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95)] 신의 존재 논쟁을 일거에 타파한, 무유(無有)신학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1-02-08 10:00
다석의 재발견 - 신학사상(上) 절대와 상대세계를 보는 직관, '없이 계시는 하느님'

[마더 테레사(1910~1997).]



신의 존재를 내내 의심했다 고백한 테레사

테레사 수녀(1910~1997)가 돌아간 지 10년 뒤에 그의 편지들이 책으로 출간됐다.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와 주고받은 글들 속에서, 테레사 수녀는, 고비마다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극심한 회의에 시달렸다는 고백을 했다.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1948년부터 눈을 감은 1997년까지 가장 열정적으로 희생적 삶을 살던 시절에 내내 '신의 부재'를 느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평생을 오롯하게 신의 사랑을 실천했다고 믿었던 '마더(Mother)'의 배교(背敎)라니, 도무지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1979.9. 피트 신부에게 쓴 편지) 노벨평화상을 받던 해에 쓴 편지에 적힌 이 말은, 수상소감에서 밝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사람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웃음 안에도 있다"고 한 그 말을 공허하게 했다.

이해인 수녀는 마더 테레사의 편지와 관련해 "나 또한 40여년 수도생활을 하고 있지만 정말 그분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테레사의 편지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백을 한 것이 아닐까 한다"고 피력했다.

기독교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이뤄진 종교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물음에 시시각각으로 '믿습니다'라고 답하는, 신앙문답이 교리의 핵심이며 종교 자체의 생명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존재를 인간이 구체적 혹은 실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을 '질문과 응답'으로 극복하여 믿음의 확고한 고리를 만드는 방식이다.

인간의 절대선이 있다는 건, 신이 존재한다는 뜻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논증이 있어왔다. 11세기 철학자인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는 1077년에 낸 <독백>에서 신 존재의 증거를 이렇게 제시했다. "우리에게 선함을 분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그 표준이 되는 절대선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절대선이다. 절대선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느님을 알 수 있으며 믿지 않는다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렇게 논증했다. 신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개념이 있을 수 있다면 그 개념에 상응하는 실제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개념이 실제로 이어지지 못하는 불완전한 성찰에서 기인한 모순이다. 그 성찰이 완전해지면 신의 존재에 닿는다.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고 그는 말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이 신의 개념을 안다는 것과 그것이 현존과 동일해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라면서, 안셀무스의 증명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안셀무스의 논증을 지지하면서 나름의 증명으로 신의 존재를 밝혔다. 데카르트는 도형이나 숫자의 관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같다고 했다. 삼각형 내각 3개의 합이 두 직각의 합과 같다는 관념은 삼각형의 존재 없이는 성립할 수 없듯이, 신은 현존한다. 이를 선험(先驗)적 증명이라고 했다. 또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이 인간에게 있기에 자신의 불완전성과 결함을 인식할 수 있다. 불완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라고 봤다. 뒤집어서 신의 존재를 밝힌 이 증명을 후험(後驗)적 증명이라고 불렀다.

서구에서 신의 존재 논증은 여전히 반박과 주장이 쏟아지면서,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이런 논증을 존재론적인(Ontologisch) 증명이라고 표현했다. 즉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문제삼는 것으로, 근본적인 존재방식을 명확히 하는 증명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이게 하는 특유한 본성과 가능성을 말한다. 존재자의 특유한 존재가 망각되고 은폐되는 까닭은, 존재자의 주변에 마음을 빼앗겨 존재자의 의미이자 근거인 존재 자체에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은폐와 차폐(遮蔽)를 걷어내고 풀어서 존재의 특유한 본성과 가능성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어려운 것은, 존재 자체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은폐와 차폐 때문이라고 보는 셈이다.

