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아들(류자상)이 모시고 다녀왔습니다. 다석이 전병호 님을 만나서는 입을 열지 않으신 채로 마주 보고 한참 앉아 계시다가는 ‘가자’고 하여 일어났습니다. 전병호 님은 직업이 시계수리공이었으며 손재주가 좋아 스승 댁의 여러 가지 수리를 자주 해주었습니다. 스승의 잔심부름도 곧잘 해드리고 다석이 나의 집에 오실 때도 함께 모시고 온 분이십니다. 다석이 가출 이야기를 전병호 님에게는 사전에 일러주고 싶으셨는데 막상 입을 열려니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워 말없이 돌아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 6월 20일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가 서 있는 그 아랫자락 매바위골에 혼자 아침부터 들어가 종일 그곳에 있다가 해가 서산에 기울어질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스승은 하루 한 끼를 저녁에 들었습니다. 매바위골에서 온종일 혼자서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구경을 한 것도 아니고 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결사 가출을 결행하겠다는 것을 한얼님께 아뢰고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아뢰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를 올린 그 심정과 비슷한 기도였음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 6월 21일 아침에는 외출용 두루마기를 입고 가족들에게 ‘나 오늘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하고 집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아들(류자상)이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따라나서자 괜찮다고 하면서 아들의 동행을 거절하고 집을 나서자 며느리가 얼른 선생의 손에 지폐(돈) 몇 장을 드리자 그것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집을 나선 어르신이 밤이 되어도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계획적으로 착착 진행한 일이 치매증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 날밤을 새며 어르신께서 귀가하기를 기다렸으나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다음날에는 하는 수없이 성북경찰서를 찾아가 가출인 신고를 하였습니다. 6월 22일 저녁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밤 10시가 되어서야 성북경찰서 소속 방범대원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국민대학 뒤편 북악산 자락에 이 댁 어르신 같은 한복 입은 노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는 주민 신고가 들어왔다는 전갈이었습니다. 경찰이 현장에 갔으니 조금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만 하여도 구기동 집에는 전화가 없었습니다. 밤 12시가 되어서 경찰관이 혼수상태의 다석을 등에 업고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의식 없이 복도 마루에 누인 스승은 하지 볕살에 그을려 얼굴이 벌겋게 익었고 한복은 흙투성이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나고 26일이 되어서 의식이 돌아와 깨어났습니다. 가출 객사는 결국 실패하였으나 그 정신만은 뚜렷했습니다. 예수처럼 아예 가정을 이루지 않았거나 석가처럼 가정 해체하지 못하고 해혼이란 온건한 길을 걸었으나 언제나 가정에 매여 있는 것이 한얼님께 죄송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진리 정신이 들자면 집을 버려야 한다. 집을 뛰쳐나가는 게 참되게 사는 것이다. 거주(居住)를 삶으로 알아서는 못쓴다. 사나이는 집 속에는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더러움을 떠나 거룩한 데로 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다. 몸을 극복하여 얼로 솟나지는 것이 신앙이다. 나는 죽음 맛을 좀 보고파요. 그런데 그 죽음 맛을 보기 싫다는 게 뭔가? 이 몸은 땅에 내던지고 얼은 위로 들려야 한다. 한얼(하늘)에서 온 얼은 들리어 한얼로 올리우고 땅에서 온 몸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 있는 동안에는 땅의 일을 충실히 해야 한다. 나는 이 다음에 대학생이 될 테니 유치원 일은 안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류영모 <다석강의록>)
객사를 기도한 다석의 출가는 바로 이러한 정신사상의 표출이었던 것이지 늙은이가 망령 나서 한 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출한 그 날의 행선지를 대강 더듬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서 구기동을 빠져 평창동으로 나아가 보토현 재(고개)를 넘어서 정릉 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도선사 근처에 있는 4.19 의거 순국 학생 의사들의 무덤에 참배 묵상으로 긴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다석 스승님은 YMCA 금요강좌에서 4.19 의거 순국 학생들에 대해서 여러 번 찬양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 날 서울의 공중에 성령의 바람이 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본디 죽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옛날엔 무섭게 느껴지던 무덤이 더 다정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4.19 의사들 무덤을 찾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 씨알(民)을 위함이 한얼님을 위함이다. 예수는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했다.(마태 25:40) 백성(씨알)을 모른다 하면서 한얼님만 섬긴다 함도, 한얼님을 모른다고 하고 백성만 위한다 함도 다 거짓이다. 이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가 되어서 처음부터 마음이 민주가 되어야 한다. 씨알이 나라의 임자가 된 것은 천의(天意)요, 천도(天道)다. 예수를 정말 믿고 염불을 정말 하는 사람은 씨알님을 머리에 인 자다.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좋아할 것을 좋아하는 게 우리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잘할 수 없다. 그것은 한얼님이 시키신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4.19 의거로 순국한 학생묘지에서 기도를 올리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민대학 뒤쪽으로 해서 사람들이 드문 곳으로 북악산으로 올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적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한얼님 품속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이미 일기를 안 쓴 지가 5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일력을 썼는데 집을 떠나시든 21일 일력에 스승의 글씨로 <그눠제계듦>이라고 써놓으신 것을 이 사람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줌 똥 싸지 않고서 한얼나라 들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 다섯 글자도 객사를 위한 출가의 결심을 굳힌 마지막 흔적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 때의 심정을 그려놓은 시문이 다석일지에 쓰여 있습니다.

