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54)] 신의 저녁콜이 왔다, 다석(多夕)의 비밀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07-06 10:35
33200번의 저녁을 쉬었다가 마침내 영원한 저녁으로 쉬러간다

[다석 류영모]



저녁(夕)이 세번 들어가는 두 글자

류영모는 '다석(多夕, 많은 저녁)'이란 인상적인 호(號)를 지녔다. 한자가 어렵지도 않고, 어려운 의미의 말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석'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이게 무슨 뜻일까 아리송한 마음이 든다.

새벽도 있고 아침도 있으며 대낮도 있고 한밤도 있는데 왜 하필 저녁인가. 매일의 모든 때는 함께 굴러가는 것이건만 굳이 저녁이 많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가. 류영모는 왜 모든 시간 중에서 저녁을 택했으며, 단 한번의 저녁이 아니라 거듭되는 저녁에 마음을 두었을까.

그가 즉흥적인 생각으로 이런 아호(雅號)를 택한 것은 아닐 듯하다. 골똘한 가운데, 저녁 석(夕)이 세 개가 들어가는 두 글자를 택했을 것이다. 의미로도 많은 저녁이지만, 한자를 뜯어봐도 역시 많은 저녁이 되는 기발한 이름이다.

복음성가 중에 '저녁시간(Supper Time)'이란 노래가 있다. 미국의 아이라 스탠필(Ira Forest Stanphil, 1914~1993)이란 목사가 만든 노래다. 그는 목사의 딸인 피아니스트 젤마 로레인 로손(1923~1951)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둘 낳았다. 그런데 아내 젤마와 이혼을 하게 된다. 가족이 쪼개진 날 스탠필은 뒤뜰로 향한 계단에 앉아 있었다.

신이 인간을 향해 부르는 '저녁콜'

그때 문득 환청이 들렸다. 아내 목소리였다. "얘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그 소리에 그는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그때 펜을 들고 악보와 가사를 써내려 간다. 그것이 '저녁시간'이란 노래가 되었다. 아주 평범했던 한때의 행복이 무슨 의미였는지를 그때 깨달은 것이다. 아내는 이후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이후 그는 글로리아 호이트 할러웨이라는 사람과 재혼을 한다. 어느날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글로리아가 문득 계단으로 나가 아이들을 부르는 게 아닌가. "얘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스탠필은 깜짝 놀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성가의 처음엔 엄마가 아이를 부르는 모습이 등장하지만 뒷부분에 가면 엄마가 하느님이 되어 노을 속에서 부르는 목소리로 바뀐다. 신의 아이들인 인간을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 "얘들아, 집에 오렴, 저녁 먹을 시간이야." 저녁은 마음의 허기를 달래며 고요히 어둠으로 드는 시간이다. 따뜻하고 편안한 신이 호명하는 목소리의 시간. 류영모가 저녁에서 하느님을 느낀 것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류영모는 1940년 8월호 성서조선(제139호)에 실린 글 '저녁찬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밝은 것이 있는 뒤에는 크게 잊어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은연중에 통신으로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창세기에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하였고,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 없다' 하였으니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처음과 나중이 한 가지로 저녁이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이 영원한 저녁이 그립습니다."

1922년 교장에서 물러난 류영모가 고읍(古邑)역으로 떠날 때 애제자였던 함석헌이 따라나와 배웅을 했다. 32세의 교장과 21살의 제자는 비가 내려 젖어있는 저녁 길을 조심스럽게 딛으며 걷고 있었다. 그때 류영모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빛빛 하지만 빛보다 어둠이 더 크다. 깬다깬다 하지만 깸보다는 잠이 먼저다."

 

[다석]



함석헌에게 말해준 '빛보다 어둠'

갑작스런 말에 함석헌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여시생(死餘是生)'이란 사자성어도 들었다. 다른 한문구절도 말했는데 함석헌은 다 기억하지 못했다. 함석헌은 오랜 뒤에야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나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었다"고 언급했다. 류영모는 나중에 제자들에게 그 구절을 알려주었다.(출전(出典)은 정확하지 않다.)

