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오디세이] 대제국 '로마시민권' 지중해 여행 프리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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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논설고문
입력 2020-01-27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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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리아누스 별장


서기 2세기, 파우사니아스라는 로마제국의 지리학자가 <그리스의 모든 것>이라는 열 권짜리 그리스 여행 안내서를 썼습니다. 그리스의 주요 지역 열 곳을 한 권에 한 곳씩, 그 지역의 역사와 신화, 신전 건축과 신전 장식품 등 예술품의 특성을 자연 환경 및 사람 사는 모습과 함께 소개한 이 책은 이후 여행안내서의 표준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1권은 아테네를 포함하는 아티카 지역입니다.)

파우사니아스가 <그리스의 모든 것>을 써서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로마 사람들의 여행 수요가 없었다면, 또 당시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가 그리스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책이 나오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우리나라 서점 여행코너에 즐비한 수백 종류의 여행안내서를 보세요. 해외여행 수요가 그만큼 있으니까 이렇게 많은 여행안내서가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나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는 1989년부터 시작됐습니다. 그 전에는 비행기 한번 타는 것이, 기내식 한번 먹는 것이 개인의 자랑이자 가문의 광영이었습니다. 외국 여행 나가기가 그만큼 어려웠던 거지요. 해외여행이 어려운데 여행안내서가 나온들 찾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요즘 볼 수 있는 형식의 여행안내서는 없었어도 한국인들에게 세계여행의 꿈을 키워준 여행기는 여러 편 있었습니다. 1965년에 초판이 나온 <끝없는 여로-세계일주 무전여행기> 같은 책입니다. 한국 최초의 배낭여행자로 꼽히는 김찬삼 씨(1926~2003)가 쓴 책이지요. 지리학 교수였던 그는 1958년부터 세계여행을 시작, 세 차례의 세계일주, 20여 번의 세계 테마여행, 160여개 나라, 1000여개 도시를 찾았던 진정한 여행가였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장기영 씨(한국일보 창업자, 1916~1977)와 천관우 씨(역사학자·언론인, 1925~1911)의 미국 여행기도 1960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 세계 여행의 꿈을 키워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966년에 나온 이어령 씨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도 그 명단에서 빼놓으면 안 될 책일 겁니다.

파우사니아스가 <그리스의 모든 것>을 쓸 무렵 로마 황제는 하드리아누스(76~138)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었음에도 전쟁을 싫어해 영토 팽창을 위한 전쟁은 억제하고 경제 성장에 힘을 썼다고 합니다. 넓은 땅을 지키기 위한 비용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투입한 것이지요. 당시 로마제국의 최북단 국경은 브리튼 섬(영국) 북쪽이었습니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길이 117.5㎞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이 그때 로마의 북쪽 끝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로마 국경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라크),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연결됩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으로 로마는 정치·군사적으로 안정됐으며, 경제가 좋아져 먹고살 걱정을 덜게 된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세계 제국이라는 말이 결코 무색하지 않은 광대한 영토를 예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도로망이 좋아진 것도 로마 사람들의 여행을 부추겼을 겁니다. 기원전 312년에 건설한 아피아 가도(Via Apia)를 이탈리아 사람들이 지금도 걷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때 로마 사람들의 도로건설 기술은 뛰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를 몹시도 사랑했던 황제로도 유명합니다. 그리스의 학자들을 존중하고 예술품과 유적지도 아꼈습니다. 모국어인 라틴어보다 그리스어를 더 사랑했고, 그리스어로 쓴 책 읽기도 좋아했습니다. 아테네에는 그의 지시로 건축된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유적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 로마 교외 티볼리에는 그리스 식으로 지은 ‘하드리아누스 별장’도 남겼습니다.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지요. 하드리아누스의 그리스 사랑은 로마 사람들의 그리스 여행에 ‘드라이브’를 걸었으며, 당연히 파우사니아스의 책도 많이 팔렸을 거라는 게 ‘합리적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우사니아스가 <그리스의 모든 것>을 썼다는 건 ‘지중해 여행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됐는가가 궁금해서 검색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지중해에 대한 글을 쓰는데, 지중해 여행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편하지 않겠습니까. 내 궁금증은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버트럼 고든 교수가 풀어줬습니다. 그가 2003년에 쓴 ‘고대부터 현대까지 관광지로서의 지중해’라는 논문을 읽어보니, 이집트 수도 카이로 근교 기자(Giza)의 피라미드에는 기원전 2000년쯤에 피라미드를 구경하러 온 사람이 새긴 낙서가 있다고 합니다. (유럽과 미국 사람들은 지중해에 면한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서 내륙으로 약 200㎞ 들어간 카이로도 지중해 지역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고든 교수에 따르면 기원전 5세기에 <역사>라는 역사서를 써서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사람들은 축제 구경을 하러 여행을 떠난다”고 썼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여행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이집트 최고위직을 지낸 요셉과 그 형제들이 지중해 동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이집트로 내려가거나 그 반대 방향으로 올라오는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는 건 고든 교수의 논문을 인용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모는 이집트를 다녀오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출발,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키프로스, 터키, 그리스의 많은 도시와 섬을 여행했습니다. 거의 걸어서 다녔습니다. 그는 이런 여행을 세 차례나 했습니다. 성경에는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로마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장거리여행도 쉽게 할 수 있었다고 나옵니다. 바울의 마지막 여행은 죄수 신분으로 배에 실려 로마로 압송되던 길이었습니다. 로마에 도착할 즈음 배가 거센 바람에 난파돼 몰타 섬으로 떠밀려갔다가 결국에는 로마로 끌려와 형을 살고 석방됐지만, 그 유명한 네로 황제의 기독교 대박해 때인 서기 67년 다시 붙잡혀 사형당합니다.

