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7)] '천하효자 류영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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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02-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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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석의 재발견- 다석神觀(下) 하늘효자 사상 - 신과 인간의 관계 정립

하느님과 인간이 진짜 부자(父子) 관계다

히브리어 '벤 아담'(그리스어 '휘오스 투 안드로푸)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말은 인자(人子) 혹은 사람으로 번역됐다. 신약에서는 마가복음 2장에 나온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느님 한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人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마가 2:6~11)

영어성경에서는 벤 아담을 '선오브맨(son of man)'으로 옮기기도 하지만, '모털(mortal,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이라고도 번역한다. 즉, 인간의 자식이기에 신처럼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류영모는 이 말에서 깊은 영감(靈感)을 얻었다. 예수는 신을 향해 '하느님 아버지'란 호칭을 썼다. 사람의 자식이면서 하느님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의 '시범'은, 다른 인간에게도 신이 그런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호칭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면서 인간 사이의 혈육관계가 지닌 친연성(親緣性)을 지니고 있다는 함의를 나타낸다.

인간의 부자(父子) 관계는, 자(子)를 생산(生産)한 부(父)가 이뤄낸 관계다. 이 관계의 본질은 보다 근원적인 관계에서 빌려온 것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는 '부자(父子)' 관계가 성립한다. 오히려 인간 부자(父子)는 신의 창조를 거든 인간과 그의 대리 행위 속에서 생겨난 자식간의 '대리(代理) 부자관계'라고 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부자 관계야 말로 '참 부자(父子)관계'라는 걸 뚜렷하게 직시한 사람이 류영모다. 인간 어버이가 보편적으로 자식에게 지니는 감정은, 자비와 '동일성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핏줄인 자식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며, 그 자식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연스런 마음을 지니게 된다. 인간 부자관계가 만들어낸 이런 감정은 천부(天父)와 인자(人子) 사이에 그 원형적 양상이 있었을 것이다. 유추해보면,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신과 동일한 존재로서 인간을 응시하는 시선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구에서는, 신의 무한한 사랑을 강조한 나머지 인자(人子)가 지니고 있을 '유전적 동일성'을 부각시키지 않은 측면이 있다. 오직 신의 뜻에 의해 간택(揀擇)되는 인간을 주목하며 그런 대상을 향한 신의 각별한 사랑을 강조하는 서사 구조만을 발전시켜왔을 뿐이다. 그래서 성령을 입은 인간인 예수의 본질적인 측면을 깊이 살피지 못한 점이 있다. 예수가 스스로를 인자(人子)라 칭한 것은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을 넘어서서 신과 동일성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신과 인간의 동일성인 유전자는 어디에 있는가. 바로 '성령'에 있다. 류영모가 말하는 '얼'이다. 인간에게 신의 '얼'로서 이뤄진 정체성이 바로 '얼나'다. 아버지의 얼을 받은 아들의 자아인 셈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모든 것이 일치하지는 않듯이, 신과 인간 사이에도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 육신을 받은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현재성은 신성(神性)과 일치하지 않는다. 육신과 생명을 벗는 순간을 귀일(歸一)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신성으로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이 회복되는 접점이다.  
 

[다석 류영모]


공자의 '효(孝)'는 동양적 영생 프로그램

신(神)인 아버지의 관점에서 인간을 사랑하고 동일시한다면, 인간인 자식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구에서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해왔다. 인간이 신을 향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믿음뿐이며, 믿음으로 천국에 들 수 있다는 교리를 갖춰왔다. 그 믿음이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신앙윤리가 강화된 까닭은, 종교가 오랫동안 핍박을 받으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최소한의 검문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등장하면서 이미 신인(神人) 관계에 있어서, '신앙 검문' 이상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파했으나 그 의미를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천부인자(天父人子) 관계를 뚜렷이 증명함으로써, 사람아들이 해야할 관계윤리에 대한 영감(靈感)을 던져준 것이다. 예수가 말한 가장 긴요한 메시지는 '사랑하라'였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자비에 대한 당연한 보은(報恩)이며 미덕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아들이 그 이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것은 바로 동양적인 교양과 수행을 쌓은 류영모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부자(父子) 윤리에 관한 세심한 실천덕목들이 오래전부터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효(孝) 혹은 효도(효의 도리)다.

효(孝)를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은 공자(孔子)다. 효는 인간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히기도 한다. 원래 '효'는, 동양사회에서 다양한 리스크(전쟁, 폭정, 질병, 빈곤)에 대응하기 위해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강조된 윤리의 핵심이었다. 즉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안정을 모색하는 핵심네트워크가 부모자식이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가족이었기에, '효'라는 가치를 부양하여 근본적인 불안을 완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효'는 단순히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이 아니라,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인간이 영생과 불멸을 얻는 유일무이한 방안으로 채택된다. 나는 태어나서 살다가 죽지만, 나는 그냥 태어나기 전과 같이 무화(無化)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낳아, 나의 몸과 나의 혼과 나의 생각을 지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문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통시적 자아개념으로 발전한다. 개체적 죽음보다 가치있는 것은 통시적 자아의 '끊이지 않는 삶'이다. 공자는 이런 기본적 틀을 지니고, '효'를 단기적 사회 안정화의 소극적 수단으로만 여기는 데서 더 나아가, 삶과 죽음으로 갈라선 부모와 자식이라는 통시적 자아를 결합하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것이 '제사'라는 방식의 미팅이다. 제사는 죽은 부모와 살아있는 자식을 정기적으로 만나게 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자 했던, 공자의 야심찬 기획이었다. 이것은 생존 때에만 강조되던 '효'를, 영원으로 확대하여 인간의 삶의 가치를 완전하도록 하는 혁신적 사고였다.

