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론어젠다] 마오를 닮겠다고? 한국, 덩에게 답이있다

박승준 논설고문입력 : 2020-07-30 07:03
중국은 이상을 버리고 현실을 택해 부국강병 이루었다
대한민국 국론 어젠다 – 세계 선도국가로 뛰어오르자

<3> 마오를 닮겠다고? 한국, 덩에게 답이있다
 

[박승준 논설고문]


중국은 42년 전에 판을 갈았다. 2020년 세계은행은 중국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978년 중국은 개혁·개방(open up and reform)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은 연평균 GDP 성장률 10%를 기록해왔고, 8억5000만 인구가 가난에서 벗어났다. 오늘의 중국은 1인 소득 중상위 국가(upper middle income country)이고, 경제규모는 세계 2위다. 아직도 중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소득 국가의 4분의1에 불과하고, 3억7300만 중국인들은 하루 5.5달러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아직도 노동생산성과 인적자원에서 뒤떨어져 있고, 소득 불균형은 지난 10년간 많이 개선됐으나 높은 수준이다.”

중국이 42년 전에 판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좀 냉정한 표현이지만,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최대 공로자로, 이상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이 1976년 9월 9일 83세로 사망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마오가 종합 성인병으로 죽고 권력을 잡은 72세의 덩샤오핑(鄧小平)은 1978년 12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사상해방(思想解放)'을 당의 기본방침으로 채택했다. 중국사람들은 실사구시를 영어로 'seek the truth from facts(현실에서 진리를 찾는다)'라고, 사상해방은 'free oneself from old ideas(낡은 생각을 버리고 열린 사고를 하다)'라고 번역한다. 덩샤오핑은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기 전에 마오쩌둥이 설정해 놓은 프레임에 갇혀 있던 중국공산당원과 인민들의 생각을 바꾸어놓는 작업부터 했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만약 마오가 죽은 다음 중국의 권력이 마오가 설정해 놓은 대로 화궈펑(華國鋒)이라는 볍씨 개량 연구가 출신의 평범한 당 간부에게 넘어가고 말았더라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오늘 미국과 패권을 겨루는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마오가 죽기 8개월 전인 1976년 1월 8일 마오의 곁에서 결점을 보완해주던 '인민들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간암으로 죽자, 마오는 후임 총리로 화궈펑 부총리를 지명한다. “그가 일을 하면 내 마음이 놓인다(他辦事 我放心)”는 것이 마오의 화궈펑에 대한 평가였다. 화궈펑은 마오가 죽자 마오가 차지하고 있던 당 주석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고, 통치 방침으로 '두 개의 범시(兩個凡是, 두 개의 옳은 것)'를 제시했다. 다시 말해 “마오가 생전에 내린 결정과 지시에 따라 당과 국가를 통치하겠다”고 밝혔다. 북한식으로 말하자면, 김일성이 1984년에 죽은 후 김정일이 유훈(遺訓) 통치를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화궈펑의 통치 방침에 덩샤오핑은 1978년 11기 3중전회를 통해 마오의 유훈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문제와 해답을 찾고, 이미 중국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난 마오의 통치방침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는 생각을 당과 군의 지도자들에게 공개편지를 통해 밝혀 지지를 획득한 것이었다. 원래 사람은 좋지만 평범한 인물이었던 화궈펑은 1982년 당 대회에서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덩샤오핑에게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세계은행 통계에 따르면, 마오가 죽기 전 1975년의 중국은 말 그대로 세계 최하위 수준의 경제를 가진 국가였다. 1인당 GDP는 200달러로 세계 138개 국가 가운데 134위였다. 당시 한국은 660달러, 일본은 5150달러였고, 미국은 8510달러였다. 그로부터 44년이 흐른 2019년 중국의 1인당 GDP는 1만410달러로 세계 199개 국가 가운데 71위라는 중상위권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 해 한국의 1인 GDP는 3만3720달러, 일본은 4만1690달러, 미국은 6만5760달러를 기록했다. 중국의 전체 GDP 규모는 1975년 1630억 달러에서 2019년 14조343억 달러로 86배로 팽창했고, 같은 기간에 한국은 210억 달러 규모에서 1조6420억 달러로, 일본은 5210억 달러에서 5조820억 달러로, 미국은 1조6850억 달러에서 21조4280억 달러로 증가했다.

