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인의 일본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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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
입력 2020-07-26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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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니엘]

[노다니엘의 일본 풍경화] 대만인의 일본사랑


국제정치학에서 국가는 ‘합리적 행동자’로 규정한다. 국가는 국익을 위하여 가용한 모든 지성과 정보를 동원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원론적으로 맞는다. 하지만, 국가의 행동, 특히 국가간의 관계에는 합리성으로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있다. 하나의 좋은 예가 최근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이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현지인과 전투를 벌인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지금 마치 ‘사돈관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좋은 감정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게 그런 나라가 있다면 어디인가? 대만이다. 일본과 대만의 관계에는 한국인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친근감이 있다. 한국의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대만의 TSMC사 공장을 일본에 유치한다는 말이 돈 지는 오래이다. 최근 일본외무성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의 67%, 대만인의 65%가 서로 친근감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대만인의 일본에 대한 친근감이 두드러진다. 2019년의 통계를 보면, 일본을 방문한 대만인이 489만명, 대만을 방문한 일본인이 217만명이였다. 같은 기간에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은 560만명이었다. 인구비례로 본다면 한국인의 11%, 그리고 대만인의 21%가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

역사기록을 보면 일본이 대만과의 관계를 시작한 것은 1593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시 고산국(高山国)으로 불리던 대만에 조공을 요구한 것이다. 이는 성사되지 않았고, 1616년에는 선박 13척을 동원하여 정벌을 노렸으나 실패하였다. 이 시작에서 보듯이 일본과 대만의 관계가 평등하고 호혜적인 것은 아니었다. 명치시대에 접어들어 근대화를 앞당긴 일본은 1874년에 ‘대만출병’이라고 불리는 군사작전을 감행한다. 이 작전에 승리한 일본은 청국정부로부터 50만냥의 배상금을 받고 군대를 철수한다. 그러나 1895년에 들어서는 일본이 대만을 완전히 통치하기 시작하여 1945년까지 식민통치를 하게 된다.

따라서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대만은 조선과 유사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일본식 근대제도가 이식된 것도 거의 같다. 한 예로, 당시 일본에는 9개의 ‘제국대학’이 있었는데, 7개는 “본토”에 있었고 2개는 조선과 대만에 있었다. 그것이 당시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학교)와 대만제국대학 (대만대학교)이다. 창씨개명, 행정제도, 금융제도 등이 공통적으로 실시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같은 식민통치를 받은 한국인과 대만인의 의식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이 글을 위하여 체계적인 조사를 할 수는 없지만,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대만인의 의식을 책으로 정리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2000년에 대만인 채곤찬(蔡焜燦)이라는 사람이 쓴 <대만인과 일본정신>(台湾人と日本精神)이라는 책이 화제를 모았다. 여기서 日本精神은 대만식 한자용어로 발음이 ‘닛뿐쳉신’이다. 대만인이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의 정신을 해설하는 것인데 주목할 만한 주장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일본)의 연장이었다. 식민지라는 말은 전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전쟁 전의 일본의 교육수준은 매우 높고, 교사들은 정열과 애정을 가지고 대만에 교육을 보급시켰다. 대만에서는, 지금도 “일본정신”은 “근면하고 정직하고 약속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대만에서는 창씨개명은 허가제였다. 또 일본이름이 아니어도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중화민국이 정권을 접수한 후 대만사회는 급속히 부패했다.

채곤찬이 그린 대만인의 의식구조는 오늘을 사는 대만인과 일본인의 인식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는다. 일본에 있는 대만대사관에 해당하는 주일경제문화대표처가 2020년 1월에 일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오늘날의 일본과 대만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

일본인이 대만에 대하여 친근감을 느끼는 비율은 2016년의 67%에서 2018년에 74%로 증가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대만인이 친절하고 우호적’(77.6%),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46.0%), 동일본대지진 때 지원(36.2%)이 언급되었다. 한편, 일본인이 다른 아시아 나라와 비교한 친근감으로 물은 항목에 대하여, 대만(55.0%), 태국(15.9%), 한국(14.2%), 중국(4.5%)이라고 답하였다. 대만이 다른 아시아 나라를 압도하는 것이다.

식민통치를 겪었다는 점에서 대동소이한 대만과 한국은 왜 일본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 가장 큰 요인으로는 식민통치 청산과정이 다름을 꼽을 수 있다.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는 과정은 두 나라 모두 1951년에 있었던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규율을 받는 것이었다. 이 정상화 조약에는 한국정부와 대만의 국민당정부 모두가 당사자로 참가하지 못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1951년부터 1965년까지 14년이라는 긴 기간 (그 사이에는 한국전쟁이 있었음)의 협상을 통하여 겨우 국교정상화조약이 맺어졌으나, 이는 화근을 남긴 불완전한 조약이었다. 독도, 종군위안부, 징용공 문제 등 현재 한·일관계의 심각한 현안으로 남은 문제들이 정리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원인의 하나는 일본정권과 한국의 이승만정권의 불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반면에 대만을 지배하게 된 국민당정부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다. 그 요인 중의 하나는 대만의 원주민들이 중국본토에서 온 이들보다 일본을 더 선호한 것이었다. 1952년에 일화평화조약(日華平和条約)이 조인되어 두 나라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당시 조약을 맺으며, 장개석 총통은 “덕으로써 원한을 갚는다”(以徳報怨)는 말과 함께,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이는 현재도 1965년의 조약이 불완전한 것으로 보고, 일본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 행사를 추구하는 한국과 매우 대조되는 풍경이다.

