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박선홍은 '人間 무등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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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5-2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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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⑤ '광주정신'에 올인한 불꽃의 지역 인문학자 · 환경운동가

故 박선홍 저자 사진 [사진=광주문화재단 제공]

지역 사랑의 귀감, 박선홍

조금 진부하나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의 <소용돌이의 정치>(The politics of vortex, 1968년)는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용하다. 정치, 사회의 모든 요소들이 오직 서울로 서울로, 소용돌이치면서 몰려드는 현상 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능력 있다는 엘리트들은 지금도 서울에 내처 살다가 출세의 에너지가 소진될 때쯤이면 “고향을 위한 마지막 봉사”(공직 출마)라며 고향의 문을 두드릴 뿐이다.

무등산 지킴이, 광주학(光州學)의 선구자 혜운 박선홍(1926~2017)은 평생 고향에 살면서 고향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누구나 입만 열면 지방, 자치분권, 균형발전을 얘기하는 이 시대에 그는 진실로 지역발전의 귀감이 될 만한 인물이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광주, 고도로 정치화하고 의식화한 이 도시에서 역설적으로 그의 향토사랑은 더욱 빛난다.

그가 쓴 <광주100년>(1994년 초판)과 <무등산>(2008년)은 광주와 무등산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교과서이자 바이블이다. 그 자신 또한 ‘살아있는 광주‧무등산 박물관’으로 불렸다. 역저 <무등산>의 서문을 쓴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국문학)는 “광주의 기상은 무등산을 통해 꽃피고, 무등산의 기운은 광주에서 빛난다. 광주와 무등산 사이에 딱 한 사람을 놓는다면 그건 박선홍 선생”이라고 말했다.

박선홍과 광주, 그리고 무등산은 ‘모태신앙’처럼 연결돼 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무등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광주 충장로 5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무등산은 모든 광주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산이지만 그에겐 더 특별했다. 그의 회고다. “어려서 아버지는 내게 곧잘 시내 가게들의 상호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보통학교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도 광주에서 서울까지 지나는 철도역들의 이름을 메모해오도록 했다. 싫지 않았다.”(<광주100년>)

부친의 의도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람은 제 고장, 제 나라의 지리(地理)부터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을 게다. 덕분에 박선홍은 어릴 때부터 지리에 밝았고 향토 자료와 기록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무등산이 그 중심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박선홍의 장남인 박상철 전남대 연구석좌교수(73·전 서울대 의대교수)는 장수‧노화과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는 “아버지는 나의 초등학교 성적표까지 보관할 만큼 삶의 기록들을 소중히 여겼다”고 말했다.
 
고 박인천 회장과 만나다

그의 무등산보호운동은 1949년 박인천 당시 광주상공회의소 회장(광주여객자동차 대표, 뒷날 금호그룹회장 1901∽1984년)을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평소 무등산에 관심이 많았던 박 회장은 조선대 경제학과를 수료하고 광주시청 상공담당 공무원으로 있던 박선홍을 광주상공회의소로 스카우트해 자신 밑에 총무로 앉힌다.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무등산을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다.

두 사람은 무등산개발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958년 현지 조사를 하면서 대대적인 무등산 보존 캠페인을 시작한다. 무등산의 절경과 곳곳에 산재한 문화재들이 전국적으로 소개된 것도 이때였다. 정부에 무등산을 관광지로 지정해달라는 건의를 하고, 군(軍) 작전도로를 활용해 관광도로를 뚫고 곳곳에 표지판도 설치한다. 비용은 대부분 박인천 회장이 댔다.
 

무등산 첫 개발조사단 [사진=광주문화재단 제공]

무등산과 내셔널 트러스트(NT)운동

무등산은 광주 옛 도심에서 걸어서 4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도심 접근성이 이렇게 좋은 산은 드물다. 대신 휴일이면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와 산이 훼손되고 오염되기 일쑤였다. 박선홍은 지역 언론사들과 함께 △쓰레기 되가져가기 △취사 안하기 △도시락 지참하기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끼리 먼저 인사하기 등의 캠페인을 벌여나갔다. ‘취사 안하기’는 중앙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 전국의 공원으로 확산됐다. 1994년엔 환경대학을 개설하고, 문화유적연구회를 만들어 무등산 지킴이, 문화 해설사도 양성했다. 무등산을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1989년 광주 시민단체, 환경단체들을 모아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를 만들고 무등산 공유화운동을 시작한다. 지주와 시민들을 상대로 ‘무등산 1평 갖기’운동을 벌여 토지를 기부 받고 기금을 모았다. 영국 옥타비아 힐(1838~1912)이 1895년부터 벌인 토지신탁(National Trust) 운동을 모델로 한 것. 시민 10만여 명이 참여해 16만평을 매입, 광주시에 기증함으로써 무등산의 난개발을 막아낸다. 국내 최초의 토지공유화운동이었다. 2001년 무등산공유화재단을 설립했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2013년 무등산은 마침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

“무등산 수박, 결실기엔 喪家 못가

50세가 되던 1976년 박선홍은 무등산의 유래, 전설, 명승 등을 총정리한 인문지리서 <무등산>을 펴낸다. 평소 무등산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며 조사, 발굴하고 기록한 책이다. 그는 이 책을 2013년까지 무려 37년 동안 수정, 보완했다. 노성대 전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는 “9순을 바라보는 고령에도 직접 첨삭한 교정본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가 무등산과 무등산 수박에 관해 기술한 것을 잠시 보자.

