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완의 '기사'식당] 그날 수요집회에선 일장기가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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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완 기자
입력 2020-04-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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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주 열리는 정기 수요집회에 일장기가 등장했다

  • 보수단체, "소녀상은 우상숭배...수요집회 중단요구"

  • 日시민 "한일 문제가 내부 정치 다툼으로 번지는듯"

[편집자 주] 어서 오세요. 기사(記事)식당입니다. 얼굴 모르는 이들이 흘리는 땀 냄새와 사람 사는 구수한 냄새가 담긴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영화 '김복동'과 영화 '주전장'은 모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김복동'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故김복동 할머니의 일대기를 그렸다. '김복동'보다 2주 앞서 개봉한 '주전장'은 위안부 문제를 왜곡·은폐하려는 일본 우익 세력과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주전장(主戰場). 주된 전쟁터라는 의미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도 주전장이 있다. 지난 8일 제143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열린 자리였다. 이들 양옆으로 일부 보수단체 등이 위안부 진실 왜곡을 주장하며 수요집회 중단을 요구하는 맞불 집회를 벌인 것이다.
 
 

지난 8일 제143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인근에서 위안부 진실 왜곡을 주장하는 보수단체 회원이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홍승완 기자]

 
옛 일본대사관 평화로를 따라 걸으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소녀상 철거 팻말 시위와 정기 수요 집회, 일장기를 든 반대단체의 모습이 순차적으로 이어지면서 마치 교차 편집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탓이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소녀상의 좌측에서는 "위안부, 누가 강제연행이라고 떠드나"라고 적힌 팻말이 들썩였다. 우측에는 일장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소녀상 입장에서는 살짝 곁눈질하면 보일 만큼의 가까운 거리다. 그러나 소녀상은 하염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국가·하나의 과거···두 개의 목소리

정면만 응시하던 소녀상은 지난해 12월에도 "철거하라"는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어야 했다. 

'반일민족주의를 반대하는 모임', '한국근현대사연구회' 등이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기자회견은 한때 논란을 불러왔던 책 '반일 종족주의'의 공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위원은 소녀상이 철거되고, 수요집회가 중단될 때까지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나의 과거에 서로 다른 해석이 부딪혔다. 움켜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소녀상 입장에서는 일본 정부뿐 아니라 투쟁해야 할 상대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지난 8일 열린 제143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한 여성이 일장기를 들고 수요집회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사진=홍승완 기자]


직장인 서지연(가명·27)씨는 수요시위에 반대하는 집회가 세월호 단식농성을 조롱한 '폭식 투쟁'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고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정기 수요시위 장소에서 불과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맞불 집회를 열어 일본군 성노예 범죄를 부정하는 것은 피해자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누군가에겐 불편한 존재

그들에게 소녀상은 불편하다.

수요집회 중단을 촉구하는 보수단체들은 소녀상을 '우상숭배'로 명명했다. 수많은 공공장소에 전시해 대중에게 억지 정서적 공감을 강요한다는 주장이다. 현장에 있던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장은 한 위안부 피해자 이름 앞에 '기생학교 출신'이라는 표현을 더 했다. 빨간색 글씨라 더욱 눈에 띄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표현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일찌감치 비슷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1997년 당시 자민당 보수우파 의원들 모임인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에서 사무국장을 맡았던 아베 총리는 “한국에는 기생집이 있어 위안부 활동이 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기생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의 본질일까.

일본 언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도했던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는 지난 2017년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생학교 출신'이 위안부로 갔다고 해서 인권유린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또 기생은 성매매자와 동일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특히 김 소장이 언급한 피해자의 증언록에 따르면 피해자가 만주의 위안소로 가게 된 건 1940년. 그가 만 12살 때의 일이다. '위안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던 피해자가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엄청 추운 곳·군인들 그리고 성병뿐이었다.

"소녀상 철거하라" vs "세상 올바르게 살아라".

일본군 성노예 피해 문제를 두고 한일 간이 아닌 국민 간 충돌하고 있는 문제를 일본 시민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토미(가명·22)씨는 "일본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 문제는 미디어에 잘 나오지 않는다. 한국에서 이 문제가 찬성·반대로 나뉘어 매주 부딪히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놀랍기도 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아카네(가명·28)씨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 문제가 한일 양국 간의 문제에서 한국 내에서의 정치적 다툼으로 번지는 것처럼 보인다"고 전했다.

김 소장은 이날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대여섯 개의 팻말을 번갈아 가며 수요집회가 끝날 때까지 1인 시위를 이어갔다.

◆故김복동 "우리에게 해방은 오지 않았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저서 '신친일파'에서 일본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이 한국에도 있다며 '반일종족주의'를 출간한 저자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지목했다. 그들이 일본 극우 세력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소녀상 철거와 정기 수요집회 중단을 주장하는 것도 이들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소녀상을 둘러싼 소란에 일본 정부와 극우 단체는 '약발'이 들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반일종족주의'의 공저자인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실제로 지난해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 인권이사회에 참석해 위안부 문제와 관련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은 높았고,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 이후 YTN 등 국내 언론은 이 연구위원이 일본 극우 인사에게 자금을 지원받은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연구위원은 페이스북에서 "사실과 다르다. 여비를 지불한 곳은 일본역사논전연구소"라고 맞받아쳤다.

 

[사진=국제역사논전연구소(國際歷史論戰硏究所) 홈페이지]


하지만 그가 말한 일본역사논전연구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식 명칭 '국제역사논전연구소(國際歷史論戰硏究所)'는 스기하라 세이지로 교수가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일본 교육 현장에서 역사 왜곡에 앞장서 온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국제역사논전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라온 단체 소개말은 이 단체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1992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라고 말한 변호사(도쓰카 에쓰로)의 주장에 일본이 즉각 항의하고 반박했다면 한국 전역에 위안부 동상이 만들어질 일은 없었을 것".

8일 수요집회에서 한 남성이 소녀상 쪽을 향해 "할 줄 아는 거라곤 간판팔이밖에 없느냐"는 말을 쏟아냈다. 이 말이 내내 귓전을 맴돌았다. 故김복동 할머니는 자신을 두고 "아직 해방되지 못한 존재"라고 칭했다.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기 전까진 말이다. 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났지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의 진정한 해방은 요원해 보인다.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짧은 단발머리에 손을 움켜쥔 소녀는 의자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홍승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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