공자가 부자(父子)라는 사적인 관계를 집요하게 코치하려고 한 까닭은,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차이가 부자(父子)윤리를 자주 훼손해왔기 때문이다. 즉 어버이가 자식에게 하는 사랑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에 가깝지만, 그 사랑에 보은하고 봉양하고 기억하는 치사랑은 교육되고 장려되고 분발하게 하지 않으면 이기심에 매몰되기 쉬운 감정인 것이 사실이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은 거기에서 나왔다. 부성애는 윤리라고 볼 수 없지만, 효는 윤리로 요구되는 것이다. 신과 인간 사이에도 다르지 않다. 신의 자비는 당위이지만, 그 자비에 응답하는 인간의 신앙은 '윤리'에 가깝다. 그 윤리는 바로 효(孝)에 근접한다.

류영모는 하늘의 효자가 되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공자의 효(孝)가 늙은 부모를 부양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공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이상의 동양적 '영생관(永生觀)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주목했다. 인간 부자관계 또한 그 '영생'을 추구하는 일부로 본 것이다. 인간관계도 이러할진대 신과 인간의 부자관계는 당연히 영생으로 이어지는 관계가 아닐 수 없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서 유교가 지나치게 부자관계에 얽매인 나머지 망천(忘天, 하늘을 잊음)을 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조상을 받들고 아래 권속들을 하솔하는 것이 인간의 본연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태극에서 음양만 말하듯 그 윗자리인 무극(無極)을 잊은 까닭이다. 유교가 활발히 발전하지 못한 것은 그 근원을 잊었기 때문이다. 부모보다는 하느님 아버지가 먼저라야 한다." 천도(天道, 하늘의 가르침)인 유교가 마땅히 서야할 자리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 그 본연의 위치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효(孝)사상은 전근대적 봉건도덕이라고 낙인 찍혀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자주성을 상실한 노예의 덕목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류영모 또한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에서 궤도를 이탈한 것이라고 일갈한 것이다. 그런데 동양사상으로 정립되었을 당시의 진짜 '효'는, 놀라운 진실을 감추고 있다. 효 윤리를 정리해놓은 '효경(孝經)'의 간쟁(諫爭, 윗사람을 비판하여 논리를 다툼)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옛날 황제가 쟁신(爭臣) 일곱 명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다 할지라도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아비에게 쟁자(爭子)가 있으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해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고,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불의를 당해서 다툴 때, 아비의 명령을 좇는다면 어찌 효라 하겠는가."

효는 충과 더불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不義)가 어디에 있는가를 치열하게 따져서 상하(上下)에 구애받지 않고 옳음을 추구하는 민주적 윤리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충신이란 말이, 군주의 말에 잘 복종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군주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대의를 추구했던 신하를 가리키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효자 또한, 어버이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집안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직언하는 자식을 가리켰다. 단순히 효도하고 공경함은 소효(小孝)이고, 의(義)를 좇고 아비를 좇지 않는 것을 대효(大孝)라고도 말하고 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도 그런 정신을 담고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효(孝)'가 철저히 옳음을 확인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런 효의 근본정신은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치 권력의 폭압에 굴복하면서 타협적인 굴절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류영모는 오로지 위계질서로 여겨져온 신인(神人)관계를, '예수모델(人子)'을 근거로 명실상부한 부자 관계로 정립하고자 했다. 동양에서 부자관계가 군신관계로 확장되는 관계론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부자관계와 신인(神人)관계를 상징으로 연결지었다. 류영모는 오히려 생물학적인 부자관계보다, 신인(神人)의 부자관계가 훨씬 더 참된 관계로 이해했다. 천부(天父)와 인자(人子)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 감정의 핵심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사람 아들의 '효도'다. 사람 아들의 효도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천하효자(天下孝子)' 예수처럼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에 동양의 쟁자(爭子, 옳은 것을 따지는 아들) 사상이 개입된다. 류영모는 신에 대한 반론없는 복종이 참된 효가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에 걸맞은 치열한 참의 추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류영모에게 그 치열한 참은, 인간 육신(몸나)에 대한 미신(迷信)을 극복하고 인격화한 서구 신(神)을 그 본연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에 있었다. 인간의 효도는, '참'의 회복에 있었고 끝없이 그것을 따지고 캐묻는 쟁자(爭子) 노릇에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 아들 노릇은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같아지고 하나 되자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얼나는 '몸나의 극복'이며, 아버지와 같아지는 것은 얼나로서의 본질 회귀를 의미한다. 서구 신앙이 오직 '신을 믿느냐'는 심문으로만 이뤄진 것은, 참된 효(孝)의 면모를 잃은 것이다. 류영모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의(大義)를 바로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가 꿈꾼 귀일(歸一)은 완전한 부자(父子) 상봉이었다. 류영모가 운명하면서 했던 말은 "아바디"였다. 이 말은 평생 그가 믿고 실천해온 신인부자(神人父子) 사상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아바디'는,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 밝음을 디딘다(아, 신의 뚜렷함을 실천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부자유친'에 관한 한시를 썼다.

自信固執充忠臣 (자신고집충충신)
唯信瞻仰永學士 (유신첨앙영학사)
主心同意聖旨精 (주심동의성지정)
父子有親靈人子 (부자유친영인자)

제 믿음을 굳게 지킴은 충실한 하늘나라 충신이요
오직 믿음으로 쳐다보고 우러르니 영생을 배우는 학생이요
주의 마음과 오롯이 함께 하는 것이 성령의 참뜻이요
하느님과 인간이 얼마나 가까운지 말해주는 게 얼나 예수다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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