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의 베트남 ZOOM IN] (12) 세기의 인물 호찌민의 리더십

안경환 전) 조선대 교수,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입력 : 2020-05-12 09:51

 



◼금년은 호찌민 주석 탄신 130주년

세계 어느 나라든지 나름대로 후손들이 존경하고 따르는 하늘이 내린 위대한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 한국 역사의 범상한 인물로는 신라시대의 원효(元曉)대사, 고려시대의 신숭겸(申崇謙) 장군, 최영(崔瑩) 장군, 조선시대의 이순신 장군, 다산 정약용(茶山 鄭若鎔), 그리고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한다면, 베트남의 대표적인 인물은 호찌민(1890.5.19 -1969.9.2)이다. 호찌민은 국가주석으로 24년간 재임하는 동안 한 번도 인기영합주의의 포퓰리즘 정책을 표방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였고, 민족의 단결과 근검절약을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표(師標)가 될 위인이 필요하다. 그러한 위인들이 있어야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젊은이들이 그런 위인들을 본보기로 삼아 살아가고, 그런 위인을 중심으로 민족사랑, 나라사랑의 뜻을 모아 외세의 침략에 항거하면서 국가를 보존해가며 민족중흥의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베트남의 역사를 새로 쓴 호찌민 주석은 통치의 개념인 “다스림”이 아니라 국민과 항상 “함께”였다. 그것은 국민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바(3) 꿍(함께) 정신”이다. 1969년 9월 2일 79세의 일기로 서거하였을 때,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즈는 “이 지구상의 어떠한 민족 지도자도 적의 총칼 앞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집요하게 맞선 인물은 없었다.”고 하였다. 호찌민 주석의 일대기는 바로 현대 베트남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이고, 베트남을 움직이는 힘이 바로 호찌민 사상이다. 베트남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인민일보는 호찌민 주석을 <베트남 민족의 표상>이라고 하였다. 1990년 호찌민 주석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UNESCO는 호찌민을 “베트남 민족해방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문화인”으로 공인하였다. 지난 4월 30일은 베트남 통일 45주년 기념일이었고, 5월 19일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의 원동력이 된 호찌민 주석 탄신 130주년 기념일이다. 베트남 민족의 표상인 호찌민 주석을 이해하는 것은 한-베 교류와 협력관계를 진작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바딘광장의 호찌민 영묘]



◼호찌민 주석의 성은 응우옌(阮)씨
◼생전에 무려 174개 이름 사용

호찌민 주석은 애국, 애족, 애민 사상의 화신이다. 호 주석은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과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꿈꾸고, 평생을 조국을 위해 바쳐 독립을 이루고 통일의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어릴 적부터 프랑스 식민시대의 혹독한 압박 속에서 성장한 호찌민 주석은 노예의 처지에 있는 동포들의 참상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온몸을 희생하며 결혼도 마다한 채 조국을 위해 헌신하였다. 호찌민 주석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날로 더해가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호찌민의 성이 <호>씨, 이름은 <찌민>으로 알고 있다. 호찌민이란 이름은 호찌민 주석이 생전에 사용하던 무려 174개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호찌민은 1901년 나이 11살 때 응우옌떳타인(阮必成)이란 이름으로 개명하여 1969년 서거하기까지 174개의 가명과 필명을 사용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프랑스 식민 당국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수시로 이름을 바꿔 사용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주석은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인 1890년 5월 19일 응에안성 남단현 낌리엔리 샌 마을의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3남1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하노이 역을 떠나 남쪽으로 약 7시간가량 달리면 빈(Vinh)역에 이르고, 하차 후 다시 서쪽으로 약 20km를 가면 호찌민 주석의 소박한 고향 연꽃마을이 나타난다. 호찌민 주석이 태어난 집은 조그만 초가집에 대나무 침대와 베틀이 고작이었고, 텃밭에는 고구마가 심겨져 있고, 코코넛 나무 몇 그루 서있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가난하고 초라한 집에서 어떻게 베트남이 낳은 최고의 인물이 탄생하였을까? 궁금증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호찌민이란 이름은 1942년 8월 27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국경을 넘어 갔다가, 광시(廣西)성에서 당시 장제스 장군의 군대에 체포되었을 때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에 기재되었던 이름이다. 이를 계기로 <호찌민>이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이때부터 사망할 때까지 계속 사용한 이름, 평생에 가장 오랜 사용한 마지막 이름이 <호찌민>이란 이름이다.

