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운전자론, 김정은 청구서만 부른다, 北제재 고삐 조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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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 교수(정치학)
입력 2020-11-1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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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극동대교수 ]

[이재호의 그게 이렇지요] 되풀이 되지만 바이든 당선인의 대북정책에 관한 전문가들의 전망은 짤막하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동맹의 가치에 기초한 다자주의적 입장을 선호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나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정책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며, 트럼프의 톱다운 방식 대신 실무자들이 협의해서 대안을 올리는 방식(보텀업)을 존중할 거라고 한다. 그리고 여건이 되면 김정은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측들이 맞는다면 앞으로 우리는 적어도 트럼프 때보다는 덜 불안한 마음으로 북·미관계와 한·미관계를 지켜볼 수 있을 듯하다. 트럼프 식의 ‘충동구매’가 사라지면서 예측 가능성은 그만큼 커질 테니까. 바이든은 12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도 한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보와 번영의 린치핀(linchpin‧핵심축)”이라면서 “대한(對韓) 방위공약을 확고히 유지하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나가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한·미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당선인의 높은 관심과 의지에 감사한다”고 화답했다.

동맹 상대국의 정권교체는 서로가 특정 정책에 대해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정책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정보는 공유되고 있고, 이행은 되고 있는지를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의 외교‧안보팀이 자리를 잡으려면 6개월은 걸린다. 이 시간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미‧일 지도부 교체 대응 TF팀’(단장 송영길 국회외교통일위원장)을 만들어 15일 미국에 보낸 것은 발 빠른 대응이다.

‘한반도 운전자론’, 바이든의 평가는?

나는 문재인 정권이 성과로 꼽는 ‘한반도 운전자론’, 또는 ‘평화프로세스’에 대해 바이든 측도 같은 생각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우리가 그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는 ‘운전자론’에 따라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한 차례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빅 이벤트들이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구축에 어떤 도움이 됐는지, 솔직히 회의적이다. 행사 전(前)과 후(後)가 달라졌다는 의미 있는 징후를 찾지 못했다. 오히려 북의 ‘청구서 정치’의 진면목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북한은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면 반드시 그 대가(代價)를 요구한다. 적어도 1980년대 이후 남북 교류‧협력사업의 현장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 안다(어떤 사업도 대가, 곧 달러를 주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았다). 김정은으로서는 문 대통령에게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 셈이다. 평창올림픽에 동생 김여정을 보냈고, 문 대통령의 중재에 응해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트럼프를 만났다. 문 대통령을 평양에 초대해 카퍼레이드까지 벌여줬고, 평양시민들 앞에서 연설할 기회도 주었다.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었어야 했다.

대가는 물론 대북제재 해제와 대규모의 대북 지원이었다. 김정은은 ‘청구서’를 보냈으나 문 대통령은 지불할 수가 없었다. 제재의 키를 쥔 미국이 움직이지 않는데 우리가 나서서 제재의 전선을 허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정은의 실망은 컸다. 게다가 하노이 회담에선 트럼프에게 망신까지 당했다. 실망은 분노로 바뀌었다. 김정은에게 문 대통령은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비쳤을 것이다. 이후 북이 문 대통령에게 막말을 퍼붓고,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서해상에서 우리 해수부 공무원을 사살한 것은 이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다. ‘운전자론’이 다시 작동하려면 문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의 신뢰가 회복되어야 한다. 김정은이 내민 청구서에 이제라도 답을 줘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줄 수 있을까. 바이든 당선인이 이를 용인할까. 바이든 시대에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의 성패 여부를 가늠해볼 첫 번째 시험대다.

‘先 비핵화, 後 제재완화’는 폐기되나

북핵문제는 이보다 더 어렵다. 바이든은 지난달 22일 마지막 대선 토론에서 “북이 핵능력을 축소한다는 조건으로만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했다. ‘비핵화’라는 말 대신 ‘핵능력 축소’라고 했다. 북이 부분 비핵화만 해도 김정은과 만나겠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북의 ‘핵 동결과 일부 비핵화’를 ‘대북 제재 완화’와 맞바꾸는 국면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 민주당 안에서 대북 대화‧협상파의 중심인물로 꼽히는 로버트 갈루치(전 미 국무부 북핵특사)도 미국의 소리 방송(VOA)과의 인터뷰에서 “북의 핵 프로그램과 제재 완화를 교환하는 방식을 시도해볼 만하다”고 했다. 그는 이미 사문화 된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킨 주역이다.

