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어젠다] 마음을 열어야 진정한 선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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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객원교수
입력 2020-08-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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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연성(flexibility)과 개방성(openness)’

[최성환 교수]


‘유연성(flexibility)과 개방성(openness)’

2000년 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를 만나 “대한민국 경제가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바로 나온 대답이다. 당시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의 충격으로 1998년 성장률이 -5.1%를 기록하는 등 초유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제가 조금만 주춤거려도 제2의 외환위기가 온다는 등의 경고가 쏟아질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미래학자인 존 나이스비트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대답은 ‘열린 마음(open mind)과 네트워크(network)'였다.

대가(大家)들은 서로 통한다던가. 한국도 선진국이 되려면 그간의 값싸고 좋은 물건을 잘 만들어내는 제조업과 IT와 같은 하드웨어를 뛰어넘어 열린 마음이나 유연성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선 한국의 미래는 열린 마음과 유연성으로 세계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향해 뛰는 기업과 한국인들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토플러 박사는 고인이 되었지만 두 미래학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올 들어 미국의 기업파산보호 신청 건수가 3427곳으로 2013년 이후 7년 만에 상반기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업들이 줄도산하기 직전인 2008년 상반기의 3491개에 근접하는 수치이다. 셰일에너지 혁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체서피크, 자동차 렌털회사 허츠 등이 코로나19에 따른 봉쇄조치와 수요 급감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파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 큰 2차 파산이 있을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고 있다. 반면 코로나19의 충격에 오히려 잘나가는 기업도 수두룩하다. 온라인 또는 언택트(비대면)의 흐름을 잘 활용하고 있는 IT기업과 택배∙운송 기업, 건강 관련 바이오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의 주가는 이미 코로나19 이전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잘나가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로 치닫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잘나가는 기업을 많이 키워낸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나라는 어느 쪽일까. 잘나가는 쪽일까 내리막길일까. 아직까지 이에 대한 평가를 내놓은 국제기구나 연구소는 없다.

이에 우리의 미래를 다음 두 가지 기준으로 짚어보기로 하자. 첫째는 홍콩의 기업 탈출과 관련한 건이다. 홍콩은 보안법 시행과 미국의 특별지위 박탈로 글로벌 기업과 금융자본이 대거 빠져나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과연 홍콩의 글로벌 기업과 금융자본의 대체지로서 우리나라가 거론되고 있을까. 홍콩 소재 대기업 임원들로부터 나온 말은 한마디로 ‘한국(서울)은 아니다’였다. 한국은 규제가 많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규제의 예측가능성이 너무 낮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고 한다. 수시로 새로운 규제를 만들거나 변경∙강화하는 바람에 기업 운영과 활동에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하나만 들라고 하면 불확실성이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홍콩 소재 한국 기업 34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홍콩을 대체할 아시아 금융허브로 싱가포르(88.2%)가 가장 많이 꼽혔다. 안타깝게도 서울과 부산 등 한국을 선택한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둘째는 리쇼어링(reshoring), 즉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건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글로벌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면서 미국과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이 자국기업의 귀환을 위해 다른 어느 때보다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나라 또한 대통령이 나서면서 관련 부처에서 대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정부가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푸념을 하고 있다. ‘임금, 노조, 규제’의 3대 걸림돌이 막고 있어서 말만 무성할 뿐 실제로 돌아올 기업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해답도 나온다. 규제를 글로벌 기준(global standard)에 맞도록 뜯어고치는 동시에 규제의 예측가능성을 높여주는 것이다. 최저임금을 포함한 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무제도와 노조활동 또한 기업의 투자와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적절한 수준에서 합의되고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반(反)기업 또는 반(反)부자 정서를 완화시키기 위한 기업 및 부자 차원에서의 노력도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투자하기 좋은 환경,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요즘 국내 골프장은 평일에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호황이다. 골프장 회원권 가격이 오른 것은 물론 팔려고 내놓았던 골프장 매물이 사라지고 매매가격도 뛰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해외 골프 인구가 죄다 국내 골프장으로 몰리는 바람에 일어난 기현상이다. 전 세계를 누비던 해외 여행객들도 좀이 쑤시면서 제주도와 국내 여행지로 몰리고 있다. 해외로 나가지 못하고 국내에서만 북적인다고 해서 ‘가두리 골프’와 ‘가두리 여행’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간 사람들이 왜 해외로 골프와 여행을 나갔을까. 볼거리·먹을거리·즐길거리는 없으면서 비싸기만 한, 가성비 낮은 곳이 우리나라가 아닐까. 여기다 돈 있는 사람들이 돈을 쓰는 것에 대한 반감(反感) 또한 사람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

돈 없는 사람은 쓸 돈이 없어서 못 쓰고 돈 있는 사람은 남의 눈치보느라 해외로 나간다면, 그 나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돈 있는 사람들이 국내에서 돈을 많이 써야 국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는 법이다. 최근 면세점들의 명품 재고떨이에서 보는 것처럼 돈을 쓸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제대로 세금 내면서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 ‘돈 쓰기 좋은 환경, 소비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러면 코로나19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아도 저절로 국내에서의 소비, 가두리 소비가 늘어나게 될 것이다. 반면 표를 의식한 선심성 돈풀기에 나선 후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부동산세 등 여기저기 세금을 짜내는 것은 말 그대로 거꾸로 가는 정책이다. 돈 쓸 사람의 수를 줄이거나 쓸 돈을 줄이기 때문이다.

투자와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획기적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전문가나 공무원,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마다 가장 앞에 내놓는 정책 중의 하나가 규제완화였다. 하지만 문제는 1~2년 지나면 흐지부지해지다가 여론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 임기 말기로 갈수록 '아니면 말고' 식의 오락가락하는 정책과 규제가 판을 친다. 최근의 부동산 관련 정책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규제완화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공무원과 정치인은 물론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글로벌 수준에 맞추려는 과감하면서도 지속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열린 마음과 유연성이다. 기업과 개인, 정부 등 각 경제주체들의 보다 유연하면서도 열린 마음이 있어야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규제 수준까지 갈 수 있다. 나아가 적폐 및 과거사 청산 등은 물론 일본 등 외국과의 관계도 유연하면서도 열린 마음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투자하고 소비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더해 이제부터는 마중물을 붓는 데도 차별화 전략으로 가야 한다. 펌프(기업)에 물이 빠졌을 때 마중물을 붓기만 한다고 물이 나오는 게 아닐 뿐 아니라 마중물도 무한정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 물이 빠졌는지, 기계에는 고장이 없는지, 수원(水源)이 마르지는 않았는지, 여러 개의 펌프가 있다면 어디에다 마중물을 집중적으로 부어넣어야 하는지 등을 세심하게 살피고 결정해야 한다. 고장난 펌프, 수원이 말라버린 펌프에 마중물을 아무리 부어야 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한민국 경제와 인구를 먹여살릴 성장 동력이 될 펌프를 골라내고 새로 만드는 전략과 비전이 필요한 이유이다. 예를 들어 탈원전이 과연 맞는 방향인가,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과 관련 스타트업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단기에 끝나지 않을 것 같으면 전쟁 중에도 전쟁 후를 생각하는 열린 마음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 최성환 고려대 경제학과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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