      쭉 빠지는 살(몸) 보며

쭈그러드는 살(몸) 살피면서 안 죽으러들 맘 먹을 손가?
속사람(얼나)이 날로 날로 새로움을 살필 양이면
솟날 나 몸 벗을 날만 맘에 먹고 서리다.

       참 쉼에 들라지

돈 써 지낸 건 갈가리 갈내기도 하더니만
힘써 오를란 데는 쉼없난 얼숨 쉼으로써만
일 없어서 쉼이 아니고 참 쉼에만 들라지
(류영모 <다석일지>)”

 
 

2017년 6월 화가 전미선의 전시회에서 다석의 초상 앞에 선 박영호.

-다석은 오산학교에 가르치는 선생으로 가서 가르친 것 이상으로 배우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했다고 전기에 기록돼 있는데, 그의 사상 형성에 누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었는가요?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존 듀이는 대학교수로 가기 전 3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3년 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나니 ‘가르친 것보다 배운 것이 더 많더라’는 이야기를 썼습니다. 듀이도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다석은 경신학교를 졸업하고서 오산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갔습니다. 그때 신식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없는데 교육을 해야 나라가 독립할 수 있다는 사상이 팽배해 여기저기서 학교를 세워서 교사 품귀 현상이 극심할 때였습니다. 다석이 오산학교 교단에 섰을 때는 갓 20살이었고, 교장으로 갔을 때는 31살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라 하여도 나이가 어느 정도 성숙해야 지식도 온축(蘊蓄)되고 인격도 품위를 갖추게 됩니다.
다석 선생은 15살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20살에 오산학교에서 수업을 시작할 때 학생들에게 ‘다같이 기도합시다’라고 하여 당신이 공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나이는 교단에 선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비슷하였습니다. 기도해 본 적이 없으니 서로서로 눈치만 보면서 머리를 숙이는 학생은 없었답니다. 그렇게 하기를 일주일이 지나니 머리를 숙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여준, 신채호 선생이 다석에게 “어찌하여 성경만 보나? 불경도 읽어보고 노자도 읽어 보라”고 권고하였답니다. 그분들의 나이는 다석의 아버지나 큰 형 뻘이었습니다. 만주에 먼저 간 이들이 자리를 잡아놓으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갈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배 선생들의 말씀을 가볍게 들을 수만 없어서 도서실에 비치되어 있는 불경도 읽고 노자도 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뒤에 다석 선생은 자주 ‘나는 20살 때부터 노자를 읽게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춘원 이광수 선생도 이미 봄 학기 때부터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춘원은 나이가 다석과 비슷합니다. 춘원은 일본에 공부를 더 하러 가고 싶은데 남강 이승훈 선생의 강요에 못이겨 오산학교에서 외국어에서 과학 수학까지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왔으니 가르치라고 한 것입니다. 다석은 오산학교에서 과학 수학 천문학까지 가르쳤습니다. 춘원이 일본에서 올 때 톨스토이 전집을 가지고 와서 다석도 톨스토이 전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석이 수업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자는 말도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년 뒤에 오산학교를 물러날 때는 교회의 사도신경은 안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석 전기>에 다석이 오산학교에 가서 가르친 것보다 더 많이 배워왔다는 뜻으로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 하였던 것입니다.”
-다석이 일본에서 1년간 공부하고 대학에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석전기>에는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던데요.