적여시광(寂餘是光)
수여시각(睡餘是覺)
사여시생(死餘是生)
일여시다(一餘是多)

빛보다 어둠이 크고
깸보다 잠이 먼저이며
삶보다 죽음이 먼저이고
많음보다 하나가 먼저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대단하게 여기는 것(빛, 깸, 삶, 많음)보다, 더 본질적이며 더 위대한 것(어둠, 잠, 죽음, 하나)을 밝혀놓은 역설의 시다. 류영모의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피게 하는 힌트이기도 하다. 우리는 빛이 어둠을 이긴다고 생각한다. 도시문명 속에서는 확실히 빛이 강해보인다. 그러나, 칠흑 같은 어둠이 있는 원시림의 밤에는 어둠이 빛보다 더 강력하다. 등불조차도 일렁거리며 어둠에 삼켜질 듯 불안하다. 우주의 어둠 속에선 빛은 미약하며 순간적이다. 밤하늘 별빛들은 어둠 속에서 사라질듯 깜박일 뿐이다.

나는 33200번의 저녁을 쉬었다

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소리가 적막을 이긴다고 생각하지만 적막 밖에 없는 절대공간에서는 소리가 맥을 못 춘다. 조셉 콘래드(1857~1924)가 쓴 단편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에는 적막한 나일강 수면 위를 진격하는 프랑스 함대가 고요함을 견딜 수 없어 공연히 대포를 쏘아올리지만, 마치 적막이 그 포성을 삼켜버리는 듯 다시 더한 고요가 찾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깨어있는 것은, 잠들어있는 것에 비하면 일부분일 뿐이며 잠깐일 뿐이다. 또 살아있는 것 또한 죽음의 상태에서 생겨나 잠깐 뒤엔 다시 죽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세상에 있는 만물들은 번성하여 영원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의 '하나'가 이뤄낸 많은 것일 뿐이며 죽으면 다시 '하나'로 돌아간다. 많음이 하나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다석의 어둠론은, 이 세상 밝음이 본질이 아니라 어둠이야 말로 우주를 아우르는 거대한 품이라는 인식의 산물이다. 저녁은 어둠이 찾아오는 문턱이다. 빛이 걷히고 암흑이 들어앉는 그때, 류영모는 절대와 교신할 기회를 얻는다고 믿었다. 신에 대한 찬송은 저녁의 찬송이었다. 세종석신(世終夕信), 목숨이 끝나면 저녁을 믿는 법, 저녁은 거룩의 냄새를 맡고 거룩과 가까이 하며 거룩을 닮아가는 시간이었다.

저녁찬송의 글 끝에 있는 한시 '식관(息觀, 숨쉼에 관하여)'에는 다석이란 말이 등장한다.

다석요식 영석불식(多夕要息 永夕不息).

생애의 많은 저녁엔 쉼(휴식)이 필요하지만, 영원한 저녁에는 숨(호흡)을 쉬지 않는다. 식(息, 쉬다와 숨쉬다의 뜻이 함께 있다)이란 말을 활용한, 절묘한 표현이다. "살아있을 때의 저녁은 휴식을 주지만, 영원한 저녁은 숨쉬기 자체가 필요없어진다." 이 시에서 보면, 다석(多夕)은 살아서 맞는 저녁이며 영석(永夕)은 죽음으로 맞는 영원의 저녁이다. 류영모는 아호 속에 스스로가 맞을 생애 모든 날의 저녁(3만3200일)을 새겨놓은 것이다.

'저녁찬송'을 쓴 지 1년 뒤 1941년 9월호의 글('기별 낙상(落傷) 유감')을 내고 스스로를 '다석재(多夕齋)'라고 쓰고 있다. 또한 발행인 김교신도 그를 다석재라 부르고 있다. 그 무렵, 일상적으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류영모는 '다석'을 풀어서 '하도지낸저녁'이라고 일컫기도 했다.

