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 어젠다] 한국 진보권력은 '노블레스 마오'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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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 논설고문
입력 2020-08-31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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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 100년 유지 비결 "고생은 남보다 먼저, 누리기는 남보다 뒤에"(吃苦在前,享受在后)”


[박승준고문] 



1997년 2월 21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1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덩샤오핑(鄧小平) 동지의 친속(親屬)들이 장쩌민(江澤民) 당 총서기와 당 중앙에 보내는 편지'
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최근 샤오핑 동지의 병이 깊어져 그의 가족으로서 우리의 심정은 십분 무겁습니다. 우리는 당 중앙의 동지들이 모두 샤오핑 동지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관심은 우리 가족들과 마찬가지이며, 샤오핑 동지가 세상을 떠난 뒤의 후사(後事)에 대한 고려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샤오핑 동지는 철저한 유물(唯物)주의자로, 생사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달관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후사에 대해 여러 차례 우리 가족들에게 말한 바 있습니다. 샤오핑 동지가 일생 동안 추구해온 신념을 체현하고, 그의 인생 최후의 한 편장(篇章)을 완미(完美)한 것으로 완성하기 위해, 샤오핑 동지의 부탁에 따라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덩샤오핑 유족들이 제출한 의견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 유체 고별 의식을 하지 말아주십시오. 샤오핑 동지는 늘 상례(喪禮)를 간단히 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유체고별식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견해에 부합됩니다. 둘째, 추도식은 화장 후에 열어주십시오. 유골함은 중국공산당 당기(黨旗)를 덮고 그 위에 샤오핑 동지의 컬러 사진을 한 장만 올려 엄숙한 분위기를 표현해 주십시오. 셋째, 가정에 빈소는 설치하지 않습니다. 넷째, 각막은 기증하고, 유체는 화장 전에는 의학연구를 위한 해부를 위해 제공합니다. 다섯째, 화장 후 유골은 보관하지 않겠습니다. 샤오핑 동지 본인의 의견에 따라 큰 바다에 가서 뿌리게 해주십시오. 샤오핑 동지는 필생 조국과 인민을 위해 봉헌해 왔으며, 우리의 희망은 샤오핑 동지가 하려 했던 최후의 일을 해줌으로써 샤오핑 동지의 정신의 본질을 체현하는 것입니다. 가장 소박하고 가장 장엄한 방식으로 우리의 슬픔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당부 드리오니 우리의 고려를 들어주십시오.”