그래서 신은 대체 어디 있다는 건가

논란이 계속되는 까닭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일이 공허한 결론에서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알겠어. 그래서 신은 어디 있다는 건가? 이런 반문을 재우기 어렵다.  류영모 또한, 서구의 신앙을 접하면서 이 질문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2천년간 서구인들이 왈가왈부한 문제들의 전제(前提)가 잘못 되었음을 통찰했다. 아마도 그가 동양의 지혜를 섭렵하고 예수의 '얼나'를 뚜렷이 이해한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류영모는, 서구적 사유가 '동일한 세계'의 틀 안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이성주의에 몰두해왔다고 봤다. 고대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logos)가 인격신을 번성하게 했고, 문화적 연속선상의 상상력과 사유체계가 기독교적인 신관(神觀)을 형성했다. 신과 인간이 보편적인 법칙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 로고스의 '틀'이, 진짜 신의 양상을 포착할 수 없게 한 셈이다. 류영모는 로고스의 천장을 뚫고 신의 주소를 정위치로 옮겨놓는다.

"하느님이 없으면 어떤가?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언제나 시원하다. 하느님은 몸이 아니고 얼이다. 얼이란 '없이 계시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큰 것을 우리가 볼 수는 없다. 더할 수 없이 온전하고 끝없이 큰 것을 부를 말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인생의 구경(究竟, 궁극적인 것)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다. "[다석어록]

우리가 신앙의 문제나 철학의 문제에서 막다른 골목같이 탁 막혔던 것은, 상대적인 세계의 기틀 속에서 상대적인 문법으로 비유하고 해명하고 풀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괜히 있지도 않은 하느님을 만들어 사람을 죽음 이후까지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당연한 의문 앞에서, '먼저 믿으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의 입막음 같은 제안 이외에 시원한 말을 내놓기 어려웠다. 다석은 그 말을 오히려 흔쾌하게 받아들이며 저렇게 말했다. 
 

[다석 류영모]



상대세계에서 절대세계를 담는 말, '없이 계심'

있다는 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있다는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며 움직이는 것이며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던 게 있던가. 그 소멸의 물상들을 붙들고 맹세한다고 그것이 영원을 말하는 보증수표가 되겠는가. 우리가 '없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그것은, 상대적인 세계에서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석이 말하는 '없이 계신다'는 말은, 절대적인 세계의 불변을 이루는 영원하고 무한한 거취를 담을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존재로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세계에서는 절대적인 무가 있을 수도 상정될 수도 없다. 모두가 잠정적인 '없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없음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신은 우리가 감지하고 있는 세계 속의 잠정적인 '없음'에 기거하며 숨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 시간대와 공간대를 주재하는 불변의 '무(無)'에 있다. 그게 없이 계신다는 말이다.

'없이 계시는'이란 표현은 일견 모순어법(Oximoron)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모순이 아니다. 앞에 표현된 '없이'는 바로 상대세계적 '실체'를 말한다. 신은 상대세계의 실체를 지니는 순간, 절대자의 절대세계를 상실한다. '계시는'이란 말은, 존대어법이다. 류영모가 이렇게 말한 까닭은, 절대세계에 대한 경배를 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대세계는 존재론적인 세계를 벗어난 세계다. 존재론적인 로고스의 적용범위를 벗어나 있다. 인간 로고스가 벗어난 곳에 있다는 점이, '없이'와 '계신다'를 충족할 수 있게 된다.

'없이 계심'은 신의 존재 논증은 풀어냈지만, 그보다 더 문제적인 신학적 딜레마가 남아 있었다. 절대세계의 신과 상대세계의 인간이 어떻게 만나며 소통을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신을 상대세계로 데려오는 것보다 더 깊은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 결코 넘나들 수 없는 '차원'의 벽을 넘어야 신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류영모가 '얼나'라는 놀라운 개념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얼나는, 인간의 육신 속에 깃든 '절대적인 존재의 향기'다. 좌표로도 찍을 수 없고 실체를 지니고 있을 리 없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는 순간,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얼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믿음의 전부가 된다.

