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네가시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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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
입력 2020-08-1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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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다네가시마 이야기

일본은 ‘섬나라’이다. 나라 전체가 하나의 섬이 아니라, 수많은 섬으로 구성된 까닭에 그렇게 불린다. 해안선의 총 길이가 100m 이상이 되는 섬이 6852개이다. 한반도에도 섬이 많아 3348개인데, 일본은 그 두배이다. 오늘은 그중에서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면적 440㎢에 인구가 3만명이 안되는 작은 섬이다. 거제도보다 조금 큰 섬이다. 이 섬이 왜 중요한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노다니엘 제공]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지난 7월 20일, 아랍에미리트의 화성탐사선 '아말'(Hope)이 발사된 것은 바로 다네가시마의 우주센터였다. 발사체로는 미쓰비시중공업의 H-IIA로켓이 사용되었다. 요새 한국에서는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는 말이 유행인데, 일본이 왜 여기서 나오는가?

일본은 일찍이 1966년에 우주개발추진본부를 만들고 다네가시마를 로켓발사장으로 결정하였다. 이 섬을 택한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섬이 일본열도의 가장 동남부에 위치하여 동쪽으로 로켓을 발사하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더 남쪽에는 오키나와열도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미국으로부터의 반환이 결정되지 않았고, 미군이 주둔하는 등의 요인으로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일본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정지궤도위성의 발사였는데, 이를 위하여 동쪽으로 아무런 간섭 없이 로켓을 쏘아 올려 지구의 자전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고, 나아가서 가능한 한 극궤도에 위성을 올려놓기 좋은 지점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선택된 것이 다네가시마이다.

한반도와의 끈끈한 역사

여기까지는 다네가시마라는 섬의 드라이한 역사이다. 그러나 이 섬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관계에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이 조선에 대하여 군사적 우위를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철포’ (조선에서는 왜총)였다. 이 철포가 일본에 전래된 곳이 바로 다네가시마이다.

남진의 명곡 ‘가슴아프게’는 두개의 가정(if)으로 구성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과 “연락선이 없었다면”이다. 인간이 합리성과 자유의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것이 숙명을 형성하여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우월적 입장에서의 간섭을 시작한 것이 임진왜란이었고, 그 전란에서 일본이 우위를 점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무기체계 우수성이었다. 선조가 한탄을 했듯이, 왜총이 조선병의 화승총보다 우월했던 것이다.

그러면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철포개발5개년계획’ 비슷한 것을 만들어 개발하거나 해외에서 직구라도 하였던가? 아니다. 철포는 우연히 해외에서 ‘전래’하여 다네가시마라는 섬에 들어온 것이다. 규슈의 남쪽에 위치한 다네가시마라는 작은 섬에 외국인들이 총을 팔러 작정하여 온 것도 아니다. 그저 표류한 것이다.

일본에의 철포전래를 다루는 책 <철포기>(鉄炮記)에 의하면 1543년 9월 23일 다네가시마에 한 척의 배가 표류하였다. 배에는 약 100명의 선원이 있었는데, 마을의 관리가 그 배에 있던 오봉(五峯)이라는 사람과 한자로 의사교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상선의 선원인지 해적인지는 가릴 수는 없다. 사실 당시 존재하던 왜구라는 무리는 원시적인 형태로 바다에 떠 있는 다국적 종합상사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아무튼, 이 배에는 두 명의 서양인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프란치스코, 또 다른 이는 다못다라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모두 대항해시대를 주도하던 포르투갈인이었다. 이들은 아마 마젤란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중국으로 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상에 관한 지식이 아직 일천하고 기상위성도 없던 상황에서 일본 남부에 구로시오(黑潮)라는 해류가 흐르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구로시오는 태평양 남부에서 발생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필리핀 동부에서 동으로 휘어올라가는 강력한 해류이다. 이 배도 필리핀 부근에서 동쪽으로 선회하여 일본남부에 표류한 서양 선박의 하나였음에 분명하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일본관리들의 눈을 끈 것이 총과 빵이었다. 포르투갈인을 통하여 두 종류의 서양문물이 일본에 전래하는 순간이었다. 오늘날에도 일본인이 아침에 먹는 구운 밀가루덩어리를 영어 브레드(bread)나 불어 뺑(pain)이라 하지 않고 “팡”(páo)이라고 포르투갈식 발음을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이것이 조선에 전래되어 빵이 되지만).

당시 이 섬을 지배하던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라는 영주는 영리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당시 불과 16세이던 그는 철포를 시범사격시킨 후, 두 자루를 사서 한 자루는 자신의 부하에게 지시하여 분해조립과 화약의 개발을 명하였다. 또 한 자루는 당시 일본 전체를 지배하던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에게 증정한다.

군수산업의 시작

이로써 초보적이지만 일본 군수산업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다. 전래된 철포를 개발하도록 도키타카가 부른 사람은 야이타긴베(八板金兵衛)라는 대장장이였다. 그는 분해된 철포를 보고 같은 금속재료의 개발에 몰입하여 2년 후인 1545년에 일본에서 최초로 철포 제작에 성공하였다.