덩샤오핑이 파킨슨 병으로 인한 폐렴으로 93세에 사망하기 나흘 전인 1997년 2월 15일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는 부인 줘린(卓琳)과 장녀 린(林), 장남 푸팡(樸方), 둘째딸 난(楠), 셋째딸 룽(榕), 막내아들 즈팡(質方)이 서명했다. 덩샤오핑의 시신은 사망 닷새 만인 2월 24일 베이징(北京)시 서쪽의 공중 화장장 바바오산(八寶山)에서 화장된 뒤 유골은 군용기(그의 일생 대부분은 군인이었다)에 실려 동중국해 상공으로 가서 부인 줘린과 가족들의 손으로 바다 위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이 죽기 전에 “주권이 중국으로 귀속된 홍콩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한 데 따른 것이었다. 덩샤오핑은 만년에 자신의 시신 처리에 대해 여러 차례 “나는 유물주의자”라는 말로 자신의 유체를 보존하지 말라는 의견을 분명히 표시했다. 덩샤오핑보다 한 살 아래의 사회주의 경제 전문가이자 친구였던 천윈(陳云)이 “형이 죽으면 유체를 보존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덩샤오핑은 웃으면서 “나는 유물주의자”라고 답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 사후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덩샤오핑의 유지를 받아들여 추모기념관을 만들지 않았다.
덩샤오핑보다 21년 먼저인 1976년 1월 9일에 사망한 ‘중국 인민들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역시 바바오산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보존하지 않았으며, 어떤 형태의 기념관도 만들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친형처럼 지낸 저우언라이와의 약속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978년 7월 1일 저우언라이의 부인이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지낸 덩잉차오(鄧潁超) 역시 당 중앙에 두 장의 자필 편지를 보내 “화장을 해서 유골을 보관하지 말고, 추도식도 하지 말며, 어떤 형태의 기념관도 만들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덩잉차오가 중국공산당 창당 기념일인 이날 “남편 저우언라이와 자신의 약속”이라며 “당풍(黨風)을 단정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보낸 메모의 내용은 1992년 7월 12일자 인민일보에 공개됐다. 덩잉차오가 사망한 다음 날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귀족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로, 중국어로는 ‘귀족의무(貴族義務)’라고 번역된다. 이 프랑스어는 작가 겸 정치인 레비 피에르 가스통 마르크(Pierre Marc Gaston de Lévis·1764~1830)가 1808년에 쓴 ‘여러 주제에 대한 격언과 반성(Maximes et réflexions sur différents sujets)’에 처음 나타난 용어라는 것이 정설이다. 덩샤오핑은 14세였던 1919년에 근공검학(勤功儉學) 프로그램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 1926년까지 파리에 체류했으며, 덩샤오핑보다 6세 위의 저우언라이 역시 19세 때 난카이(南開)대학을 졸업한 후 일본을 거쳐 22세 때인 1920년 근공검학 프로그램으로 프랑스 유학을 갔다. 덩샤오핑과 저우언라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은 프랑스 유학 시절에 받은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무위키’에 따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좌파들이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 자체가 기득권 계급과 그렇지 않은 계급의 격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기득권층의 의무는 결국 그들이 기득권을 합리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진보 좌파’들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추구하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바꾸어놓은 덩샤오핑을 우파로 간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영희에 의해 우리 사회에서 과도하게 우상화된 마오쩌둥도 중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이었다. 중국공산당 당원규약에 중국 공산당원들이 행해야 할 의무로 “고생은 남보다 먼저, 누리기는 남보다 뒤에(吃苦在前, 享受在后)”라는 구절을 넣은 것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4개월 후인 1950년 10월 압록강을 넘어 이른바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해서 집을 지키고 나라를 보위한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을 구호로 내걸고 ‘조선 인민 지원군’을 파병했다. 이들 ‘중공군’ 병력 속에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28세로 신혼이었던 마오안잉은 파견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영어, 러시아어 통역으로 자원해서 전쟁터로 갔다. 압록강을 건넌 지 40일 만인 11월 25일 마오안잉은 평안북도 대유동에 주둔하고 있던 중공군 사령부가 미군기의 폭격을 받는 바람에 사망했다. 파견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그날로 마오안잉의 사망을 전보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알렸다. 저우언라이는 한 달이 지난 1951년 1월 2일 마오쩌둥에게 장남의 사망을 전했다. 저우언라이는 “소식은 이미 받아놓았지만 주석이 감기를 앓고 있어서 전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마오안잉의 희생은 영광된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은 한참 동안 전보를 들여다보다가 “전쟁 아니냐, 다치고 죽고 하는 거지(戰爭嘛, 總要傷亡)”라고 한마디만 했다는 이야기가 중국사람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마오안잉이 사령관 통역으로 자원해서 전선으로 가겠다고 자원입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나 마오쩌둥의 아들 아니냐, 내 아들이 전쟁터로 안 가면 누가 가겠느냐”고 한 말도 잘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은 그러나 덩샤오핑, 저우언라이와는 달리 1976년 9월 병사한 후 베이징 한복판 천안문광장의 마오쩌둥 기념관에 파라핀 처리가 되어 보존되고 있고, 지금도 하루에 한 번씩 지하 보관 창고에서 인민들 교육을 위해 지상으로 끌어올려져 인민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

마오를 제외한 중국공산당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혁명가로서 땅에 묻혀 당과 인민들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기꺼이 화장을 택해왔다. 또한 시신을 의학 해부용으로 제공하고, 각막을 포함한 장기는 기부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아왔다. 덩샤오핑은 그의 공직 월급의 많은 부분을 동네 공립중학교에 기증해온 것이 사후에 밝혀지기도 했다.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당서기, 감추어둔 돈이 너무 많아 무게로 달아 수사했다는 링지화(令計劃) 전 통전부장 동생의 축재 사건 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원로와 핵심 당원들은 ‘고생은 남보다 먼저, 누리는 것은 나중에’라는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지켜왔다. 우리 사회에서는 현직 법무장관 아들의 군복무 중 군무이탈을 둘러싼 수사를 놓고 여야가 입씨름을 벌이는가 하면, 전 법무장관 딸의 대학 부정입학 문제로 검찰의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 야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어서, 전직 당 대표는 딸을 부정취업시킨 문제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현 야당이 주축이던 전 정권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외면하다가 정권을 내놓았다. 부동산 문제에서는 현 청와대와 국회를 가리지 않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마치 사유재산권과 충돌한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어느새 로마제국이 기원전 765년부터 서기 476년까지 1200년 유지된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점을 비웃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진단한 로마제국의 강점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점에 코웃음을 치는 것은 물론, ‘철 지난 이야기’로 무시하려 하고 있다. 지적으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으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며, 경제력으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한 로마인들이 밀레니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진단을 민중주의, 평등주의를 앞세워 외면하려 하고 있다. 전직 법무장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무시하면서도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에는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내부에서 싸우는 데는 귀신, 미국·중국·북한 등 외부와 싸우는 데는 등신들”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널리 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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