중국사람들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고 부르는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한 후 첫 번째로 수술을 한 것은 마오가 추구하던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바꿔놓는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 11기3중전회 발표문을 통해 '경제체제의 개혁'을 예고한 뒤 1979년 11월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만 시장경제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부정확한 것이다.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시할 수 있다”고 강조해서 자본주의의 최대 강점인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 건설에 나서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마오가 평생 추구하던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완성으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갈등 없이 잘 사는 유교적 의미의 대동(大同)사회의 구현”을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 적당한 갈등도 존재하는 소강(小康) 사회의 구현”이라는 목표로 바꿔놓았다. 1984년 덩샤오핑은 베이징을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일본 총리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중국 1인당 국민소득을 두 배씩 두 번 늘리면 이번 세기 말쯤에 800달러가 될 것이고, 그러면 중국에는 소강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소강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국식 현대화이며, 이것이 우리가 제시하는 새로운 개념입니다.”

마오가 추구하던 대동사회는 청이 1840년 영국과 벌인 아편전쟁에서 패해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반(半) 식민지로 전락하자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중국 지식인들이 중국을 보다 강력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제시한 개념이었다. 2000년 이상 계속된 전제군주들에 의한 봉건사회에서 벗어나 모두가 잘 살고 평등한 사회를 뜻하는 대동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은 이후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계속됐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추구하던 마오는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사회건설 목표와 비슷한 개념의 대동사회 건설을 국가목표로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평생을 중국 안에서만 살았던 마오와는 달리 덩샤오핑은 1919년 15세에 프랑스 근로장학생으로 선발돼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강철공장과 르노 자동차 공장을 다니는 동안 사회주의자가 되어 1926년 모스크바로 옮겨가 사회주의를 학습하고, 1927년 23세에 귀국했다. 유학파 사회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마오가 추구하던 대동사회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달성이 전통적인 농업기반 사회인 중국의 현실에서 달성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1987년 4월 30일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소강사회를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했다. “소강사회로 가는 첫걸음은 1980년 1인당 국민소득 250달러를 우선 2배로 만들어 500달러가 되면, 인민들이 등 따뜻하고 배 부르게 살 수 있는 원바오(溫飽)가 달성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20세기 말까지 다시 1인당 국민소득을 2배로 만들면 1000달러가 되어 소강사회로 진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발걸음으로, 다음 세기에 다시 30년에서 50년 동안 배의 배가 되도록 노력하면 1인당 국민소득 4000달러가 될 것이고 그러면 기본적으로 현대화를 실현해서 중등 정도의 발달한 국가가 될 것입니다.” 수치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세계은행 데이터로 지난해 중국의 1인당 평균 소득이 세계 71위의 중상위 소득수준 국가가 된 것은 덩샤오핑의 소강사회 구상이 정확한 청사진에 의해 추진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현 집권자 시진핑(習近平)도 2012년 당총서기로 선출된 이후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까지 전면적인 소강사회의 건설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덩샤오핑의 구상을 재확인한 바 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지식인들과 마오가 추구하던 대동사회의 건설은 우리 사회에도 전파돼, 1980년대 대학가 축제의 이름은 1970년대의 영어식 ‘페스티벌’에서 ‘대동제(大同祭)’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바뀌었고, 그 영향인지 우리 정치 지도자들도 불쑥불쑥 대동사회의 건설을 제시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 18일 광주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제40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 기념사를 통해 “5·18 항쟁 기간 동안 광장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사랑방이었고 용기를 나누는 항쟁의 지도부였습니다, 우리는 광장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동 세상을 보았습니다”라고 언급했다. 물론 문 대통령의 언급은 극한 상황에서도 서로 돕는 정신을 보여준 광주시민들에 대한 찬사로 '대동'을 인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로 뛰기 시작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7월 27일 경기도 청사에서 '경기도형 뉴딜정책 추진단' 현판식을 가진 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경기도형 뉴딜 정책은 공정한 세상으로의 사회적 전환을 의미한다"며 "이를 통해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고 함께 손잡고 살아가는 공정한 세상, 대동 세상의 꿈을 앞당길 것"이라고 쓴 것은 우리 정치인들이 국가목표로 어렴풋하나마 대동사회, 대동세상을 설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오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설 이후 27년간 추구하던 대동사회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건설 목표를, 덩샤오핑이 1978년부터 1997년 93세로 사망할 때까지 소강사회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설로 현실화한 이후, 중국은 빠른 경제발전의 길로 들어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다. 우리 정치지도자들은 우리 사회가 달려가야 하는 목표를 제시하기 위해 어떤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용어를 보다 심사숙고해서 채택하고, 한 번 채택한 다음에는 적어도 10년 이상은 일관되게 우리 사회가 달려갈 수 있도록 정치력을 모으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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