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5)사람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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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01-2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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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준이 전해준 노장과 불경, 신채호가 보여준 민족주체성, 톨스토이가 건네준 본질적 기독교

류영모에게 여준이 다가왔다는 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사람이 온다는 건' 중에서>

그랬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류영모에게 여준(呂準·1862~1932)이 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1920년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한 류영모에게 여준이란 존재가 다가왔다는 것은 여준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온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나라 독립운동사의 지치지 않는 불꽃이었던 여준과의 만남은 류영모에게 내면의 빅뱅을 낳는 사건이었다.

우선 여준의 삶을 일별(一瞥)하자. 그는 경기도 용인(당시 죽산군) 출신으로 여운형의 먼 친척 숙부이다. 호가 시당인데, 時堂(시대의 집, 시시각각으로 당당하라) 혹은 是堂(바로 이 집, 옳음의 집)으로 쓴다.

20대 때 서울 회현동(당시 호현방 회동)에 살던 재당숙(7촌) 여규형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그 동네에는 이상설(1870~1917, 1907년 헤이그 특사)과 이시영(1868~1953, 해방 뒤 첫 부통령)이 살고 있었다. 여준은 6살 어린 이시영, 그리고 8살 어린 이상설과 뜻이 잘 맞았다. 1885년 24세 때 여준은 이상설, 이시영, 이회영(1867~1932), 서순만, 이범세(1874~?)와 신흥사에서 8개월간 합숙하며 한문, 수학, 영어, 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여준은 이 걸출한 청년 그룹을 정신적으로 이끄는 '형님' 역할을 했다. 이시영은 나중에 여준을 '절재(絕才, 최고의 인재)'라고 극찬한 바 있다. 

여준은 1898년 이회영과 함께 이상설의 집에 모여 '독서클럽'을 만든다. 정치, 경제, 법률, 동·서양사 등 신학문 서적들을 강독·토론했고 번역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여준은 중국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애독했다. 국가의 자강혁신을 논한 책이었다. 1908년 안창호가 지역의 지식인들이 찾아와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첫번째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선 음빙실문집을 읽어보시오"라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안창호는 오산학교가 설립될 무렵, 여준을 만나 서로 뜻을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음빙실문집 얘기도 나왔을 것이다. 

한국 최초 신학문 학교 '서전서숙'을 세운 사람

중국으로 건너간 여준은 1906년 북간도 연길현 용정촌에 한국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기관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운다. 이상설이 초대 '숙장'을 맡았고, 여준은 2대 숙장을 지냈다. 일제의 방해로 훈춘으로 옮겨 서전서숙을 재건했던 사람도 그였다. 서전서숙이 강제 폐교된 뒤 여준은 국내에 돌아와 1907년 4월 신민회에 가입한다. 신민회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해 12월 그와 함께 오산학교 설립에 나섰던 여준은 최고의 콘텐츠를 갖춘 교사로 큰 기여를 했다.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술, 대수, 국가학, 법학, 한문, 헌법대의를 강의한 그는 오산학교의 '걸어다니는 도서관'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45세의 학자로 교사들 중 가장 어른이었던 여준. 키는 작지만 목소리는 야무지고 우렁찼던 그의 강의는 지식에 굶주린 학생들을 황홀하게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가 일어났을 때 여준은 전교생을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의 원수 이등(伊藤)은 죽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안중근의 뒤를 이어 제2, 제3의 이등을 몰아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선 '이등은 우리나라를 먹으려 하지 않고 계발시켜 동양3국이 서로 붙들고 나아가 서구 나라들과 대항하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진 위대한 정치가'라고 선전하는 자도 있다. 그자들의 모략에 속아선 안 된다. 깨어야 한다. 일어나야 한다. 우리 민족을 위해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한다."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장렬한 죽음

여준은 1910년 말 오산학교를 떠나 서간도로 간다.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여준은 영어선생을 맡았고 제2대 교장이 된다. 눈바람이 살을 에는 혹한에 아침 체조를 한 뒤 애국가를 부르는 학생들 앞에서 여준 교장은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후 그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해 정령이 됐고, 1919년 3월 '대한독립선언서' 배포를 주도했다. 상하이 임정수립 이후 서로군정서에서 부독판을 맡아 독립군 간부 양성에 주력한다. 임정 분열 당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경 노선을 걸었다.

말년에 북만주에 살았는데, 1932년 중국 군벌에게 아들 여운달과 함께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68년 정부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고, 국내 후손이 없었기에 오산중고등학교에서 훈장을 보관하고 있다. 시신도 자손도 유품도 없는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옳은 집' 한 채였다. 지금은 텅 비어 있는.

