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과학 모르는 한국 ..너무 먼 '노벨물리학상'

최준석 언론인,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입력 : 2020-10-11 18:53

[최준석 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최준석, 과학의 시선] 2020년 노벨상 시즌이 끝났다.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분야에서 올해도 한국은 패싱~. 일본이 올해는 수상자를 배출하지 않아 한국인의 배가 좀 덜 아팠을까? 중국에서도 나오지 않았고. 하지만 노벨상 패싱의 허전함은 깊다. 언제 한국은 수상자를 배출하나?

알고 보면 이상한 게 있다. 한국은 두레박도 없이 우물물을 길으려는 측면이 있다. 노벨 과학상 3개 분야 중 화학과 생리의학 분야에는 후보로 거론되는 한국인이 있다. 그런데 노벨물리학상에서는 그런 인물이 없다는 점이다. 물리학은 기초학문 중에서도 기초다. 그런 물리학 분야에서는 왜 노벨상 후보자로 거론되는 사람이 한국에 없을까? 한국 물리학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서 절반 이상이 나왔다. 고에너지 물리학은 핵, 입자, 천체물리에 걸쳐 있다. 입자가속기로 만든 입자를 갖고 하는 연구다. 노벨물리학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한국인이 없다는 건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고에너지 분야에서는 왜 명성을 쌓은 한국인 연구자가 없을까? 그 이유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 정부가 투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에너지 물리학, 특히 실험은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는 고에너지 물리 분야의 국립연구소가 없다.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유일하게 국립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가 없다. 고에너지 물리 실험에 투자 않는다는 건,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고에너지 물리분야에서 절반 넘게 노벨물리학상을 가져가기 때문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한국인 학자가 나오길 기다리는 국민의 열망을 생각하면, 이런 한국의 현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고에너지 분야의 학자들을 보자. 최초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다. 그 이후 120년간의 수상자를 모두 확인하기 힘들었다. 해서 지난 10년의 자료만을 찾아보았다. 2011년 이후 올해까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중 고에너지 물리 분야는 여섯번을 차지했다. 2011년(우주의 가속팽창 발견), 2013년(힉스입자 발견), 2015년(중성미자 진동 발견), 2017년(중력파 발견), 2019년(물리적 우주론 구축과 외계행성 발견), 그리고 2020년(블랙홀 이론 연구와 발견)에 상을 받았다. 한국연구재단의 보고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10월 작성된 ‘노벨과학상 종합분석 보고서’는 “1980년 이후로 최근 40여년간 물리학은 입자물리 분야에서 가장 많은 수상자가 배출되었다”고 적고 있다.

선진국은 어떤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갖고 있는가? 미국은, 가속기를 갖고 있고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하는 국립 연구소(National Lab)를 지역마다 두고 있다. 동부의 브룩헤이븐 국립가속기연구소(뉴욕주 롱아일랜드 소재), 중서부의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시카고 외곽), 서부의 SLAC 국립가속기연구소(실리콘밸리의 스탠퍼드대학교)와 로렌스버클리 국립연구소(LBNL, 샌프란시스코 오른쪽 버클리 소재)가 그 일부다.

유럽 국가들은 공동으로 거대한 고에너지물리 연구소(CERN)를 운영하고 있다. CERN은 당대 최고의 입자가속기인 LHC(대형강입자충돌기)를 갖고 있으며, LHC에 투자함으로써 고에너지 물리의 세계 중심으로 우뚝 선 바 있다. 독일은 CERN에 매년 납부금으로 3000억원을 내는 한편, 자국에 고에너지물리 연구소를 두 개나 별도로 갖고 있다. DESY(함부르크 소재)와 GSI헬름홀츠 중이온연구소(다름슈타트 소재)가 기초과학 연구를 하고 있다.

시선을 돌려 한국 주변을 보자. 일본은 KEK(일본 고에너지가속기연구기구, 쓰쿠바 소재), j-PARC(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 도카이 소재)와 같은 고에너지물리 연구소가 유명하다. KEK는 1971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8년 KEK의 고바야시 마코토 교수가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중국 베이징의 한복판에는 중국과학원고등물리연구소(IHEP)가 있다. 천안문 앞 큰길인 장안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면 IHEP 건물이 있다. IHEP는 거대한 지하 고에너지 물리 실험 시설을 추진하고 있다. IHEP는 허베이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 세계 최고의 입자가속기를 건설한다는 야망을 갖고 있다. 입자가속기가 들어갈 공간은 지하터널 100㎞ 길이. 이 입자가속기가 들어선다면, 중국은 유럽과 함께 세계 고에너지 물리의 양대 축으로 순식간에 도약할 전망이다.

