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5주년, 역사기획] 윤동주 타계 75년, '생체실험 살해'의혹 시인의 절규

박하늘 인턴입력 : 2020-08-14 18:22
박하늘인턴의 '시간의 숨바꼭질' - 일제 만행 증거 속속 드러나는데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춤을 춘다/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이 노래 끝의 공포를/생각할 사이가 없었다//하늘 복판에 알 새기듯이/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 같이도/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죽고 뼈만 남은/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윤동주의 ‘삶과 죽음’(1934.12)
 
 

[윤동주 시인과 학우들. 뒷 줄 맨 오른쪽이 윤동주. 앞 줄 가운데가 송몽규. 제공=독립기념관]


일본인 고노오 '윤동주 살해설' 제기

올해는 광복 75주년이지만, 윤동주(1917~1945) 타계 75주년이기도 하다. 시인 윤동주가 17세 때 쓴 이 시는, 일제 식민지 시대 청소년이었던 그를 짓눌렀던 ‘삶과 죽음’이 섬뜩하게 드러나 있다.

지금 삶의 노래에 춤추는 이들도 해가 지고 노래가 끝나면 죽음을 맞는다. 삶은 죽음의 서곡일 뿐이다. 이 고통스런 예감은, 11년 뒤인 1945년 그에게 현실로 닥쳤다. 해방을 맞던 그해, 윤동주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가. 그는 왜 돌연 ‘노래’를 그치며 죽음을 맞았던가. 그의 참혹한 죽음의 진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75년을 흘려 보냈다.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 중에, 우리의 보석같은 ‘독립운동가 시인’을 능멸하듯 살육했을 가능성이 높은 이 사건에 대해,  우리는 깊은 침묵에 빠져 있다.

1980년 일본인 한국유학생 고노오 에이치(鴻農映二, 일본중앙대학 출신, 동국대 대학원 한국문학 전공)는 잡지 ‘현대문학(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징발되어 생리식염수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고노오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두 가지 내용을 들었다. 첫째 ‘45년 2월16일 동주 사망’이란 전보가 가족들에게 배달된 뒤 10일 뒤에 ‘시체를 찾아가지 않으면 규슈제대(九州帝大)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또다른 전보가 날아왔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감방에서 함께 지냈던 송몽규(윤동주의 고종사촌, 교토제국대 문학부 재학)가, 윤동주의 시신을 찾으러간 부친에게 “매일처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느라 피골이 상접해 간다”란 말을 했고, 한달도 안된 3월10일에 그 또한 사망했다는 점이다.

고노오의 증언은, 윤동주의 충격적인 최후에 대해 일본인이 내놓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춘 추정’으로 당시 한국 내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1945년 5월과 6월에 규슈제대 의학부에서는 B29 탑승 미군 8명을 생체 해부한 일이 있었다. (규슈제대 생체해부사건). 생체 해부를 한 까닭은 전쟁터에서 혈장 부족을 겪고 있어서 수혈이 필요한 환자에게 식염수로 된 대용(代用)혈장을 주입하는 의료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피를 뽑은 뒤 바닷물을 대신 ‘수혈’하는 실험을 했다는 얘기다. 고노오는 “이름모를 주사라는 말과 구주제대에 해부용으로 제공한다는 전보, 윤시인의 죽음과 구주제대 사건의 시기상의 일치 등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 실험에 의한 희생이라는 추정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고노에의 증언 중에서 미군 생체 해부는 확인된 바 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의 요코하마 전범재판 기록이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재판에는 일본 규슈제대 의학교수 5명이 회부됐다. 1945년 5월 5일 추락한 전투기에서 미군을 포로로 잡아 생체해부를 실험했다는 혐의였다. 수술대에 오른 포로들의 장기는 적출되고 몸에는 ‘바닷물 주사’가 꽂혔다.
 
 

[SBS 주시평 기자가 확인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SBS 뉴스 캡쳐본]

"윤동주 있던 후쿠오카형무소 재소자 실험했다"

