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 아방강역고-8] 고려는 황제국 스모킹건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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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0-12-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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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등 30여 나라와 민족의 수장에게 조공을 받은 고려제국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일본등 30여 나라와 민족의 수장에서 조공을 받은 고려제국
 
‘고려'는 중국역사상 특히 송 나라 시대 우리나라 예성강 하구 벽란도와 이집트 나일강 하구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항으로 손꼽히던 푸젠(福建)성 취안저우(泉州) 일대에서 천년을 전해 내려오는 실제로 존재했던 '동방의 유토피아, 이상향'의 이름이다.
 
알다시피 '코리아'(COREA) 대한민국 영문표기도 국제무역항 벽란도와 취안저우를 오가던 아라비아 상인들에 의하여 인도와 중동, 유럽 등 세계 전역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는 중국의 4대 발명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는 진흙활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세계가 공인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창출해 낸 나라 이름이다. (*필자는 사실 진흙활자는 활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디 이뿐인가. 도자기(china)의 나라 차이나(CHINA)조차도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고려의 상감청자, 송 나라 최고급 종이의 10배 이상으로 거래됐던 고려의 종이(高麗紙) 등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의 극치를 이룬 '실존하였던 지상천국'이다, 고려라는 이름은.
 
자기학대 자기비하, 식민사관의 슬픈 역사의 상처가 너무 깊고 오래가서 그렇지, 실상은 해상세력의 영웅 왕건이 건국한 '고려'(高麗, COREA)는 기존의 후삼국을 재통일한 데다가 고구려의 후예이자 용솟음치는 바다라는 나라 이름을 지닌 '발해'(渤海 Rising Sea)와 신라 말엽 그 일몰의 바다를 찬란히 빛낸 장보고의 해상왕국, 이 둘을 합하여 이어받은, 즉 '3국+2α'의 통일왕국이자 '동방의 무역대국'이었다.
 
『고려사』에는 송·왜·금·요·인도·사우디 등 30여개 나라와 민족에서 '방물(方物)'을 고려에 '바쳤다(獻)'는 기록이 323회나 나온다. 그런데 한국학중앙연구원이라는 국책 기관은 방물을 ‘조선 시대에, 명 나라에 보내던 우리나라의 산물’이라고 해석해 놨다. (1)*

그러면서 고려가 송 나라에 보낸 방물은 '조공(朝貢)'으로, 일본이 고려에 바친 방물은 '토산물(土産物)'로 번역해 놨다. 역사학자들은 일본 식민지 때 해석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일본이 고려에 투항하고 귀순하거나 조공을 바친 『고려사』 기록이 16회나 나온다. 고려 황실이 일본에 뭔가를 주었다는 기록은 없다. 작은 답례물을 하사했을 뿐이다. 고려가 종주국이었고 일본은 종속국이었다.
 
고려는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요즘 말로 하면 가장 글로벌한 다문화 국가였다. 이런 막강한 문화국가였던 고려에 대해 일본은 열등감을 지녔던 것이고, 일본이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기록한 『고려사』 를 애써 외면하고자 했고, 숨겨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식민지 시기가 끝난지 75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의 식민 역사관에 매몰된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고려사』를 부산시유형지방문화재로 처박아 두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은 『고려사』의 일본이 고려에 귀부하거나 ‘조공’을 바친(獻方物) 기록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우리나라 국책연구기관이 고려가 송 나라·금 나라·원 나라에 보낸 방물, 또는 토산물을 조공이라 번역하고 있기에 균형을 중시하는 필자 역시 일본을 비롯 수십개 나라와 민족이 고려에 방물을 바치거나 토산물을 바친 기록을 ‘조공’으로 번역하겠다.
 
999년 10월 (음) 일본인 도요미도 등 20호가 내투(來投귀순 투항)하여 이천군에 편입시키다.
1012년 8월 3일(음) 일본국 번주 35인이 귀순 투항하다.
1056년 10월 1일(음) 일본국 사신이 금주(김해)까지 와서 조공을 바치다.
1073년 7월 5일(음) 일본인이 동궁과 여러 대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요청하자 임금이 제서를 내려 “바닷길을 경유하여 개경에 이르기를 허락하라.”라고 하였다.
1073년 11월 12일(음) 연등대회에서 대송‧흑수‧탐라‧일본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각각 예물과 명마를 바쳤다.
1074년 2월 2일(음) 일본국 선장 39명이 조공을 바치다
1076년 10월 15일(음) 일본국 승려 25인이 영광군에 와서 왕의 장수를 비는 불상을 바치겠다는 것을 윤허하다.
1080년 9월 11일(윤) 일본 살마주에서 조공을 바치다
1082년 11월 9일(음) 대마도에서 조공을 바치다
1084년 6월 20일(음) 일본 상인들이 수은 250여근을 바치다.
1087년 7월 21일(음) 대마도인들이 조공을 바치다
1089년 8월 19일(음) 일본 상인들이 조공을 바치다
1243년 9월 29일(음) 일본국이 조공을 바치면서 우리 표류민을 귀환시키다
1388년 7월 (음) 일본국 국사등이 조공을 바치고 포로25인을 돌려보내주며 대장경을 달라고 청했다.
1391년 11월 6일(음) 일본 큐수 번주, 미나모토 료순(源了浚, 원료준)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왜국 외에도 발해, 송, 요, 금, 원, 동여진. 서여진, 북여진, 거란, 흑수여진, 흑수말갈, 서북여진, 토번, 동번, 서번 흑수말갈, 석국(石國). 해국(奚國), 철리국(鐵利國). 불나국(弗奈國), 흥요국(興遼國), 대식국(大食國)등 50여개 나라와 민족이 추장, 장군, 번주 들이 종족이나 인종, 국가에서는 조공을 바친 (獻方物) 기록이 350여회나 나와있다.
지면관계상 1020년대 『고려사』 10년간의 기록만 들면 다음과 같다.
.
1020년 1월 19일(음) 서여진 추장이 조공을 바치다.
1020년 2월 27일(음) 송나라 천주인(泉州人)이 와서 조공을 바치다.
1020년 5월 25일(음) 흑수말갈의 추장 오두나(烏頭那) 등 70여 인이 조공을 바치다..
1020년 6월 19일(음) 불나국 추장 사가문이 여진의 노울달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1021년 7월 3일(음)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다.
1021년 9월 23일(음) 흑수말갈인이 조공을 바치다
1022년 8월 17일(음) 철리국에서 조공을 바치다
1023년 1월 (음) 흑수말갈인 80명이 조공을 바치다
1024년 9월 (음) 이 달에 대식국(大食國)의 열라자 등 100인이 와서 조공을 바치다.
1025년 9월 2일(음 대식국에서 만하와 선라자등 100인이 와서 조공을 바치다.
1026년 8월 9일(음) 송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치다
1027년 1월 11일(음) 동여진 추장이 조공을 바치다
1027년 6월 15일(음)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다
1028년 7월 (음) 동·서여진의 추장들이 조공을 바치다
1028년 9월 5일(음) 송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치다
1029년 7월 1일(음)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다
1030년 7월 18일(음) 송나라 천주 사람 노준등이 조공을 바치다
1030년 9월 1일(음) 탐라에서 조공을 바치다

◆◇◆◇◆◇◆◇주석

(1)*조선시대 그 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지방에서 조정에 바치거나 조선에서 명·청나라에 바치던 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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