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습격]신박하다는 말 어원은 '신기한 바퀴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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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6-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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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시 청와대로 돌아온 탁현민이, 2018년 사의를 밝힐 때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으면서 "지난 1년 내내 참 대단하다. 그 신박한 해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됐다. 특히 청와대 인사가 '신박하다'라는 신조어를 쓴 것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신박하다'라는 말은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꾸준히 전파되었고, 홈쇼핑에선 이 말이 단골이다. '신박템'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이젠 국어사전에 오를 정도로 일상화된 말인데, 사실 어원을 따져보면 허무할 정도로 엉뚱하게 채택된 대중 구어이다.

 

[WOW의 성기사]

이 말은 World of Warcraft(줄여서 WOW) 게임에서 나왔다. WOW는 MMORPG(다중사용자 롤플레잉게임) 와 비슷하게 전사, 마법사, 도적 같은 직업구분이 있다. 그 직업군 중에서 '성'스러운 힘으로 동료를 회복시키고 보호해주는 성기사라는 직업이 있다.
이 직업이 등장했을 때 유저들은 이 직업을 아주 싫어했다. 죽이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퀴벌레같이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고 해서 성기사란 직업 대신에 성박휘(바퀴)라고 부르는 유저가 늘어났다. 디시인사이드 와우갤러리에서 박휘는 곧 성기사를 의미하게 된다. 심지어 성기사라고 바른 이름을 부르면 '첩자'라고 배척하기까지 했다.
성기사는 특성에 따라 신성 성기사(신기), 보호 성기사(보기), 징벌 성기사(징기)로 나뉜다. 기가 '박'으로 바뀜에 따라 신박, 보박, 징박이란 말이 등장한다. 이렇게 '기'를 '박'으로 바꿔 쓰는 것이 유행하자, 이걸 바꿔쓰지 않으면 갤러리 내에선 첩자 소리를 듣게 됐다. "보기보다 맛있군." 이러면 첩자가 된다. "보박보다 맛있군." '죽음의 기사'를 '죽기'라고 하는데, 이 말도 '죽박'으로 바뀐다. 이런 방법에 따라, "신기하네"가 "신박하네"로 바뀌는 것이다.

'신박하다'라는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기존의 구어체 표현인 '쌈박하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이입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쌈박하다'는 물건이나 어떤 대상이 시원스럽도록 마음에 들거나 일의 진행이 잘 이뤄진 것을 뜻한다. 원래는 한 칼에 무엇인가를 싹 잘라내는 시원한 기분을 의미하기도 한 말이다. '신박하다'라는 말을 대중이 오분석하면서 쌈박하다는 개념으로 쓰게 되자, 이 말은 오히려 쓰임새가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그 뉘앙스를 정리하면 이렇다.
1. 물건이나 어떤 대상이 신기하고 매력적이어서 시원스럽도록 마음에 들다.
2. 어떤 행동이나 과정이 세련되고 참신하다.
3. 무엇이든 감각이 새롭고 쌈박하여 각광을 받다.

한편 특정 글자를 꺼리는 것을 옛사람들은 휘(諱)한다고 그랬다. 왕의 이름을 신하가 함부로 못 쓰는 것도 있고, 죽은 사람이나 손윗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꺼렸다. 유저들의 '기'피(避) 현상도 일종의 휘(諱)라고 할 수 있다. 신박의 '휘'를 따르면 다음과 같이 '암호' 낱말이 양산된다. 진박명박, 박절초풍, 박기누설,박본소득,박레기, 신문박자,거리두박, 박상청 박후변화 연구소, 박독교, 죽박살박로. 백미는, 한 유저가 남긴 이것이 아닐까. 징박스칸이 죽박 전에 부른 신박한 노래 불러보박.
디갤 어원을 모르는 이들은, 신박이 신기한 박휘벌레에서 왔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신기하다'라는 말보다 훨씬 참신하고 세련되고 훌륭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박휘 어원설을 알았더라면 쇼핑가나 예능프로에서 속옷제품을 신박템이라고 부르는 파격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퀴벌레의 다른 속성이 아니라 '잘 죽지 않는 끈기'를 채택한 것이기에, 신박한 것은 오래 간다는 다른 암시를 담게 된 것이니 새삼 기겁하거나 억울해할 것까진 없을 것 같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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