“…무등산 정상은 세 개의 봉우리로 돼있다.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인데 서석대, 입석대처럼 어느 것이나 선돌의 무더기로 돼있다.… 서남쪽을 바라보면 나주평야를 바탕으로 월출산이 머리를 조아리듯 굽이굽이 돌아가는 영산강 줄기는 강변에 빨아놓은 무명베처럼 펼쳐져 있다. 청명한 날이면 다도해를 아스라이 바라볼 수도 있다. … 지왕봉 정상에는 ‘뜀바위뛰엄바위’가 있다. 김덕령 장군(광주 출신 임란 의병장)이 뜀질을 하면서 무술을 연마하던 훈련장이었다… 이 전설을 전해들은 일본군 장교가 나도 뛸 수 있다고 뛰다가 떨어져 죽은 일도 있었다.…”

“무등산 수박은 일명 ‘푸랭이수박’이라고도 부른다. 크기나 청량한 맛으로 치면 최고의 수박이다. 조선조 영조 때의 탁지지(度支志)의 축일진상품목(逐日進上品目)에 들어있어서 이때 수박 재배가 궤도에 올랐음을 짐작게 한다. 수박은 결실기가 가까워지면 재배하는 사람이나 가족들은 상가(喪家)에 가서는 안 되며, 상중인 사람도 수박 밭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 금기를 지키지 않으면 수박은 열매를 맺지 않고 썩어버린다.…”
 
약속대로 무등산에 오른 노무현

무등산 등정 첫 들목 중 하나인 광주시 동구 문빈정사(대한불교 조계종) 앞에 가면 ‘무등산 노무현길’이라는 2m 높이의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이 길은 증심사 입구에서 당산나무를 거쳐 중머리재-용추삼거리-장불재까지 3.5㎞쯤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16대 대선 때 광주유세에서 “당선되면 무등산에 오르겠다”고 약속했고, 당선되자 약속대로 2007년 5월19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무등산에 올랐다. 이때 박선홍도 동행했다. 그는 노 대통령에게 “무등산 정상에 있는 군부대를 옮겨 달라”고 건의했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백종천 당시 청와대 안보정책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토를 지시했다. 그러나 군의 반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박선홍은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박선홍은 1987년부터 20년 동안 ‘광주민학회’(光州民學會)를 이끌며 문화유산답사와 지역문화 전수에 앞장선다. 그 결과물이 1994년 나온 <광주100년>이다. 그는 2012년 <무등산>과 <광주100년>의 지적재산권을 광주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재단 측은 그의 뜻에 따라 <광주100년>의 내용을 보강해 2012∽2015년, 3년에 걸쳐 권당 300쪽이 넘는 방대한 책 1, 2, 3권으로 다시 펴냈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 1세기에 걸쳐 광주의 역사와 문화, 풍물과 세속, 상공업과 체육, 인물을 담았다.

얼마나 세밀히 관찰하고 기록했는지 광주 인근에서 잡히는 복어(鰒魚)의 맛과 당시 한량들의 옷차림까지도 언급돼 있다. 권영민 교수가 “박선홍의 광주에 대한 집착은 광주에 대한 신앙과도 같고, ‘광주학’이라고 할 정도의 학문적인 깊이와 전문성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光州學

일각에서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광주학’의 개론서이자 심화학습의 교재로 삼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물론 ‘광주학’에 대해선 엇갈린 시선도 있다. 광주의 정신가치를 독립된 새로운 영역(discipline)이나 그릇에 담음으로써 연구의 전문성과 특수성,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겠지만 자칫하면 광주정신을 ‘광주’라는 닫힌 공간에 가둠으로써 보편성과 개방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광주학’이 과연 이런 태생적 한계를 넘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선홍은 광주에서 처음으로 보이스카우트를 창립하고 청소년 사회교육과 리더십 지도에 힘썼다. 1993년 모교인 조선대의 첫 관선이사장에 임명돼 6년 동안 국내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해 의과대학 발전을 주도했고, 치과대학도 설립했다. 광주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만들어 사회적 약자 돕기에도 앞장섰다. 광주상의 상근 부회장을 지냈고 대통령 표창, 국민포상, 철탑산업훈장, 광주시민대상, 대한민국 산악대상 환경상 등을 받았다. 2017년 8월 9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 광주영락공원에 묻혔다.
 

무등산과 광주시 전경 [사진=광주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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