2009년 8월15일 SBS(주시평 기자)는 일제 생체실험 희생과 관련한 기밀문서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국립도서관 해제 기밀문서에는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자료가 들어있었는데, 당시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바닷물 수혈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을 기록해 놓았다. 우지고 쓰요시 일본 도시샤대 교수는 “당시 전쟁이 계속되면서 수혈용 혈액이 부족했기에 당시 군대로서는 큰 문제였다”고 밝히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동생인 윤혜원씨(당시 86세)는 “쭉 저기에 죄수들이 서 있더래요. 주사 맞으러 가더래요. 죄수들이”라며 후쿠오카형무소의 ‘재소자 주사 투여’ 현장을 증언했다. 이 방송은, 규슈제대 생체실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까지를 확인한 셈이다. 물론,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고 말한 주사가, ‘생체실험’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확정적인 단서가 나오지는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날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한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후쿠오카 형무소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에는 좀 더 심증을 높이는 내용들이 공개됐다. 윤동주의 사망 전보를 받고 달려간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은 열흘 만에 도착한 형무소에서 일본 간수로부터 알 수 없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전한 말은 이것이었다. “이제 시체 가지러, 화장해서 가지고 오려고 떠났는데 시체를 보관하고 있는데서 하는 얘기가, 당신네 지금 오지 않았다고 그러면 하루만 늦어도 저걸 갖고 실험용으로 가져갈텐데...”

한편 윤동주와 같은 시기에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던 독립유공자 김헌술 씨의 증언도 나왔다. 투옥 중 그도 며칠에 걸쳐 주사를 맞은 적이 있다. 주사를 맞고 나면 간단한 계산 문제가 적힌 용지를 받았다. 문제는 암산으로 풀어내야 했다. 암산은 의학에서 임상실험 부작용을 파악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주사 실험이 반복되는 동안 계산 능력은 차츰 떨어졌다. 문제를 다 풀지 못하거나 틀리는 일이 잦았다. 수감자들에게 문제지는 ‘생체시험’이라 불렸다. 일본 교정협회에 의하면 그 무렵 후쿠오카 형무소의 사망자 수는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매년 두 배 가량 급증했다.(김헌술 ‘내가 마지막 본 윤동주’, 정경문화(재단법인 한국정경연구소 발행 잡지) 1985년 8월호에서 인용.)

미군 생체실험 고백한 일본 규슈의대

2015년 4월6일 조선일보는 <이 끔찍한 짓을 우리가 했습니다, 미군 생체실험 규슈의대의 반성>이란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일본 규슈대 의학부가 1945년 미군 포로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저지른 만행을 인정했다는 내용이다.

태평양전쟁 종전을 석달 앞둔 시점(1945년 5월), 일본군에 격추되었으나 생존한 미군 폭격기 승무원 8명이 포로수용소 대신 규슈대 의대로 보내졌다. 그들은 산채로 수술대에 올라 폐를 적출당했고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으며 결국 모두 숨졌다. 규슈대는 70년만에 이 사실을 고백하고 이 내용을 전하는 역사관을 짓고 생체해부로 죽어간 미군을 추모하는 공간을 만들겠다고 했다. 규슈대 의학부가 이 해에 개관한 의학 역사관에는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는 패널이 전시됐다. 소금물 주사 실험을 일본의 당사자가 직접 언급한 내용으로, 윤동주의 죽음을 밝히는데 한 걸음 진전한 중요한 기사다.

바닷물 주사와 장기 적출 목격한 의사 증언

이와 관련해 2015년 놀라운 기사(동아일보)가 등장했다. 8월 20일자에 실린 '규슈대 생체해부' 목격자 도노 도시오(東野利夫, 당시89세) 인터뷰다. 이 사람은 당시 규슈대에 근무했던 보조 의사였다. 그는 미군 포로들을 수술대에 눕혀 마취한 뒤 주사기로 바닷물을 주입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이들의 장기를 하나씩 적출하고 혈액을 빼내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다. 빼낸 간은 연구용으로 쓴다고 했고, 피는 살충제와 섞어 당시 공포의 대상이던 '난징모기'를 잡는 약을 개발하는데 쓴다고 했다.

도노는 그때의 악몽을 이렇게 덧붙였다. "의사 한 명이 사체에서 안구를 적출해야 한다며 내게 미군 머리를 잡아달라고 했죠.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든 경험이었습니다." 4차례에 걸쳐 8명의 미군포로가 생체해부로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폭격기로 규슈비행장을 폭격하러 출동했다가 일본군 가미카제 공격으로 불시착했다. 미군 11명 중2명은 주민에게 맞아죽고 기장은 도쿄로 보내졌으며 8명은 규슈대로 온 것이다. 

규슈대의 식염수 생체실험은 언제 시작됐을까. 1944년 일본에는 미영 연합군 공습으로 과다 출혈이 발생하는 환자들이 많았다. 수혈이 필요한 이는 많았지만 피가 부족했다, 일본은 혈액 대체재를 찾기 시작했고, 현재 생리식염수와 비슷한 ‘바닷물’을 떠올렸다. 요코하마 전범 재판 피고 중 한 명인 이시야마 교수는 1944년 5월 27일 후쿠오카 외과학회에서 “대체혈액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바닷물을 희석해 멸균하여 만든 용액이 적합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후쿠오카 형무소의 생체실험에는 입을 닫고 있다.