바울이 죽고 11년 뒤에 태어난 하드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정치·경제적으로 안정된 로마제국에 ‘문화의 시대’가 열리자 파우사니우스가 여행안내서를 쓸 정도로 지중해 여행자가 늘어났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 드렸지요.
로마제국은 4세기에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그러다가 서로마부터 망하고 동로마도 쇠망의 길로 들어서지요. 그리스 여행도 하드리아누스 이전 시대처럼 쉽지 않은 길이 되었습니다. 다시 고든 교수의 논문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제국이 내리막길로 들어서고 기독교가 번지면서 지중해 여행은 성지순례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서기 385년에는 에제리아라는 여성 수도자가 지중해 서쪽 끝인 스페인을 떠나 동쪽 예루살렘까지 갔다고 합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지중해 여행자일 수 있는 에제리아는 성경을 안내서로 삼았다니 그리스에서부터는 사도 바울의 여행길을 거꾸로 갔을 겁니다.

이후 십자군 원정, 8세기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과 14세기 오스만제국 등 두 차례에 걸친 이슬람 세력의 지중해 지배도 지중해 여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지중해 지배로 전과는 달리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랍인들이지요. 이들은 또 오랫동안 잊힌 지중해 남쪽, 즉 이집트와 튀니지 쪽을 여행하면서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들로 인해 서유럽 사람들의 지중해 여행은 예전처럼 활발할 수 없게 됐습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통해 인도로 가려고 한 것도 이슬람 세력의 방해로 지중해를 통해서는 인도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로마제국처럼 지중해를 완전히 통제하는 세력이 없을 때면 지중해는 해적들의 바다가 됐습니다. 특히 16세기 튀니지 쪽에서 처음 출몰한 ‘바르바리 해적단(Barbary Corsairs)’은 상선 약탈과 여행자 납치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1801년에는 미국 해군이 튀니지까지 원정을 왔다고 합니다. 그 직전인 1798년에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 정복했습니다. 뒤이어 튀니지와 알제리, 모로코 지역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런 사건들로 지중해 여행이 좀 안전하게 되자 지중해 여행자들도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중해 여행이 대중화된 것은 산업혁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 영국인들이 맑고 따뜻하며 볼 것 많은 지중해로 내려오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 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세계의 패권국가로 등장한 미국 사람들로 지중해 여행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시인, 소설가들과 미술가들이 지중해를 소재로 한 작품을 수없이 많이 쏟아놓으면서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났고, 1899년에는 최초의 지중해 영화 ‘a Dip in Mediterranean(지중해에 한번 퐁당)’도 미국 자본으로 제작돼 지중해에 대한 미국인들의 동경을 더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20세기 후반, 경제력이 급성장한 동아시아, 즉 일본과 한국인까지 합세하면서 지중해 여행 붐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2015년 한 해 ‘지중해 지역을 찾은 사람’은 3억5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20년 전인 1995년보다 두 배나 늘어난 숫자입니다. ‘지중해연안성장계획(MGI, The Mediterranean Growth Initiative)’이라는 기구에서 발표한 숫자입니다. 또 ‘세계관광기구(WTO, World Tourism Organization)’에 따르면 전 세계 관광객의 3분의 1이 이 지역에 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국가별로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순서로 관광객이 많지만 최근 들어서는 터키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알바니아를 찾는 사람도 늘어났답니다. 북아프리카 쪽에는 모로코 관광객은 늘어나는데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는 정세 불안으로 줄거나 답보 상태라고 합니다. 어쨌거나 지중해 전체를 세계 최대의 관광지라고 부르는 데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겁니다. 중국 사람들까지 깃발을 들고 나섰으니 지중해 관광객은 늘면 늘지 줄지는 않을 겁니다.

지중해, 특히 그리스를 오늘날 지중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만든 시인 소설가 중에서 꼭 언급해야 할 사람은 19세기 영국 낭만파 시인 존 고든 바이런(1978~1824)입니다. 하드리아누스 때 파우사니우스가 그리스를 돌아보고 <그리스의 모든 것>을 썼듯, 바이런이 그리스를 돌아보고 쓴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라는 ‘여행 시집’은 여행 욕구에 들떠 있던 당시 영국 사람들의 그리스 여행을 자극했다는 겁니다. 이런 연유로 바이런은 그리스에서 ‘그리스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바이런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긴 글이어서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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