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 (28) 나는 하루살이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3-11 09:25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지금·여기·나, 어떻게 살 것인가…30000개의 하루를 끝날처럼 살라

일년살이와 하루살이의 차이
 
하루는 일주일이나 한달, 혹은 1년과는 다르다. 하루는 해가 돋는 새벽과 아침이 있고, 해가 중천에 있는 한낮이 있으며, 해가 지는 저녁과 해가 사라진 밤이 있다. 하루를 인식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직관적이다. 해의 이동 그리고 낮과 밤의 순환이 뚜렷이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인위적으로 나눠진 단위에 가깝다. 월요일이 달과 관련 있는 날도 아니고, 일요일이 해가 특별해지는 날도 아니다. 인간의 사회활동 속에서 일주일이란 기간의 구분은 중요하지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하늘만 보고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달이란 기간은 달의 위치와 관련이 있고 천체 속의 지구 움직임과 분명히 관련이 있지만, 하루만큼 직관적이지는 않다. 달의 모양을 보고 알아내거나 월급날을 기준으로 실감하는 경우가 많다. 1년이란 기간 또한 태양계를 공전하는 지구의 움직임 때문에 획정되는 시간이며, 우리의 경우 4계절이 차례로 한 바퀴 순환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1년을 세(歲)로 표현하여, 인간 삶의 중요한 시간 개념인 '나이'가 생겨났다. '세'는 겨울의 가장 추운 때를 말하는데, 이것을 1년의 끝과 시작으로 보고 이 포인트를 거쳐야 1년을 산 것으로 친다는 개념이다.
 
우리는 1년이란 시간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가 살아온 1년의 시간들을 살피며 삶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반성하는데 익숙하다. 어떤 사람이 몇 살인지를 아는 것은 그가 삶의 어느 시간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중대한 좌표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대개 '한해살이'로 인생의 과정을 인식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년이란 시간은 순간순간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아니기에, 삶의 시시각각을 조금은 느슨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된다. 1년의 단위로 보면, 하루는 365개나 되는 하루 중의 하나일 뿐이며, 하루 뒤에는 또 하나의 하루가 있다. 하루는 자꾸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을, 그리고 가을을, 또 겨울을 기다린다. 1년을 지나고 나서야,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는지 돌아보며 놀란다. 10년도 그렇고 50년도 그렇다. 이것이 인간이 자신의 시간에 대해 당황하는 방식이다.

'하루하루 살아요'를 복음성가에 넣은 스탠필 목사
 
하루살이라는 곤충은 딱 하루만 사는 건 아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애벌레로 물 속에서 살다가 반쯤 되는 성충으로 변태를 한 뒤에 날벌레로 육상생활을 시작한다. 탈피를 한 이 날벌레는 서둘러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다. 일주일쯤 날아다니며 제 할 일을 마친 뒤 죽는데, 인간의 눈에는 금방 죽는 것처럼 보여서 하루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루살이의 삶에서 '하루'란 일생에 가깝다. 하루살이가 사람의 삶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아득해 보일까. 하루살이처럼 치열하게 매일을 산다면, 그 삶은 얼마나 길고 아득한 것일까.

[Thomas Carlyle, 1795~1881]

우리에게 살 날이 하루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 하루가 얼마나 아깝고 달콤하겠는가. 못 할 일은 무엇이 있으며 못 견딜 슬픔은 또한 어디 있겠는가.

유명한 복음성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노래가 있다. 미국의 목사 가수 아이라 스탠필(Ira Forest Stanphil·1914~1993)이 이 곡을 썼다. 우여곡절 끝에 이혼한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에 작사·작곡한 이 노래의 원제목은 'I know Who holds Tomorrow(내일을 주관하는 분을 나는 알고 있네)'이다. 극한의 절망에서 그는 내일의 해를 빌려와 오늘을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직 인간은 하루를 살 수 있을 뿐이며, 그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내일'은 내 것이 아니라 신의 주권 영역에 있는 것이다. 성가의 제목이 말하듯, 내일을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분명히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함으로써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다는 게 '하루하루 살아요'의 의미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6:34) 이 예수의 말이 노래로 탄생한 것이다.