류영모의 다른 호(號)들

류영모는 '다석' 이외에도 몇 개의 호(號)를 지니고 있었다. '호'를 붙이는 마음에는 그의 뜻이 숨어있게 마련이다. 20대 때는 당엄(戇广, 어리석은집)이란 호를 썼다. 1914년 최남선의 잡지 '청춘'에 '나의 1234', '활발', '농우(農牛)'라는 글을 실었는데 이때의 필명이 당엄이다. 또 1917년 1월 23일 매일신보에 단편소설 '귀남과 수남'을 발표했는데, 당엄이란 이름을 썼다. 스스로를 낮춘 마음을 필명에 표현했을 것이다.

또 '단단(斷斷)'이란 호도 있었다. 해방 이후 송두용과 그의 제자 이진구가 성서조선의 맥을 이은 잡지를 내고자 했다. 잡지 이름이 '영단(靈斷, 성령이 제나를 끊는다)'이었는데 류영모가 지어준 것이었다. 이 무렵 썼던 호가 '단단'이었다. 필명으로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잡지에 '영단 읽고 단단(斷斷)'이란 축하글을 실었다.

한편 제자 김흥호(1919~2012)는 35세(1954년) 때 시간이 끊어지는 체험을 한 뒤 그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斷斷無爲自然聲 단단무위자연성
卽心如龜兎成佛 즉심여구토성불
三位復活靈一體 삼위부활영일체
天圓地方中庸仁 천원지방중용인

시간제단(時間除斷)

끊고 끊으니 무위자연의 소리다
거북과 토끼와 같은 그 마음이 부처로다
성부성자성신이 부활한 성령으로 하나다
우주와 세계 곳곳이 진리는 어질다

류영모의 '단단(斷斷)'이 제자의 오도송(悟道頌)에 스며든 것일까. 김흥호는 끊고 끊어 하나로 이룬 류영모의 도를 체화(體化)하고 이렇게 요약하기도 했다.

일식주야통(一食晝夜通) 한끼 먹고 낮과 밤을 통하고
일언생사통(一言生死通) 한마디로 생과 사를 통하고
일좌천지통(一坐天地通) 한번 앉음으로 하늘 땅 통하고
일인유무통(一仁有無通) 한번 진리로 유와 무를 통하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낮은 왜 낮고 밤은 왜 높은가

이 시를 읽으면, 류영모와 김흥호가 나아간 길이 보이는 듯하다. 삶은 단단(斷斷)했고 신을 향한 수행은 통통(通通)했다. 육신 안의 짐승을 향해선 '단단'했고, 생각 안의 영성을 향해선 '통통'하며 솟나는 경지로 나아간 자취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했다. "낮은 밝아 세상이 눈에 보여 우리의 생각이 낮아지기 때문에 낮이라고 한다. 밤은 어두워 세상이 물러가고 먼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밤(바람)이라고 한다. 대낮처럼 밝은 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게 된다. 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름이 아니라 얼이신 하느님과의 정신적인 거래를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은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중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라고 하였다.

사실 '밤'과 '낮' 같은 한 글자(음절) 낱말은, 어원을 찾기 어렵다. 원시 인간이 처음에 말을 시작했을 때, 본능적으로 선택한 말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특유의 직관으로, 사물이 보이는 '낮'은 많은 것이 시야에 들어오므로 낮아지는 느낌이 있고, 사물이 보이지 않고 시야에는 오로지 천공의 별만 보이는 '밤'은 높게 느껴지며 우러르게 되는, 태초 인류의 태도를 읽어내고 있다. 낮이 되면 현실적인 태도와 행동을 취하던 이들이, 밤이 되면 본성적으로 두려움을 알게 되며 믿음의 우러름이라는 신앙(信仰)의 본령을 접하게 되는 것을 통찰한 말이다. 오히려 후세에 와서, 저 원초적인 정신적 거래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깨우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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