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사랑한 화가, 그림을 사랑한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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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민 기자
입력 2021-0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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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때’

  • 일제강점기~한국전쟁 시기 작품·자료 640여점 공개 대규모 기획전

  • 이상·김환기 등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 교감… 新장르 ‘화문’ 탄생

  • 백석 ‘사슴’ 김소월 ‘진달래꽃’ 서정주 ‘화사집’ 등 희귀 원본도 전시

정현웅의 그림과 백석의 시가 함께 담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사진=아단문고 제공]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이 시구는 당대 최고의 삽화가인 정현웅의 그림을 만나니 그리움의 정서가 더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미술과 문학이 만났을 때, 과연 우리에게 어떤 감동을 안길까. 지난 4일 개막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가 오는 5월 30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다. 작품 140여점, 서지 자료 200여점, 각종 시각 자료 300여점이 출품된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는 ‘시대의 전위(前衛)’를 함께 꿈꿨던 일제강점기와 해방시기 문예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통상적으로 일제강점기는 ‘암흑’의 시대로 인식되어 왔지만, 놀랍게도 이 시대는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자라난 때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인(정지용·이상·김기림·김광균 등)과 소설가(이태준·박태원 등), 그리고 화가(구본웅·김용준·최재덕·이중섭·김환기 등)들이 모두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활동을 시작하며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다.

전시는 ‘전위와 융합’, ‘지상(紙上)의 미술관’, ‘이인행각(二人行脚)', ‘화가의 글·그림’ 등 4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구성됐다.

제1 전시실 ‘전위와 융합’에서는 1930년대 경성 시인 이상이 운영했던 다방 ‘제비’를 배경으로 그곳을 둘러싼 예술가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장르를 넘나드는 그들의 실험적 시도를 살펴본다.

1930년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현대성’의 징후들을 이미 모두 체험하고 흡수하고, 또한 거기에 반응했던 시기였다. 빠른 속도로 들어오는 서양의 온갖 문화적 충격에 직면하여, 최첨단의 ‘전위’에 자신을 위치시키고자 했던 예술가들이 1부에서 소개된다.

이상·박태원·김기림 등 문인들과 구본웅·황술조·길진섭·김환기·유영국·김병기 등의 화가들이 야수파와 초현실주의, 추상 등 유럽에서도 가장 앞서갔던 전위적 양식을 함께 공유했다. 문학과 미술, 음악과 영화 등 다양한 장르와 이질적인 문화가 혼종된 독특한 자신들의 세계관을 구축해 갔다.

2부에서는 1920~40년대를 중심으로 한 ‘인쇄 미술’의 성과를 보여준다. 3·1운동 이후 설립된 민간신문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과 당대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신문소설의 삽화가들이 만나 이루어낸 특별한 ‘조합’의 결과물이 보여진다. 안석영·노수현·이상범·정현웅·이승만·김규택을 비롯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삽화가들의 흔적을 풍부하게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신문사의 자매지로 발간된 잡지에서는 문인과 화가의 결합을 통해 아름다운 ‘화문(畵文)’이라는 장르가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 잡지를 통해 처음 발표된 시의 원전(原典)과 독창적 감성으로 충만한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도서관처럼 꾸며진 전시관에서는 희귀한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윤동주도 필사해서 봤다는 100부 한정판인 백석의 <사슴>, 김소월의 <진달래꽃>, 서정주의 <화사집>,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당대 수많은 문예인을 감동시켰던 책들의 원본을 감상할 수 있다.

1925년 발간된 김소월의 <진달래꽃> 표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3부에서는 1930~50년대 문인과 화가들의 개별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 종교를 매개로 절대적인 정신성의 세계를 추구했던 시인 정지용과 화가 장발의 만남을 시작으로, 조선일보사 편집실의 옆자리에 앉아 순박하고 아득한 시의 세계를 갈구했던 시인 백석과 당대 최고의 삽화가였던 정현웅의 조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의 사회부장과 신입 기자로 처음 만난 이여성과 김기림의 만남도 흥미롭다. 일본 유학시절에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공유했다가 결국 조선의 ‘옛것’이 주는 아름다움에 심취했던 이태준과 김용준의 교유도 만나볼 수 있다.

4부에서는 일반적으로 화가로 알려졌지만, 문학적 재능 또한 남달랐던 예술가 6인의 글과 그림을 함께 보여준다.

<근원수필>의 저자로 소박하고 진솔한 수필가로 더욱 유명한 근원 김용준, <강가의 아틀리에>라는 수필집의 세계관에서 보이듯 언제나 단순하고 순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화가 장욱진, 따뜻한 시선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일상과 삶을 담아낸 한묵의 글과 그림이 각각 전시됐다.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한 삶을 산 장욱진의 수필은 그의 진솔한 그림과 닮아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많은 문학인의 친구로 평생 자연과 산을 사랑했던 화가 박고석, 자전적이며 인간 내면의 감정에 솔직한 수필로 더욱 대중적 사랑을 누렸던 천경자, 마지막으로 1930년대부터 잡지에 화문(畵文)을 싣기 시작해 그림만큼이나 감동적인 일기와 편지, 수필을 남겼던 화가 김환기의 작업이 소개된다. 

평소의 나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나 캐릭터로 활동할 때를 가리키는 요즘 말인 ‘부캐’가 이들에게도 존재했다. 글과 그림을 모두 사랑했던, ‘두 개의 뮤즈’를 지녔던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면모를 함께 감상함으로써 이들의 내밀한 세계 속으로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환기의 ‘달밤’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환기는 문학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김광균·서정주·김광섭·조병화 등 수많은 시인들과 친교를 맺었고, 또한 이들을 화가들과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김환기의 ‘달밤’은 시인 김광균이 소장했던 작품으로, 1951년 한국전쟁기에 대부분의 문예인들이 총집결해 있던 부산 피란지에서 제작된 것이다. 시인이면서 사업가였기 때문에 여러 문예인들을 후원하기도 했던 김광균이 그의 부산 사무실 뒷벽에 걸어 두었던 작품이다. 큼직하고 둥그런 보름달 아래, 바닷가의 배들 또한 달과 같이 떠 있다. 전쟁기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한 서정성을 담은 작품이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며 도전했던 근대기 미술인과 문학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소중한 자산을 발굴하고 소개하고자 마련됐다”며 “비록 가난하고 모순으로 가득 찼던 시대 한가운데에서도 정신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풍요로웠던 예술가들이 제공하는 신세계를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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