1918년 1월 13일. 28세의 류영모는 스스로가 그동안 살았던 '하루'들을 셈하여 보았다. 1만240일이었다. 그는 왜 자신의 날수를 세기 시작했을까. 성경 시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시편 90:12)

28세 때부터 살아온 날수 계산을 하다

류영모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 철학자 칼라일(Thomas Carlyle·1795~1881)이었다. 19세기 말 일본 지식인들은 칼라일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그의 저작들을 소개했다. 의상철학(Sartor Resartus·衣裳哲學)으로 일컬어지는 칼라일의 사상은 자연적인 것은 초자연적인 것의 의상(옷)이라고 주장한다. 칼라일은 가상의 독일 의상철학자를 내세워 전기(傳記)를 쓰는 형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육체나 자연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영혼이나 신과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옷을 입은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는 바로 신을 따르는 종교적 가치이기도 하다. 그는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아를 초월하여 영원을 긍정해 나가는 이야기를 통해 당시 전통적 기독교신앙의 좌표 상실을 비판한다.

류영모는 이 책들을 접했을 것이다. 류영모는 오산학교 학생들에게 '오늘'이란 시를 소개했다. "이 새로운 날은 영원에서 태어났고/밤이면 다시 영원으로 돌아간다(Out of Eternity This new Day is born; Into Eternity, At night, will return)."

오늘 하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는 저 구절이 젊은 류영모를 사로잡았겠지만, 그가 날수를 세기 시작한 계기는 아마도 칼라일의 다른 시 '오늘을 사랑하라'가 아닐까 한다. 그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우리의 삶은 오늘의 연속이다/오늘이 서른 번 모여 한달이 되고/오늘이 삼백육십다섯 번 모여 일년이 되고/오늘이 삼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라고 되어 있다.

오늘이 삼만 번 모여 일생이 된다는 것,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살 수 있다면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3만날을 살면 82세가 된다. 류영모는 칼라일이 말한 일생보다 3200일을 더 살아 3만3200일을 살았다. 아침에 잠을 깨어 눈을 뜨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며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잠드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류영모다. 하루 동안에 일생을 산다. 류영모의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 하루살이 혹은 오늘살이는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28세 이후 하루하루 세면서 삶을 살았다.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를 비행하다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마중을 나가 기다리는 동안 차를 기다리는 동안 같은 부스러기 시간에도 자기의 사상을 영글게 하는 데 써야 합니다. 하루를 무심히 보내면 백년, 천년을 살아도 시간을 다 잃어버립니다. 이 겨레가 5천년 동안을 긴장해서 살아왔다면 지금 이 모양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조상이나 우리나 모두 하루를 무심코 편안히 지냈기에 지금 요 모양입니다.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한 인생도 비상한 생명이 됩니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밖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쉬면서도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깨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제나는 죽고서 얼나로 사는 삶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허송세월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지나간 것은 찌꺼기라 볼 것이, 돌볼 것이 못 됩니다. 내일을 찾으면 안 됩니다. 내일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손님입니다. 언제나 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오늘, 오늘에 있습니다."

류영모가 날수를 센 자취는 여러 곳에 남아 있다. 1918년 10월 28일의 일기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우리 생물 모두가 대지구를 함께 타고 세계일주가 아니고 태양계를 백주, 천주, 만주 하면서 또 태양계가 소속된 모든 성단(별무리)으로서 은하계를 무수히 주행한다. 과거 비행이요, 방금 비행이요, 영원 비행이다. 우리 대괴호(지구 덩어리 우주선)의 직경은 3만리(1275만m)에 초속력이 근 30㎞나 된다." 28세의 청년이 펼친 장쾌한 우주여행기는 영화의 스토리들처럼 우주선을 타고 태양계와 은하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것을 하나의 우주선으로 보고 영원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비행하고 있는지를 그려 보여준 놀라운 상상력의 작품이다. 이런 엄청난 스케일의 공간인식과 시간인식을 하던 그날은 언제였던가. 생후 1만456일의 일기였다. 날수 계산을 한 지 216일째 되던 날이기도 하다.