◼3남1녀의 셋째(동생은 어려서 사망)
◼30년간 해외서 독립운동

호찌민 주석은 3남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넷째는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나이 11살에 어머니(호앙티로안)를 잃었다. 부친(응우옌신삭)은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 식민정청의 고위관리가 되었다. 그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예부(禮部)의 고위 관리가 되었으나, 자신이 프랑스인의 야심을 채워주기 위한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관직생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고위 관리직을 사양하고 시골학교를 자원하여 근무하였다. 나중에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벽지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재임 중 프랑스 법을 어긴 베트남동포를 관대히 처분하였다는 이유로 파면 당하였다. 이로부터 응우옌신삭 공은 가족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맏누이 응우옌티타인은 호찌민 주석 보다 6살이나 위고, 형 응우옌신키엠은 2살 위였다. 누나는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프랑스에 반감을 나타내었다. 프랑스군 부대에 근무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통하여 무기를 빼내어 독립군에게 전달하는 과감한 운동을 벌여 감옥생활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키엠은 누나보다 더욱 과격하게 프랑스 관리를 공격하여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프랑스 식민시대 관료제도에 환멸을 느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학교 정규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호찌민은 후에 소재 국학교(중학교 과정)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대신, 많은 독서량으로 어려서부터 폭넓은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호찌민은 1911년 6월 5일에 21세의 나이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망을 후원해 줄 수 있는 후원자를 찾으러 사이곤 항구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상선 <아미랄 라뚜쉬 뜨레빌>호의 보조 요리사로 승선하여 프랑스로 갔다. 이때부터 30년간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호찌민 주석만큼 많은 직업을 가져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원사, 미화원, 석탄불을 때는 화부, 조리사 보조원, 사진사, 중국 골동품 그림을 그리는 모조사진사 등 생계유지를 위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직업을 가져 보았고, 수많은 고생을 하였다. 화부로 있을 때는 불에 달군 벽돌을 가져다 침대 밑에 깔고 자면서 추위와 싸우기도 하였다.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라고는 다 겪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호찌민 주석이야 말로 눈물의 빵이 아니라 피의 빵을 먹어본 사람이고, 옥중생활로 자유의 소중함을 알고 배고픈 국민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도자였다.

◼ 호찌민은 직업 혁명가
◼ 호찌민 사상의 핵심 : 근면, 검소, 청렴, 정직

그에게 평생을 따라다닌 질문이 있다. 호찌민은 공산주의자인가? 아니면 민족주의자인가? 라는 질문이다. 호찌민은 자신을 <나는 직업 혁명가>라고 말했다. 호찌민은 노예와 같은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 공산주주의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민족주의자이다. 또한, 봉건군주제 타파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이다. 그는 근면, 검소, 청렴, 정직을 신조로 삼았고, 이것이 호찌민 사상의 핵심이다. 호찌민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전통적인 우방국인 프랑스와의 입장을 고려하여 약소국인 베트남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독립을 위해 호찌민은 하는 수없이 (구)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 후 1954년에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시키기 위해,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남부 베트남을 무력으로 통일하였다. 남부 베트남을 지원한 미국은, 연인원 314만 명의 미군이 참전하였고 58,183명이 전사하였다. 미국이 쓴 전쟁비용만 물경 1650억 달러에 이른다.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주장하며 국민들을 단결시킨 호찌민 주석의 위대한 영도력이 통일을 달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고, 베트남 역사에 전쟁불패의 신화를 다시 한 번 쓰게 하였다.

◼ 통일후 사이곤을 호찌민시로

미국의 파병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인 1975년 4월 30일 오전 11시30분 남베트남 수도 사이곤(현 호찌민시)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궁인 독립궁에 북베트남(월맹)기가 게양되었다. 사이곤 함락작전의 선봉으로 나선 북베트남군 제 203 기갑여단 소속의 소련제 탱크(843호)와 이를 뒤따르는 304사단 소속 보병 병력이 독립궁에 진입한 지 정확히 45분 뒤의 일이었다. 같은 시간 독립궁에서는 베트남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인 즈엉반민은 무조건 항복을 위한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로써 인도차이나 반도에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 들어섰던 베트남공화국은 역사의 뒤편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베트남공화국의 패망은 곧 베트남의 통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구심체인 호찌민 주석이 사망한지 6년 만에 통일의 꿈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통일 다음해인 1976년 7월 2일 남부 베트남공화국의 수도 사이곤을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시로 변경하였다.