심지어, 중국이 대만의 금문도에 대하여 1958년에 포격을 시작하자 일본은 백단(白団)이라는 군사고문단을 결성하여 대만이 중국에 병합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필자가 홍콩과기대에 재직할 때 친분이 있던 대만인 동료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일본통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대만인들이 동창회에 모이면 중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를 쓴다는 것이었다.


친일과 근대화

위의 채곤찬의 책이 나올 즈음에 대만을 통치한 총통은 이등휘(李登輝)였다. 지금의 일본-대만관계의 바탕을 정립한 것은 이등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친일파 대만인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이베이에서 출생한 그는 타이베이고교에 진학하는데, 고교 1년생 당시에 일본총독의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에 동참하여, 이름을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로 개명하였다. 일본어가 유창한 그는 스스로 “21세까지는 일본인”이었으며, 내용이 어려운 사안은 일본어로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그는 1943년에 고교를 졸업하고 교토제국대학 농경제학과에 입학한다. 이어 1944년에는 태평양전쟁의 학도병으로 출정하여, 나고야의 고사포부대에서 소위로 근무하다가 종전을 맞게 된다

1994년에 이등휘는 일본 문학계의 거물 시바료타로 (司馬遼太郎)와 대담을 나누게 된다. [주간 아사히]에 게재된 이 대담에서, 이등휘는 일본의 통치시대에 관하여 “일본이 남겨준 것이 많다. 비판만하며 과학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한다면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주장을 정리하여 1999년에 그가 일본어로 출간한 책 <대만의 주장>(台湾の主張)은 베스터셀러가 되어 일본의 큰 문학상(山本七平賞)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등휘에 대하여 일본, 특히 정계와 재계의 보수세력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일본의 통치가 끝나고 태평양전쟁이 종결된 이후, 대만과 일본은 한국과는 달리 매우 깊은 상호의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대만은 인구나 면적으로 볼 때 한국보다 작으나, 국제정치의 논리로 1971년까지 국제연합의 상임이사국이었다. 1945년부터 1971년까지의 25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패전국인 일본은 UN의 상임이사국이 아니었으나, 대만은 상임이사국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두라는 국제정치의 큰 물결 앞에서 1972년에 다나카 가쿠에이가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노리며 일본정부는 정식으로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한다. 이는 일본정부로서는 당시 시대상황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것은 1949년에 만들어진 아동친선협회 (亜東親善協会)를 중국과의 국교정상화 전에 확대, 개편하는 작업을 수면하에서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1971년 4월에, 이 협회는 당시 자민당 거물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후쿠다 다케오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이름의 사단법인으로 외무성 인가를 받는다. 아베 신조가 제5대 회장을 맡기도 하였던 이 협회는 2018년에 일본대만친선협회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해 3월에는 일본의 국회의원 150명 이상이 참가하는 일화관계의원간담회가 발족하여 두 나라 사이의 비공식실무교류를 담당하게 된다.

자민당은 파벌에 관계없이 대만을 지지하는 자세를 유지하였다. 1995-6년의 대만해협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중국과 대만의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부상하였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미·일방위협력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이때, 일본정부는 미국과 일본이 관리해야 할 “주변사태”에 중국-대만 분쟁을 넣기를 요구하였다. 이어서 1998년에 강택민(장쩌민) 중국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당시 클린턴 미대통령이 오부치 총리에게 “3개의 No” (대만독립 반대, 두개의 중국 반대, 대만의 UN가맹 반대)를 표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오부치는 거절하였다.

2011년의 동북지역 대지진피해와 관련하여, 아베신조는 “대만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큰 금액인 200억엔이 넘는 의연금을 보내준 일본의 소중한 친구”라고 하였다. 그러한 대만이 고속철도를 놓는다면 당연히 일본의 신칸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등휘가 총통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구상이 시작된 대만고속철도계획에는 2000년에 일본기업연합이 참가하여 신칸센 시스템을 도입시키는 데 성공하여, 2007년에 개통하였던 것이다.

한때 ‘Japan As Number One’이라는 표현을 탄생시키며 일본의 산업, 특히 전자산업이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 영광의 자리를 이제 한국에 내주고 있다. 이는 일본인이 볼 때는 지동설이 천동설로 바뀔 정도의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한 충격 속에서 일본인은 지금 대만의 부상을 눈여겨보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대만은 거의 한 나라로 통할 수 있는 사이’라는 의식이 있음을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신칸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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