상대와 절대 사이의 긋(點), 얼나가 믿음의 전부다

류영모는 서구의 '신의 존재 입증'을, 인간 속의 '얼나'로 가져와 절대와 상대의 틈으로 연결해낸다. 이 기적의 논증을 뒷받침하는 것은 노자 도덕경 43장이었다.

天下之至柔(천하지지유)
馳騁天下之至堅(치빙천하지지견)
無有入無間(무유입무간)
天下希及之(천하희급지)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가장 굳센 것을 뚫고 들어간다
있음이 없으면 없음 사이로 들어간다
천하에 이것에 닿은 경우는 드물다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노자(老子).]



천하의 가장 부드러운 것은 천하(상대세계)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유(有)를 없앤 것이기 때문이다. '無有入無間(무유입무간)'이 상대세계와 절대세계가 접속하는 방식이다. 신은 상대세계인 유(有)가 없다. 그래서 인간(人間) 시간(時間) 공간(空間) 같은 사이(間)를 뚫지 않고도 그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 저 다섯 자의 표현을 '다석사상'으로 풀이하면, '없이 계신 하느님은 사이가 없는 것에 스며든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뭔가. '얼나'다.

'사이존재'인 인간·시간·공간의 상대세계에도 하느님은 스며든다. 어떻게 스며드는가. 바로 존재 그 자체의 '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얼나'다. 노자가 얼나의 '출입'을 주장한 이 대목은, 류영모 '없이 계심' 사상이 보편의 참을 통찰한 데서 나온 것임을 뚜렷하게 보언(補言)하는 셈이다.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는 벽을 두고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얼나는, 육체의 어느 곳에 깃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다른 차원에 깃들어있다. 육체라는 유(有)가 없기에, 무(無)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이에도 들어갈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얼나는 무유(無有)다. 그 자체가 어느 장소 어느 시간 어느 존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신의 존재 방식이다. 류영모는 저 무유가 아무런 제한과 한계없이 인간 안에 들어올 수 있음을 직관하고 신앙했다. 무유(無有)는 있음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음에 등장한 무(無)이다.  노자가 '얼나'라는 개념으로 근접하고 있는 대목이다.

"다시 없이 크면 없는데 들어간다. 없는 것은 내가 되는 것이다. 없는데 가면 없는 게 없다. 서양사람은 없(無)을 모른다. 있(有)만 가지고 제법 효과를 보지만 원대한 것을 모른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벽돌담 안에서 한 일이라 갑갑하기만 하다."[다석어록]
노자와 다석이 '얼나'에서 만나는 풍경이다. 

류영모는 '긋'이라는 개념을 썼다. 긋은 하늘(ㄱ)과 땅(ㅡ)과 인간(ㅅ)이 모여있는 글자다. 하늘과 땅과 인간이 아무런 제약도 벽도 거리도 없이 모여들 수 있는 것이 '긋'이다. 류영모는 자리만 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점(點)을 '긋'이라고 말했다. 점은 상대세계에서 찍는 순간 점이 아닌 면이나 입체가 된다. 점은 상대세계에서 드러날 수도 없고 표현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으로 혹은 가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다. 점은 실체가 될 수는 없지만 점을 가상하지 않고는 선(線)도 불가능하며 면(面)도 입체도 불가능하다. 그것을 류영모는 '긋'이라 한 것이다. 긋은 바로 '얼나'다. 얼나가 인간에게 감지되고 존재하는 양상을 '점(點)'이 존재하는 방식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참(하느님)을 찾으려면 내 속에 있는 긋(제긋, 즉 얼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 17:21-개역성경)고 했다. 참(하느님)과 긋(點)은 그 크기가 다르다. 참(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무한대(無限大)이고 긋은 자리만 있고 없는 점과 같다." (1956, 다석어록)

신은 상대세계 어딘가 먼 곳에 혹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방식에도 구속되지 않고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긋'처럼 존재한다. 긋은 점(點)처럼 실체로 드러낼 수 없지만 모든 것에 긴요한 역할로 존재한다. 그보다 더 뚜렷한 하느님이 있겠는가.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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