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의 원조를 땅끝에서 만나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0-11-10 17:43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열린 서산(西山1520~1604)대사 탄신 오백주년 가을 향례(享禮)에 참석했다. 500이란 숫자 때문인지 만남에 더욱 각별한 의미가 더해진다. 숙소로 돌아와 그날(10월 31일) 오후에 열린 세미나 자료를 찬찬히 살폈다. 당신의 생애는 변화의 계기를 만날 때마다 또다른 전환이 이루어지곤 했다.

12살에 성균관에 입학했고 3년 수학 후 과거낙방이라는 쓴맛의 성적표를 받게 된다.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시험에 떨어진 동료 몇 명과 지리산을 유람했고 거기에서 불교를 만났다. 유가에서 불가로 전향(?)한 셈이다. 약관(20세) 나이에 정식으로 삭발했다. 하지만 30세 되던 해인 1549년에 부활한 승과고시에 합격한 후 승직(僧職)을 받으면서 벼슬살이 아닌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이후 임진란을 만나면서 반승반유(半僧半儒 승려와 유생을 겸함)의 삶을 살아야 했다. 윤두수(尹斗壽1533~1601)는 “온세상이 다 전쟁터가 되었는데(環海自成戎馬窟) 오직 대사만이 아직도 한가한 사람이구려(惟師猶一閑人)”라는 말로 잔소리를 했다. 피난 중이던 선조가 대사를 찾았다. “나라에 큰 난리가 발생했는데 산인(山人)이라고 어찌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도총섭(都摠攝)이란 직책을 받고서 졸지에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7년 전쟁이 끝나자 미련없이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그런 대사에게 어떤 유생은 “처음 벼슬을 맡았을 때는 영화로움이 더할 나위 없었는데 지금 벼슬을 그만두고 나니 빈궁함이 또한 더할 나위가 없게 되었다. 몸이 괴롭고 마음이 울적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벼슬 전에도 벼슬 후에도 일의일발(一衣一鉢 옷 한벌 밥그릇 한 세트)일 뿐이다. 진퇴와 영욕은 몸에 있을 뿐 내 마음은 진퇴에도 영욕이 따르지 않는데 득실(得失)에 무슨 희비(喜悲)가 있겠는가”라는 귀거래변(歸去來辯)을 남겼다. 전쟁공로에 대한 포상(종2품 당상관)도 별로 괘념치 않았다. 200여년이 지난 후 제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쫒아다닌 끝에 1778년 대흥사에 사액(賜額 정조임금이 현판글씨를 내림)과 함께 표충사당이 건립되고 대사의 영정이 봉안되면서 비로소 국가향례가 올려지게 되었다.
 

[원철스님 제공] 



본 행사를 마친 후 인근지역을 답사삼아 둘러보는 일은 오래된 개인적 습관이기도 하다. 어디를 간들 얘깃거리가 없으랴만 이 지역도 수많은 스토리텔링이 함께하는 곳이다. 어릴 때 사찰에서 공부했던 이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1587~1671)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을 찾았다. 대문 앞에는 우람한 모습의 은행나무가 있다. 자손의 과거합격 기념식수라고 전해오는 몇 백년된 은행나무 잎은 녹우(綠雨 봄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금우(金雨 가을비)가 되어 땅 위로 쏟아질 것 같다. 풍경만 생각한다면 차라리 금우당이 더 낭만적이겠지만 가문의 미래까지 염두에 둔다면 녹우당이 더 나으리라. 종가집은 가을비보다는 봄비 이미지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절집이었다면 아마 체로금풍당(體露金風堂 가을바람에 잎을 떨어뜨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다)이란 당호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혼자 상상해 본다.

대문에는 문패가 있어야 하듯 건물에는 현판이 있어야 한다.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 효시라는 옥동 이서(玉洞 李漵1662~1723 실학자 성호 이익의 이복 형)가 쓴 ‘녹우당’ 글씨를 만나면서 더욱 때깔나는 집이 되었다. “사월 좋은 날에 누군가 봄비 속에서 찾아 오리라(四月好天氣 人來綠雨中)”고 했다. 귀한 사람이 오면 비가 함께 따라온다고 했던가. 우(雨 비)는 우(友 벗)였다. 비는 수직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지만 벗은 수평인 동서남북에서 찾아온다. 집 이름과는 달리 벗을 거부한 채 녹우당 대문은 단단히 닫혀있다. 대흥사 입구에 있는 백년 된 한옥인 유선여관도 ‘수리 중’ 메모를 붙인 채 잠겨 있었다. 하긴 관광지가 된 절집도 어지간한 생활공간은 모조리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 놓았으니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만.

녹우당은 본래 경기도 수원에 있었다.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면서 스승이던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집이다. 낙향하면서 뜯어 옮긴 건물이 현재 사랑채인데 배로 싣고 왔다고 한다. 임금을 만난 덕분에 집을 하사 받았고 경기지방의 반가(班家양반집)는 해남 땅을 만난 인연으로 오늘까지 잘 보존되었다. 대흥사와 두륜산 일대에는 삼재(三災 물 불 바람의 피해)가 들어오지 않는 땅이라고 한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만년불훼지지(萬年不毁之地 만년토록 훼손이 없는 땅)인 이 자리에 당신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과 염주 그리고 교지(敎旨 임명장) 등 각종 유품을 보관토록 한 것이다.

양택도 좋아야 하지만 음택도 좋아야 한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까닭이다. 윤선도의 무덤은 고모부 이의신(李懿信)이 자기 묘터(身後之地)로 잡아 둔 곳이지만 고산 선생이 빼앗듯이 양보받은 명당이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풍수가였다. 임진란을 치른 후 민심이 흉흉하였다. 그래서 수도 한양의 정기가 쇠했으므로 도성을 교하(交河)로 옮겨야 한다고 광해군에게 진언한 인물로 유명하다. 물론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김두규 교수(우석대학)는 만약 교하지역으로 천도했다면 병자호란의 ‘삼전도 굴욕’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일대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한국자생풍수 이론가인 최창조 교수(전 서울대)도 통일한국 수도이전의 최적지로 교하지역을 꼽았다. 그러고 보니 ‘교하 천도론’의 원조인물을 해남 땅에서 만났구나.

한반도 땅끝에서 절집과 종가집이 만났고 시대와 사람이 만났고 터와 인간이 만났고 또 인간과 인간들이 만났다. 그리하여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옛이야기는 지금 사람들의 눈과 귀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각색된다. 남도 답사일번지답게 지금도 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또 누군가에 의해 보태지면서 켜켜이 쌓여가고 있을 터이다.
 

[원철스님 제공]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