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내가 죽던 날' 김혜수 "괴로움, 흐름 따라 내버려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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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송희 기자
입력 2020-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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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가 죽던 날' 배우 김혜수[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

'운명'이라고 불렀다. 배우 김혜수는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시나리오를 만나던 날, '해야만 할 것 같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시나리오 중에서도 단박에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에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읽어내려가며 김혜수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우 김혜수에게, 인간 김혜수에게도 필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우리가 살다 보면 누구나 원치 않는 힘든 상황을 겪게 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을 따뜻하고 묵직하게 위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받은 그 위로를 관객들에게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노정의 분)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이정은 분)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각자의 선택을 그린 영화다.

극 중 김혜수는 형사 현수 역을 맡았다. 전 남편의 배신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 그는 오랜 공백 이후 복직하려 한다. 한 소녀의 의문의 죽음을 조사하던 그는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 소녀의 흔적을 좇으며 변화를 맞게 된다. 사건 이면에 감춰진 진실에 다가갈수록 현수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주제, 메시지가 제게 위로가 되었어요. 촬영에 임하면서는 배우 간 소통하며 따뜻한 '연대'를 느꼈죠. 그 힘이 매우 컸고 지나고 나서도 제 안에 크게 남아있는 것 같아요."

영화 '내가 죽던 날' 배우 김혜수[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


영화는 아주 느린 호흡과 언어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고통을 관객들이 시나브로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은 영화 전반에 걸쳐 진행된다. 인물들이 직접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거나 플래시백을 통해 고통의 순간들을 그린다면 감독도, 관객도 조금 더 쉬웠겠지만 아마 지금 같은 감동은 덜했을 것이다.

"우리 영화가 친절한 편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어렵게 굴려는 건 아니었어요. 누군가를 이해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느끼려고 하는 거죠. 이 영화를 만나는 관객들도 자기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고 스쳐 가듯 느끼게끔."

극 중 현수는 관객들의 '눈'이다. 그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고, 그를 따라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관객들의 '눈'이 된다는 건 배우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덜거나 보태지 않고 담백하게 인물을 그려나가면서도 작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에는 현수의 감정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어요. 정제되어있고 아주 담담하게 그려졌죠. 하지만 막상 촬영하다 보니 관객들에게도 납득할 만한 감정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영화 오프닝에 등장하는 현수의 얼굴을 추가 촬영했죠. 절망을 마주한 사람이 혼자 있을 때 어떤 감정 상태인지 담았어요. 현수가 왜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지 이야기로 풀다 보면 전형적이고 진부할 것 같았고 짧은 쇼트로 담아내려고 했어요."

영화 '내가 죽던 날'은 박지완 감독을 비롯해 배우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며 '연대'한 작품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시나리오 속 장면들과 실제 촬영한 장면들 사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길 때면 즉각적으로 감독, 상대 배우들과 대화하며 풀어갔다고 고백했다.

"전 그럴 때마다 즉각적으로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또 받아들이죠. 그런 것들이 아이디어로 차용될 때도 있어요."

영화 '내가 죽던 날' 이정은과 김혜수[사진=오스카10스튜디오 제공.]


영화 속에서도 김혜수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장면들이 있었다. 그는 삶이 고통스러워 잠들지 못하는 현수에 관해 "살기 위해 자야 했다"라고 설명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일을 해야 했고, 살기 위해 잠들어야 하는데 그 모습이 현수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이 잠을 자게 되면 어떤 꿈을 꿀까요? 아마 현수의 심리와 맞닿아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첨가되면 현수의 감정적 상태를 이야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봤어요."

극 중 현수는 자신과 똑 닮은 세진을 보며 용기를 얻는다. 영화를 보며 실제 김혜수도 세진 역의 노정의를 보며 같은 마음을 느끼진 않았을까 궁금했다. 노정의 역시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연기를 시작, 이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기 때문. 아역 배우로 시작해 오래 연예계 활동을 한 김혜수와 닮은 데가 있었다.

"사실 촬영 할 땐 현수에 몰두하느라 다른 걸 돌아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기자간담회나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마음이 조금씩 들더라고요. (노)정의 양은 아직 스무 살인데 그동안 많이 외로웠겠다 싶어요. 물론 누구나 외롭죠. 하지만 배우는 그 과정을 누가 대신해 줄 수 없거든요. 세진이 쉬운 역도 아니었는데. 그 시간을 잘 버텨냈구나 싶어서 대견하더라고요."

촬영을 마친 뒤 1년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노정의는 훌쩍 자란 것처럼 보였다고.

"아직 어리고 배우로도 많은 혼란이 있었을 텐데. 좋은 점들을 흡수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고, 힘이 있는 배우 같아서 반갑고 대견했어요. (이)정은 씨랑도 그런 이야길 많이 했어요. '우리 아기가 1년 사이에 많이 성장했다'라고요. 정의 양에게 저를 투영하거나 하는 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다만 그의 마음들이 느껴져서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은 들더라고요."

함께 연기한 순천댁 역의 이정은에 관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제작보고회며 시사회에서도 이정은에 관한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해왔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연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힘을 얻는 듯 보였다.

"인간적으로도, 배우로도 흔치 않은 분이에요. 인간 자체로도 굉장히 소중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가 만나서 작품, 삶에 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정은 씨는 순천댁 그 자체로 존재했어요. 순천댁과 현수가 만났지만, 인간 이정은과 김혜수가 만난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여러 가지가 혼재된 특별하고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영화 '내가 죽던 날' 김혜수[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 제공]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해 어느덧 34년 차가 배우가 됐다. 그는 "어쩌다 보니 일을 오래 하게 됐다"라며 멋쩍은 듯 웃었다.

"배우로서 거대한 꿈 같은 건 없어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의식이나 마음의 준비 없이 계속해서 일해온 것 같아요. 일하는 김혜수와 인간 김혜수를 분리하는 건 아직 부족해요. 매번 주어진 소임을 다하려고 하고 충실히 하려고 해요. 목표는 없고 '있는 걸 잘하자' 다짐은 하죠."

연기 경력 34년 차 배우에게도 좌절감이나 괴로움이 있을까. 그는 "배우로 느끼는 좌절감은 언제나 있다"라며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크고 작은 좌절감, 상처는 모두 있죠. 저도 현수처럼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었어요. 내 인생이 부러졌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힘들었죠. 하지만 저는 어떤 힘든 일이 벌어졌을 때 그냥 내버려 두려고 해요. 그걸 이겨내려고 하지 않아요. 외면도, 무시도 하지 않아요."

담담했지만, 그가 얼마나 지난한 시간을 보냈는지 느껴졌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괴로움을 느낄 때 "흐름에 맞게, 내버려 두라"고 조언했다.

"해결해야 할 건 해결해야 하지만 거기까지가 다예요. 흐름에 맞게 반응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돼요. 마음이 그러는 건 정의하지 않아도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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