비핵화와 제재해제를 단계적으로 조금씩 맞바꾸는 방식은 정세현(평통 수석부의장), 문정인(대통령 특보), 이종석(전 통일부장관) 등 이 정권 인사들과 우리 측 진보진영이 줄곧 주장해온 방안이다. 중국도 선호한다. 중국의 이른바 쌍중단 제안(북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동시 중단)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그 방법밖에 없다”고 하지만, 단계마다 합의가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런데도 그 방안을 고집하면 한·미 양국의 보수진영이 고수해온 ‘선 비핵화, 후 제재완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선 비핵화’가 무너지고 제재가 풀리면 남북관계가 활기를 띠긴 할 것이다. 문 대통령에 대한 김정은의 서운한 감정도 가실 터이고. 이는 북·미관계 개선으로 이어지면서 평화‧경제‧신뢰의 선순환(평화프로세스)을 견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확률보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사이 북이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받게 될 확률이 더 높다. 역대 정권이 이런 ‘단계적 교환’ 방식을 몰라서 안 한 게 아니다. 자칫하면 북핵의 빗장을 풀게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설령 무슨 ‘합의’를 해도 2005년 9‧19 합의 때처럼 북이(일각에선 미국이) 또 약속을 깨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문 대통령도 2018년 4월 여야 대표 오찬 회동에서 “9‧19 합의는 실패한 모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벌써 여권에선 내년 7월 도쿄올림픽에 김정은을 불러서 남·북·미·일 4개국 정상회담을 갖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 반짝했던 ‘평화 잔치판’을 도쿄에서 재현해보자는 것이다. 성사 여부를 떠나 이런 이벤트가 북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구축에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싶다. 일본도 벌써 ‘김정은 방일 초청설’은 자신들의 구상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김정은을 불러내려면 북에 또 어떤 대가를 줘야할까. 아니, 줄 수나 있을까.

한국의 집권세력은 이미 과반이 넘는 의석 확보로 국내에선 어떤 정책이든 밀어붙일 힘을 가졌다. 반면,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할 야당은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다. 이처럼 심각한 여야 불균형 속에서 사활적 외교‧안보 이슈가 논의되고 결정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레짐 체인지’ 까지도 염두에 둬야

바이든 시대, 진단은 이미 차고 넘친다. 필요한 건 처방이다. 위장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맞교환할 게 아니라 일관되게 제재의 고삐를 조이는 게 지금으로선 긴요해 보인다.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고려대 명예교수)은 북의 핵보유가 기정사실화 된다면 1991년 남북비핵화공동선언과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해 틀 지어졌던 ‘1992년 체제’가 해체되는 것으로 보고, 이에 맞게(탈 92년 체제에 맞게), 기존의 ‘남북 공존전략’을 ‘북한 체제변화전략’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북의 핵 개발이 이 정도 진행됐으니 그 정도에서라도 동결시키고 대화로 전환해야 한다”는 현실안주형 비관론자들을 가장 경계한다(<헤게모니의 미래> 현인택 2020년). 이들은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얘기만 나와도 “큰일 날 소리”라며 펄쩍 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각오도 없이, 그 정도의 말도 못하고서야 북핵문제가 과연 풀리겠는가.

북핵문제에 정통한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 부차관보의 말이다. “북한 지도자에게 동기와 유인책을 제공하고, 북한인들을 위한 근본적으로 다른 미래를 약속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접근법은 북이 아직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던 때도 통하지 않았고, 북이 이미 핵보유국이 된 지금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북의 셈법을 바꿀 유일한 상황은 핵무기 보유가 북 정권의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고 북이 확신할 때뿐이다.” (VOA 2020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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