◼ 호찌민 주석의 리더십: 노블레스 오블리주

1975년 4월 30일 사이곤 함락과 남베트남 정권의 몰락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를 한동안 패배감에 휩싸이게 하였다. 그러나 1955년 이후 20년 동안 계속된 통일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남베트남군의 전사자가 223,748명으로, 북베트남군과 이들을 도운 게릴라(베트콩)까지 합칠 경우 적어도 1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또 당시 베트남 전체 인구의 10% 가량인 4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하였다. 특히, 북베트남의 경우 미국의 폭격으로 도로, 항만, 철도, 발전소 등 인프라가 거의 파괴돼 전후 경제 재건에 큰 부담을 초래하였다. 한 나라가 위대한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생존과 흥망성쇠에 매우 중요하며, 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호찌민 주석은 베트남 전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위대한 지도자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자유,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 베트남 국민의 자부심이 되었다. 호찌민 주석은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바꿍 정신”으로 국민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하면서, 국가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지도자였다. 또한 국민과의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는 지도자였다. 모든 정치가들이 그의 리더십을 금과옥조로 삼아 국가를 경영한다면, 그 나라는 자주독립국으로 번영을 구가하게 될 것이다.


◼ 베트남의 문호이자 국제적 감각을 가진 정치가
◼ 옥중일기는 베트남의 보물

호찌민은 프랑스어, 영어, 러시아어, 태국어, 3개의 중국 방언을 구사할 줄 아는 국제적 감각을 갖춘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베트남이 낳은 문호이기도 하다. 호찌민 주석은 1942. 8. 27-1943. 9. 10까지 380일간 중국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군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중국 광시성 13개 현(縣)의 18개 감옥에 수감생활을 하면서 쓴 133편의 한시집인 <옥중일기(獄中日記)>가 있다. 옥중에서 베트남 문학사에 위대한 문학 걸작을 남겨 놓은 것이다. 옥중일기는 베트남 사람이 베트남어가 아닌 당율(唐律)에 따라 쓴 한시집이다. 옥중일기를 통해서 베트남의 민족지도자가 감옥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조국만을 생각하는 애국정신 그리고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해학적 사고방식, 겸손한 인간성은 물론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2012년 10월 1일 <옥중일기>를 국가보물로 지정하였다.

身體在獄中(신체재옥중)-몸은 옥중에 있으나,
情神在獄外(정신재옥외)-마음은 옥밖에 있네.
欲成大事業(욕성대사업)-위대한 사업 이루려는 꿈을 꾸면서
精神更要大(정신갱요대)-내 마음 더욱 크게 키우리라.

중국 광시성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는 영양실조에 걸려 이가 다 빠지고 지독한 옴에 걸려 온몸이 비단구렁이처럼 울긋불긋하고, 이불이 없어 신문지를 서로 엮어 종이이불을 덮고 자는 등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이겨낸 철인이었다. 이러한 역경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자신이 출옥만하면 나라를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를 연구하였다.

囚人出去或爲國(수인출거혹위국)-수(囚)에서 인(人)을 빼고 혹(或)이 들면 국(國)이 되고 患過頭時始見忠(환과두시시견충)- 환(患)에서 머리의 중(中)을 제하면 충(忠)이 보인다.
人有憂愁優点大(인유우수우점대)- 사람에 근심이 있음으로 넉넉함이 더하는 것이니,
籠開竹閂出眞龍(농개죽산출진용)- 농(籠)에서 죽(竹) 빗장이 풀리면 진짜 용(龍)이 나오리라.

1943년 출옥 2년 후에는 그가 쓴 시의 파자(破字)대로, 옥에서 나와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포하고 나라를 세워 진짜 용(龍)이 되었다. 그는 나라를 세우고 완전한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베트남의 5천년 역사를 새로쓴 호찌민 주석을 이해하는 것은 베트남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호찌민 주석은 “독립과 자유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인물이요, 베트남의 인동초(忍冬草)같은 인물이다.
 
 

[박일재 화백의 호찌민 초상화] 

 
 

안경환 전) 조선대 교수, 한국베트남학회 회장   thongnhat@hanmail.net
글로벌 k-방역포럼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