1만8000날의 기억도 있다. 김교신은 자신이 주관하던 서울성서연구 회원 19명과 함께 구기동으로 스승 류영모의 집을 방문한다. 그 전날이 1만8000날(나이로 50세, 천명을 안다는 때이다)이었기에 스승에게 인사를 하러 간 것이다. 그때 함께 갔던 성서조선 동인 송두용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선생님은 산도 1만2000봉이면 금강산이 되는데, 인간 1만8000봉은 무엇이어야 하나 하며 웃으셨지요. 그날 나는 산 날을 세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런 기념을 하는 것은 류영모 선생님이 처음이셨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하루살이를 강조했다

공자나 석가도 오늘살이에 대한 신념을 가진 분들이다. 공자는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를 말했다. 오늘 하루 나를 이겨 참나의 삶을 산다. 극기(克己)는 욕망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휘둘리는 제나를 이기는 것이고, 복례(復禮)는 '예'로 표상되는 얼나를 되찾는 것이다. '되찾는다'고 표현한 까닭은 하늘이 이미 주셨으나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찾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날마다 제나에서 얼나로 나아가는 삶을 사는 것만이 생이 제대로 된 오늘살이다.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를 말했다. 아침에 참나를 알게 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루살이는 하루의 도(道)를 완성하는 데 사력을 다하는 일이다.

석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출가하여 목숨이 7일낮 7일밤에 끝난다 해도 나는 그동안 부지런히 도를 닦고 계율을 지키고 진리를 말하여 중생을 가르쳐 이롭게 할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있는 이가 '죽는 생각'을 닦음>이라고 한다. 다시 7일낮 7일밤이 많다 하여 6일, 5일, 4일, 3일, 2일, 1일, 1시간, 아니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이라 하여도 그동안에 부지런히 도를 닦고 계율을 지키며 진리를 말하여 가르치며 중생을 이롭게 할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있는 이가 '죽는 생각'을 잘 닦음>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날수를 헤아려 지혜에 이르게 하라는 것"과 공자가 말한 "날마다 제나를 이겨 참나를 찾는 것", 석가가 말한 "숨 한번 쉬는 동안에라도 참나를 찾는 것"이 모두 '하루살이'의 지혜이다. 하루살이는 시간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다. 거기에 류영모는 '여기살이'라는 공간 인식을 또한 강조한다.
 

[다석 류영모]



여기살이와 가온찍기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줄곧 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정지(停止)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다 자꾸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 공간이라 하지만 거기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세상 안의 시간, 공간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변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변화를 무시하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몰래 옮긴다는 '밀이(密移)'라는 말을 씁니다. 만물이 은밀하게 움직여 갑니다. 옮겨 간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참으로 밀이(密移)입니다. 그래서 머무름이 없다는 무주(無住)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몸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 몸의 피는 자꾸 돌고 있으며, 우리의 숨으로 태울 것을 죄다 태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실은 지구 또한 굉장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허공(우주공간)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지나쳐 갑니다. 도대체 머무르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 이제 여기가 접촉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접촉점을 이제 여기라 한 것입니다. 지나가는 한 점이,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입니다. 그 한 점이 영원이란 미래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당해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여기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발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오랜 세상이라도 이제입니다. 가온찍기(나의 한복판을 맞추어 참나를 깨닫는 일)입니다. 이것이 나가는 것의 원점(原點)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입니다. 이제(여기)는 참 신비입니다. 그 이제의 목숨을 태우는 우리 인생은 역시 이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신비입니다. 한 찰나에 구십생사(九十生死)가 있다는 인도사상은 분명히 신비사상일 것입니다. 이제라고 '이' 할 때 이제는 이른 것입니다. '이' 할 때 실상은 이미 과거가 됩니다. 이 이제를 타고 가는 목숨입니다. '이'의 계속이 영원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