“다석이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물러난 것은 신앙문제 때문이었습니다. 다석으로 말미암아 오산학교에 기독교가 전도되고 기독교를 접한 학생들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본 학교 교주인 남강이 나라의 독립은 기독교에 있다고 믿게 되어 교내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다석과 춘원이 예배 인도를 하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크게 받은 춘원은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를 읽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남강도 기독교를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평양신학교에 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고 평양신학교 학장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남강이 독립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자 오산학교를 돌보아 달라고 평양 신학교 학장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 학장이 오산학교에 와서 학교 사정을 살피고 교사들을 감독하고 학교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춘원이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단(異端)이라고 규정하고 교사와 학생들의 신앙을 조사하여 색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춘원과 함께 톨스토이 전집에 심취한 다석은 신앙 조사를 받고 더 학교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면서 서울 집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춘원도 평양신학교 학장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결국 시베리아를 거쳐 바이칼호 구경을 하고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석은 춘원의 권유로 일본에 가서 대학 공부를 해 실력이 있는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당시 3년의 경산학교 졸업 자격으로는 일본대학에 응시할 자격도 안 되어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다녔습니다. 2년을 다녀야 대학 응시자격을 얻는데 1년을 다니고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와서 톨스토이 사상서를 구입하여 열심히 읽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어찌할꼬>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극복하자면 젊은 지성인들이 권좌에 오르려 하지 말고 농촌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어야 하고 타율적인 교의 신조에 얽매여 정신적인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의 가르침인 얼나의 진리정신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는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루가 16:15)
다석의 생각은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의 고위직에 오르지 말자는 것인데 더구나 그 당시는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가 아닙니까? 류달영 선생도 수원농대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라고 교수들을 통해 강요하다시피 하였으나 총독부가 싫어서 개성에 있는 호수돈 여학교 교사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학교 가기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런 인생관이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어서 뒤에 자녀들까지 중학교(5년제) 까지만 공부시켰습니다. 자식을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것보다 결심하기가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자식의 입신출세를 위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고자 공문서 위조까지 서슴지 않는 불법을 저질러 감옥에 들어간 어머니가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지만 다석의 자녀들은 모두 수재들인데도 입학시험을 치르지도 못하였으니 참으로 그 마음이 하늘과 땅만큼 대조가 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은 예수처럼 한얼님만 사랑하면서 가정을 이루지 않고 혼자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석가처럼 이룬 가정을 해체해 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터에 자녀를 대학에 안 보낸 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석이 혼인하여 자식을 낳은 것을 못할 노릇을 하였다고 뉘우친 시조입니다.

        못할 노릇

차마 남의 못할 노릇 하는 것이 새끼(자녀) 낳기
외로이 깨끗이 빈맘으로 위로 한얼님께 바로가기
처음부터 안못해서 아내를 안해라 해본다.
 (류영모 다석일지. 1961.2.12. 박영호가 쉽게 개필)”
 

홍익재에서 처음 펴낸 다석일지. 