그런데 이때 야이타보다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의 딸 와카사(若狭)였다. 야이타는 우수한 대장장이로서 서양인이 만든 철포와 같은 정도의 금속을 두들겨 만들어 내었는데, 문제는 조립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암나사, 숫나사로 구성되는 네지 기술이 없었던 것이다. 이때 야이타가 생각해낸 것이 딸을 포르투갈인과 결혼시키는 것이다. 지금의 말로 한다면 결혼을 위장한 산업스파이였다. 와카사는 포르투갈인과 1년을 같이 살면서 네지 기술을 파악하여 아버지에게 전하고 죽고 만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의 와카사의 결혼은 일본 최초의 국제결혼이라고 전해진다.

총이 만들어졌다면 화약이 폭발하여 탄알이 나가야 구실을 하게 된다. 이 화약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사사카와 고시로라는 사나이였다. 그는 와카사의 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주 도키타카의 명을 받은 사사키는 연인을 잃는 희생을 겪으며 노력한 끝에 초석 75%라는 혼합비율을 발견하고, 이 화약이 일본식 조총의 강점이 된다.

철포가 다네가시마에서 원형이 만들어졌지만, 대량생산이 되어 무기로 사용되는 것은 모두 교토 주변이었다. 당시 천황이 있었던 교토를 중심으로 쇼군이나 다이묘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따라서 지금의 간사이 지역이 군수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 군데가 유명하였는데, 오사카 남쪽에 있는 사카이(堺), 교토 북쪽의 비와(琵琶)호숫가에 있는 구니토모(国友)(현재의 나가하마), 그리고 와가야마현의 네고로(根来)가 3대 철포생산지였다.

이 중에서 철포의 대량생산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곳이 구니토모(国友)였다. 철포생산지로서 구니토모가 발달하게 된 것은 오다 노부나가와 관계가 있다. 노부나가는 일찍부터 총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다네가시마 총 전래에서 불과 6년 후에, 구니토모의 총포업자들에게 500정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주문이 당시로서는 대량생산이었고, 철포의 표준생산에 기여하게 된다. 구니토모는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나가하마성을 받치는 중요한 지역이 된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서 최고로 꼽히던 구니토모 조총을 도요토미가 들고 조선에 침입하게 되는 것이다. 도요토미가 감행한 조선침략에서 일본군의 총포가 보인 위력을 일본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2년 4월 12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력 1만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전국시대에 이미 익숙해진 화승총으로 장비한 일본군은 하루 만에 부산성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였다. 조선은 급히 8000명의 군사를 편성해 충주에서 일본군을 맞았지만 4월 27일 총포대의 일제 사격 앞에 궤멸하고 말았다. 1593년 1월 26일, 한성 공략을 목표로 남하하는 명나라군 2만명을 우키다 히데이에를 지휘관으로 하는 일본군 4만1000여명이 한성성 밖 벽제에서 요격했다. 이 전투에서 기마를 주력으로 하는 명군은 일본군 총포대 앞에서 대패했다.

미쓰비시중공업

전쟁을 치를 수 없는 ‘부전조항’ (不戰條項)이 들은 ‘평화헌법’을 가진 일본이 로켓 상용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 의아하게 들릴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이 우주발사체를 위한 고체연료 사용제한이 해제되었다는 최근의 뉴스와 대조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UAE의 위성을 궤도에 올린 일본의 로켓은 액체와 고체연료를 모두 쓰는 위성이다.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회사가 미쓰비시중공업이라는 미쓰비시그룹에 속하는 일개 주식회사이다.

미쓰비시를 보통의 회사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은 드물 것이다. 태평양전쟁 이전에도 이후에도 미쓰비시는 군수산업을 포함한 국가사업을 하는 중공업회사이다. 1857년에 에도 막부정부가 직영하는 나가사키용철소(長崎鎔鉄所)로 시작한 미쓰비시중공업은 태평양전쟁의 무기생산을 거의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리터리 팬들에게는 잘 알려진 전함(기리시마, 휴가, 토사, 무사시),
항공모함(아마기, 준요), 특설항공모함(카스가마루) 등에 이어, 항공분야에서는 1920년에 10식함상전투기에서 시작하여 1940년에 유명한 제로전투기까지를 책임지는 회사였다.

이러한 전전(戰前)의 기술과 노하우는 군비를 가지지 못하는 전후에 들어서 로켓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재 채용되고 있는 로켓은 H형 로켓으로서 여기서 H는 액체수소연료를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6년부터 1992년까지 H-I 시리즈가 운용되고, H-II가 현재 운용되고 있다. 특히 H-II의 기체구조를 간소화하고, 복합재료와 경량화한 부품을 사용하는 H-IIA형이 현재 사용되고 있다.

항로를 벗어난 해적이 소개한 조총으로 무장한 전국시대의 일본, 명치유신으로 서양의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일본제국의 조선 침탈과 태평양전쟁 등, 조선과 한국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일본의 군국주의가 아무도 계획하지 않은 비바람의 변화와 사고라는 필연이 아닌 우연의 소지가 컸다는 것은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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