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정책결정과 전문가의 중요성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강영관 기자
입력 2020-03-02 12:5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이상호 한국건설산업연구원장


오늘날 정책결정은 전문가가 아니라 비전문가가 하는 경우가 많다. 좁은 분야의 기술적 전문성을 가진 편협한 전문가보다는 폭넓은 시각과 경험을 갖춘 비전문가가 결정하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국민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인들이 정책결정을 좌우해야 한다고 한다. 건전한 상식이나 다수의 의견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히 비전문가로서는 잘 알 수 없는 의학과 과학의 영역은 전문가의 판단이 중요하다.

1990년대 초에 미국의 어떤 시민단체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가 후천성 면역결핍증후군(AIDS)의 원인이라는 의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의학적 논쟁의 결과 거짓으로 판명돼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었던 타보 음베키의 눈에 띄었다. 음베키는 AIDS가 바이러스가 아니라 영양실조나 허약한 건강상태 같은 다른 요인들 때문에 걸리는 병이라는 주장에 동조했다. 그래서 HIV 치료약이나 전염을 막기 위한 세계 각국의 다양한 원조 제의를 거절했다. 음베키는 30만명이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고, 3만5000명의 아이들이 HIV 양성반응을 보인 뒤에야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의학과 과학의 영역에서 비전문가인 정치인의 판단이 압도한 결과였다. 이 사례는 전문가의 중요성과 역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끔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전문지식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다고 미국의 톰 니콜스 교수는 '전문가와 강적들(2017)'에서 지적했다. 그는 민주주의 자체가 일반인들이 전문가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면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전문화'라는 단어 자체가 비전문가의 의견을 '배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일종의 엘리트주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교육 받은 전문가는 소수였고 사실상 지식을 독차지해 왔다. 그 결과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과학, 철학, 공공정책에 관한 토론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종이나 계급과 같은 낡은 장벽만이 아니라 전문가와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일반인 간의 장벽도 허물어졌다. 인터넷의 확산은 지식의 장벽을 더욱더 허물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전문가나 일반인이나 지적 수준이 동등하다는 식의 비합리적 신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나의 무지(無知)도 너의 지식(知識)과 똑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잘못 인식되기도 한다. 그 이면에는 '평등 편향'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명제가 '나도 너만큼 안다'라거나 '너도 맞고 나도 맞는다'는 식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제는 전문가도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확립할 책임이 있다.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고, 일반인들을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전문가가 직접 정책결정을 하지 못하더라도 공직자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책결정자가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정책결정자는 그런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문해야 한다. 물론 전문가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기와 부정행위를 일삼는 타락한 전문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오랜 교육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비전문가보다는 전문가가 실수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겪고 있다.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론과는 달리 지역사회 감염이 급증하고 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코로나19 사태가 조기에 종식되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큰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한국의 의료체계나 전문가 수준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이다. 진정한 전문가들이 나서서 코로나19 대책을 수립하고 집행한다면 조기 수습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훌륭한 전문가를 발굴하여 권한과 책임을 주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의 한국 사회가 불행하게도 '정치과잉의 사회'로 전락했지만,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학과 과학의 영역만큼은 전문가를 우대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