그러나 그와의 조우(遭遇)는 류영모의 정신사를 일신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오산학교 시절 류영모에게 여준은 영혼을 일깨우는 28년 연상의 대지식인이었다. 이 학교의 하드웨어는 이승훈이 만들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대부분 여준이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학교에 올 때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지식에 목말라했던 류영모에겐 뜻밖의 눈호강이었다. 곧 여준 장서(藏書)의 최대수혜자가 됐다. 불경과 노자 도덕경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눈을 뜬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미 교회주의 기독교에 접했던 류영모가 생각의 터전을 넓히고 통찰의 폭을 키웠던 때였다. 서양의 종교를 높은 수준의 동양적 교양으로 새롭게 읽고 재정립하는 류영모의 길이 열린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꼿꼿한 신채호에게서 투철한 주체의식을 배우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가. 1910년 봄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신채호가 국외로 망명하는 길에 오산학교에 얼마간 묵는다. 그는 여준과 한 방을 썼다. 30세였던 신채호와 48세였던 여준. 신채호는 세수를 할 때 허리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옷이 다 젖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독립을 염원하는 자가 함부로 몸을 숙이지 않겠다는 결의 같은 것이었다. 신채호의 태도를 통해 류영모는 무엇을 보았을까. 세상의 부당성을 이기는 것은 오직 일상 속의 투철한 실행에 있다는 맹렬한 주체의식이 아니었을까.

신채호는 20세의 류영모에게 뛰어난 사학자로서 역사와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1909년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와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대종(大倧)이란 세상을 널리 구제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내려온 한얼님이란 의미다. 그들은 단군을 예수처럼 여겼다. 이런 생각들은 류영모에게 영성의 깊은 자각을 일깨웠을 것이다. 주역에 '이견대인(利見大人, 대인을 만나면 이롭다)'이란 말이 있다. 류영모의 20대를 새롭게 눈뜨게 한 신채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작가이자 신앙사상가 톨스토이.]



러 소설가 죽음에 왜 오산학교가 추도식을?

1910년 11월 7일 아침 6시 5분,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1828~1910)가 눈을 감았다. 세계적 문호인 러시아 작가의 죽음에 세계가 슬픔에 빠졌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당시의 반응은 그 이상이었다.

톨스토이는 아내 소피아와 부부싸움을 한 뒤, 농촌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막내딸 알렉산드라와 함께 몰래 가출하여 여행 중이었다. 기차 안에서 급성폐렴을 앓다가 아스타포보(현재 톨스토이 역) 역에 급히 내렸고 역장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나라를 잃은 조선의 오산학교에서는 선생과 학생들이 모여 톨스토이 추도식을 가졌다. 육당 최남선은 그해 잡지 '소년' 12월호에 4행시 72편을 연작한 기나긴 조시(弔詩)를 싣기도 했다. "눈보라 검은 구름 하늘을 덮고/그 틈으로 나오는 듯 칼바람 불 때/요령소리 문에 나자 전하는 신문/그에 선생 떠난다고 기별하도다"와 같은 시편들이다.

왜 식민지 나라에서 러시아 작가의 죽음에 대해 이토록 각별하게 슬픔을 표현했을까. 톨스토이 소설 애독자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톨스토이는 단순한 작가가 아니었다. "톨스토이는 하나의 세계이자 인간이었다"고 말한 사람은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였다. 고리키의 이 말은, 그가 단순한 문학가를 넘어서 있는 시대적 표상이자 실천적 인간이었음을 의미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톨스토이는 거룩한 신"이라고 단언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거대한 바윗덩이이자 엄청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우리 시대에 톨스토이보다 중요한 예언자는 없다"고 했다.
 

[다석 류영모]



톨스토이 종교사상에 주목한 류영모

톨스토이에 쏟아진 당대와 후대의 많은 예찬들은 주로 그의 문학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위대함의 진면목이 종교사상에 있음을 제대로 주목한 사람은 류영모였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양의 정통 기독교 신앙과 거의 같은 유속(流速)으로 흘러들어온 '기독교에 대한 톨스토이적인 성찰'을 동시에 만난다. 놀라운 신앙사상가이자 종교실천가 톨스토이. 그는 20세기를 숨쉰 '성자'였고 기독교의 교리신앙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에게 새로운 눈을 열게 해준 영적인 스승이었다.

1910년 3월 오산학교에 이광수가 왔을 때, 18세였던 그의 머릿속에는 톨스토이가 깊이 들어와 있었다. 이광수는 오산학교에 오기 전에 일본 도쿄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그 시절 동급생이었던 일본인 야마사키가 가지고 있던 톨스토이의 책을 탐독한다. 일본에서 귀국할 때 아예 톨스토이 전집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오산학교로 올 때는 톨스토이의 통일복음서를 지니고 왔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해 11월 톨스토이 추도식은 '교사 이광수'의 8개월여 교육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날 학생들은 걸출한 러시아 문학가를 추도한 것이 아니라, 동시대를 숨쉬다 간 위대한 성자를 추도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라는 저술을 남겼다. 책상 위나 침대 머리맡에 두고 늘 읽어야 할 구절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중에 '참나'라는 제목의 글은 신앙사상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육체를 위해 산다면 자기 자신만이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된다. 이렇게 혼자만 행복하려는 이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기에 서로 반목한다. 우리는 육체가 영원하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갈등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육체가 아닌 영혼에 진정한 '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영혼은 사랑을 통해 타인과 합일을 이룬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육체는 영원한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일 뿐 곧 스러질 존재에 불과하다." <톨스토이의 '참나' 중에서>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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