한국은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 설립 계획이 없을까? 없다. 그러다 보니, 벌어지는 난감한 일로는 이런 게 있다. 유럽을 대표하는 고에너지 물리연구소 CERN이나 미국 페르미연구소가 국제협력을 위해 자신들의 파트너에 해당하는 한국의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찾을 때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그런 곳이 없는 것이다. 국제적인 민망함을 느끼는 순간이다.

가속기? 한국에도 몇 개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속기가 있는 지역에 살고 있거나, 물리학에 약간이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도 포항공대 안에 두 개의 가속기(전자가속기)가 있고, 경주(양성자가속기)에도 있다. 얼마 전 충북 오송에도 새로운 가속기를 짓기로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가속기는 고에너지 물리 연구를 위한 시설이 아니다. 물질 물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나, 제약 등 응용 분야 연구자가 쓰는 시설이다. 오송에 만들 가속기에 붙어 있는 이름이 그걸 말한다. ‘다목적 차세대 방사광 가속기’. ‘다목적’은 유용한 말로 들리나, 노벨상은 ‘다목적’ 시설을 갖고 얻을 수 있는 금메달이 아니다.

내년 말을 목표로 대전에 짓고 있는 중이온가속기(RAON)가 있다. 중이온가속기는 한국 정부가 순수과학을 위해 수천억원을 투자한 최초의 시설이라고 얘기된다. 하지만, 이 역시 ‘고에너지 물리학’ 시설로 가고 있지 않다. 핵물리학과 ‘응용과학’을 위한 가속기다. 그러다 보니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의 큰 축인 입자물리학자들은 RAON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한국은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를 왜 세우려고 하지 않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은, 한국은 ‘기초과학’에 대한 생각이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초과학은 기초과학(Basic Science)이 아니다. 사실상 응용과학이다. 기초과학에 가까운, 응용과학을 ‘기초과학’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기초과학은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상관없다. 인류의 지식 확대가 목적이다. 그런데 한국의 정책 당국자는 경제발전과 관련이 약한 기초과학에는 투자할 생각이 없다. 국민적 공감대가 없어서 그런가?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노벨물리학상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고에너지 물리학 분야에 투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노벨물리학상을 받길 바랄 수 있을까? 하늘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만들려 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기존의 정부 출연 연구소도 많다는 것이다. 국립연구소를 한번 만들면 없애기 힘든 만큼, 새 국립연구소는 만들지 않겠다는 게 과학기술부의 생각이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부 출연 연구소들은 수십 개에 이르며, 이 중에는 시대적 사명을 다한 곳도 적지 않다. 그런 곳은 문을 닫거나,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는 쪽으로 수술을 해야 한다. 한데, 구성원의 반발이 예상되니,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책 당국자가 할 일은 그런 불필요한 조직을 잘라내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국립연구소를 만들지 못하겠다는 건 딱한 일이다.

국립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를 만드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이온가속기를 운영할 가속기연구소를 고에너지 물리연구소로 만드는 방안이 있다. 현재 중이온가속기 연구단은 시설이 완공되면 조직을 ‘가속기연구소’로 바꾸고, 그곳에는 가속기를 돌리는 인력만을 둔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러지 않고, CERN이나 페르미연구소처럼, 사이언스가 연구소의 중심에 서게 하는 방안이 있다. 과학을 하는 인력이 중심이 되어 중이온가속기를 갖고 연구 하도록 하고, 가속기 과학자와 공학도는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이온가속기 연구소의 넓은 땅에 일단 건물 한 동을 짓는 방안이 있다. 그 건물에는 고에너지 물리연구소 간판을 다는 것이다. 중이온가속기라는 시설에 과학자(실험, 이론 모두)들은 가깝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에너지 물리 연구자들은 각 대학에 흩어져 있다. 이들을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다. 프랑스의 IN2P3(국립핵입자물리연구소), 이탈리아의 INFN(국립 핵물리연구소)가 그런 느슨한 방식의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를 갖고 있다. 한 지역에 사무국을 두고, 각 대학의 연구자들이 그곳을 사무실이나 회의 공간으로 쓰고 있다.

한국이 OECD국가 중 고에너지물리학연구소가 없는 유일한 나라라는 건 불명예다. 하늘에서 감 떨어지기를 마냥 기다릴 일이 아니다. 멋진 고에너지 물리 연구소가 이 땅에 들어서는 걸 보고 싶다.
 
 

최준석 언론인,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iohcs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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