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주한 美대사관 무지개와 소시오패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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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논설위원
입력 2020-06-0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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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광화문 미 대사관 건물에 인권 평등 상징 무지개 배너

  • 자서전 대필 작가 "트럼프는 소시오패스"

  • 퓰리처 수상자 "트럼프 시대 진실은 죽었다"


요즘 광화문에는 매일 무지개가 뜬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188 주한 미국대사관 건물 외벽에 보인다.

2017년 이래 미 대사관은 '성소수자 인권의 달'인 6월, 성소수자들의 상징인 6색 무지개 배너를 설치해 왔다. 올해도 그랬다. 가로 8m·세로 4m 사이즈로, 지난해부터 그 전에 비해 3배 커진 이 배너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사진=연합뉴스]


성소수자는 LGBTQ라고 줄여 말하는데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퀴어(queer)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1970년부터 무지개는 LGBTQ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사용돼 왔는데,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됐다. 성소수자들뿐 아니라 인종, 젠더, 신분, 빈부, 직업 등에 따른 차별과 혐오로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라는 외침, 다양성과 포용을 뜻한다. 

주한 미 대사관 측은 5월 31일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만인의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을 기념하고자 레인보 배너를 대사관 건물에 걸었다"고 밝혔다. '만인'의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이라고 했지, 성소수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사진=이승재]


지난해엔 해리 해리스 주한 미 대사가 SNS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그는 “서울퀴어문화축제 20주년을 축하합니다. 성소수자의 권리는 곧 인권입니다. 미국은 성소수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적어 눈길을 끌었다.

미국 정치의 심장인 백악관도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는 뜻에서 무지갯빛 조명을 설치해왔다. 그러나 올해는 다른 상황이다. 경찰의 흑인 살해,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백악관을 둘러싸자 조명을 완전히 꺼버렸다. 겁 많은 흑백론자·이분법주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무지개 셧다운’을 지시했을 거다.

광화문 미 대사관 무지개 배너와 백악관의 사라진 무지개, 정반대 광경을 보며 트럼프 관련물을 다시 찾아봤다. 결론은 그에게 개전의 정(改悛의 情·잘못을 뉘우치는 마음가짐)을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것. 사람은 잘 안 바뀐다고 하는데, 트럼프는 ‘절대’ 바뀌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서전 <거래의 기술>은 자주 펴보는 책이다. 그가 뉴욕의 건축업자에서 세계적인 사업가로서 성공한 자화자찬 스토리를 담았다. 트럼프의 성장 배경과 사업가로서의 승부사적 기질, 면모를 알게 된다. 1987년에 나온 책인데,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과거 부동산업자, 카지노업자에서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사진=넷플릭스 캡처]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된 이후 2018년 나온 넷플릭스 4부작 다큐멘터리 <트럼프: 미국인의 꿈>은 좀 더 객관적인 팩트를 보여준다. 트럼프 자신이 방송에 나와 한 발언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아주 근본적인 기준, 원칙이 무엇인지 반복한다. 

트럼프는 세상만사를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이 게임에는 포식자(predator)와 희생자(victim)만 있다. 죽이거나, 죽거나 이분법 세상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는 반드시 죽인다.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에서 비롯된 이 이분법적 관점은, 그가 10대 아들 트럼프를 '집어넣은' 기숙형 군사학교에서 확고해졌다.
 
방송 토크쇼에 출연한 젊은 사업가 트럼프는 “누가 날 엿 먹이면 난 반드시 배로 갚아준다. 내가 이상한가? 그게 당연한 거”라고 득의양양, 미소 짓는다. 

이 다큐 2화에는 <거래의 기술>을 실제로 쓴 작가가 등장한다. 트럼프의 이 책을 대신 써준 일명 유령 작가(고스트 라이터)인 토니 슈워츠는 다큐에서 이렇게 말한다. “트럼프는 포식자가 되지 못하면 희생된다고 봅니다. 그의 세계관은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저는 그를 소시오패스(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라고 생각했어요. 양심도 없고, 옳고 그름의 차이를 알지 못해요.”
 

이 다큐가 만들어진 2018년 트럼프에 관한 책 중 그를 가장 엄중히 비판한 책도 나왔다. <진실의 죽음: 트럼프 시대 거짓말에 대한 노트>(한국판 제목은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다. 저자인 미치코 가쿠타니는 뉴욕타임스에서 40년 가까이 일하며 퓰리처상을 받은, 영어권에서는 가장 유명한 서평가·비평가로 꼽힌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명문 예일대를 나온 그는 정치에 대한 ‘냉소’가 허무주의를 불러왔고, 과잉 정보에서 비롯된 편견과 혐오의 가짜뉴스가 생산-확대재생산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시대, 진실은 죽었다”고 단언한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20년 미국에서는 진실뿐 아니라 미국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184만9560명, 사망자는 무려 10만7093명(6월 4일 기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는 끝까지 'sorry'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미안하다. 유감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망자가 10만명에 이르는 매우 슬픈 이정표에 다다랐다”는 말장난뿐이다. 현직 미국 대통령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한 슈워츠의 2년 전 증언이 과하게 들리지 않는다.

만인의 인권과 평등을 주창하는 미국, 그 미국의 수장인 대통령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소시오패스, 거짓말쟁이라는 비판을 받는 모순의 시대. 오는 11월 3일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될지 결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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