대학생 윤동주는 왜 체포됐나

1940년대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윤동주는, 도쿄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다니다 교토도시샤(同志社)대학(일본 교토에 있는 미션스쿨) 영문과로 편입했다. 1943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고향의 부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귀향 여비를 좀 부쳐 주십시오. 돈이 도착하는 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뒤인 7월14일 윤동주는 일본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 무렵 ‘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 사건’이 발생했고, 그는 ‘조선독립 망상을 품은 죄’라는 죄목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고종사촌인 송몽규(교토제국대 문학부 재학)도 같은 혐의로 함께 수감됐다. 일제 경찰은 1년간의 윤동주와 송몽규의 미행-도청 기록을 보여줬다. 그들에게서 포착한 혐의는 당시 일제가 막 실시하려고 했던 ‘조선인 징병제를 역이용하는 모략활동’이었다. 일본은 이 혐의를 중대 범죄로 보았다. 이들에 대한 조사 기록이 일본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가 작성한 특고월보(特高月報)에 실려 있다.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강제로 주사를···"

미군 생체 해부를 증언한 일본인 의사 도노 도시오는, 당시 끔찍한 장면에 몸이 굳어있는 상황에서 한 일본군인이 이렇게 외쳤다고 말했다.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 일제가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생체 해부'를 감행했을 때의 논리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군대를 약화하기 위해 조선인 징병제를 방해하려는 자들이라고, 범행을 변명했을 것이다. 일제말의 이런 광기에, 시인 윤동주는 희생된 셈이다. 

그가  숨진 뒤 부친 윤영춘은 후쿠오카 형무소를 찾아갔다. 함께 있던 송몽규의 모습 또한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반쯤 깨진 안경을 걸친 그는 피골이 상접해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했던 송몽규의 증언(송우혜의 ‘윤동주 평전’(2014년, 서정시학)은 이것이었다. 

“난 안 맞겠다고 했는데도 맞아야 한다고 하며 강제로 주사를 맞게 합니다.”

윤동주가 사망한 뒤 일본인 간수들은 그의 사인을 ‘뇌일혈(뇌출혈)’이라 말하며 ‘하루만 늦었어도 규슈대학에 해부용으로 시체를 넘기려 했다’고 했다. 이 말은 도노 도시오의 증언과도 맥락을 같이 하는 말이다.

윤동주는 학창시절 농구와 축구를 즐겼으며, 축구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그의 친동생 윤혜원 씨는 윤동주를 ‘건강이 좋아 앓는 법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투옥 10개월 만에 뇌혈관이 터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1945년 2월16일 새벽 3시36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 땅의 28세, 그 순수하고 애국적인 영혼은 그렇게 꺼져갔다. 장례식은 3월6일 용정 집의 앞뜰에서 치러졌다. 용정 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문익환 목사의 부친)가 장례를 주관했다.

이 죽음의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일본 정부는 윤동주의 죽음에 얽힌 ‘후쿠오카 형무소 생체실험’에 침묵을 계속하지만 일본 곳곳에서는 윤동주에 대한 추모가 계속되고 있다. 윤동주 50주기인 1995년, 그가 다녔던 교토 도시샤 대학 교정에는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후쿠오카 형무소 터 바로 옆 ‘모모치 서쪽 공원’에서는 매년 윤동주 추모식이 열린다. 지난 2015년 일본 지식인들로 구성된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서는 ‘후쿠오카에 윤동주의 시비를 세우는 모임’을 만들어 시비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90년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윤동주는 총칼로 싸운 독립군과 달리, 문학과 뜨거운 애국혼으로 독립운동을 한 ‘독립투쟁가’이다. 일제가 말기의 광기로 잔혹하게 앗아간 원통한 목숨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본의 양심을 움직여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의 사실을 바로잡아 그것을 기록하고 적시하는 일이다.

소년 윤동주가 썼던 시처럼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은 승리자가 없지만, 제 역사의 질곡을 바로잡지 못하는 후손의 무위(無爲, 아무 조치도 대책도 없는 진실 방치)는 오래도록 천금같은 영혼의 시인을 천추의 한으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경제 논설실 박하늘 인턴기자 

 
박하늘 인턴  editorial@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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