-6·25를 겪은 다석이 “사람이 어리석어서 공산주의 같은 데 빠진다. 우리에게는 빵 이상의 것이 있다”고 말했는데요. 다석이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사상을 형성하게 된 경위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요? 톨스토이의 영향도 있습니까?
”러시아 차르 왕국이 망하고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집권한 해가 1912년입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그 2년 전 191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톨스토이가 러시아 차르 왕정시대의 귀족이라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50살에 얼나로 솟나는 참회를 하고는 그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이 반대하면서 가정불화가 생기자 82살의 톨스토이는 가출해 기차 여행을 하다가 독감 폐렴으로 역장 관사에서 영면하였습니다. 러시아가 공산화하고 집권한 레닌은 레프 톨스토이가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준 진짜 공산주의자라고 존경하여 모스크바 거리에 큰 석상을 세웠습니다. 톨스토이의 옛 경작지에 있는 집은 기념관이 되었습니다. 톨스토이가 살아있을 때만 해도 지하조직이던 공산당이 톨스토이가 영지를 농민들에게 스스로 나눠주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함께 혁명 운동을 하자고 했으나 톨스토이는 ‘당신들의 뜻은 좋은데 사람을 미워하기만 하지 사랑할 줄을 모르는데 어떻게 함께 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거절했습니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죽인 사람이 200만 명도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톨스토이가 공산당을 정확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영국의 사상가 버틀런드 러셀은 자칭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로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이 공산혁명을 성공시키자 우쭐거리면서 자랑하고 싶어서 러셀을 모스크바로 초청하였습니다. 러셀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 초청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모스크바에 내리자 공산주의 국가라 평등하다고 모든 사람의 직책 이름 밑에 동무라는 말을 붙이는데 진짜 동무의 나라가 된 것 같았답니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그 직책에 따라 동무라는 말의 엑센트가 달라 엑센트만 들어도 지위가 낮은지 높은지를 알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겉으로만 평등이지 속으로는 결코 평등한 나라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갔을 때 혁명 중인 러시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민의 적인 차르 왕정 시대에 잘 살았고 지위를 가진 자들을 반동분자라 하여 처형했습니다. 죽는 이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리는데 온 몸에 소름이 끼치어 모스크바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일찍이 영국에 돌아와서는 반공주의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다석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준엄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심판이라 하겠습니다. 1957년에 한 말입니다.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이지만 공산당이 정치하는 것은 영웅주의로서 호강(豪强)을 한다. 호(豪)는 멧돼지가 무모하게 뛸 때 온 산이 흔들리고 돌들이 와르르 흩어지는 표현이다. 권력으로나 금력으로나 억눌러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툭하면 유토피아를 말하는데 이상세계가 온다면 어떻단 말인가? 유토피아도 상대세계일 것이고 나고 죽는 세계이겠지. 우주 자체가 한숨인데 유토피아인들 우는 소리가 없겠는가? 한숨은 이상세계에서도 나온다. 그놈의 이상세계가 어떠한지 그 세상 가지고 사람을 심판할 만한 것이 되겠는가? 그놈의 공산 유토피아 때문에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여도 된단 말인가? 거짓말 잘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는 공산주의는 머지않아 반드시 미끄러질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미 소련 공산주의 국가는 미끄러졌습니다.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공산당의 주장은 다 거짓말로 끝장났다고 말하여 저절로 무너지고 지금은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로 나라를 세운 북한 인민 공화국은 나라가 아니라 그대로 큰 형무소 같이 되어 인민이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다석이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것 예수 석가의 제나 (ego)를 초극하여 얼나로 살자는 예수 석가의 진리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 땅 여기에 붙들려 매였으므로 영원한 얼 생명의 한얼나라에 가야 한다. 천원정(天遠征) 곧 한얼님이 얼나라로 원정하여 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다라야 할 목적지는 저 한얼나라에 있지 이 땅에 있지 않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얼의 나라에서는 한얼나라와 한얼님이 둘이 아니요 하나다.’ (류영모 <다석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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