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평생의 숙원"···혁신전도사 꿈꾼 구자경 LG명예회장

김지윤 기자입력 : 2019-12-14 14:11
회장직 물러나면서도 '혁신' 강조···최초로 기업공개 등 50여개 해외법인 설립···성공적 해외진출로 세계화 주도 지멘스·히타치·후지전기 등 세계적 기업과 합작경영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고객가치 경영 핵심 이념으로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LG 명예회장. [사진=LG 제공]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다."

LG그룹 2대 회장으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던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고인은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 '혁신'을 평생의 숙원으로 꼽았다. 은퇴 후에도 경영혁신 활동을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며, 스스로 '혁신의 전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 재계의 혁신 전도사 구자경···고객 중심 LG 만들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그는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냈다. 또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했다. 

특히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 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고, 또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나아가 아예 회사의 경영이념을 고객가치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인 경영 활동은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내 기업들에 경영활동 선진화를 위한 좋은 표상이 됐다.

◆ 민간기업 최초로 기업공개···투명경영 강조

구자경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들보다 한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구자경 LG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LG 제공]

◆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되다

구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했다.

구 명예회장은 생전에 "럭키그룹은 두 가지 면에서 합작의 명분을 찾아왔다"며 "하나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요 또 하나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또 그는 "서로 믿고 존중할 줄 아는 조직 문화, 거슬러 올라가면 그룹의 모태가 된 '인화(人和)'에 그 뿌리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많은 합작법인을 운영하면서도 파트너와의 분쟁이 없이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합작 사례로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해 한치의 잡음 없이 경영을 이어왔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70년대 초반에 두 건의 화재 사고를 겪으면서 칼텍스를 신뢰하게 됐다. 71년 호남정유가 입주해있던 건물에 불이나 중요 서류가 타버렸을 때 칼텍스는 사본을 제공하며 복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72년 여수 공장에서 화재가 났을 때는 칼텍스 측이 사전에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둔 덕에 불이 크게 번지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974년에는 금성통신이 외국과의 합작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했을 당시, 합작 파트너였던 지멘스 측의 협조가 원활해 언론에서 합작사업의 모범 사례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멘스와의 합작은 선진기술을 배우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많을 때는 10여명의 지멘스 기술자가 금성통신에 파견돼 1년 이상 머물며 금형기술을 전수해주었고, 또 가전부문에서도 라디오나 냉장고의 부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처럼 럭키그룹이 합작 사업의 좋은 선례를 남기면서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 많은 외국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럭키그룹에 사전 자문하러 오기도 했다.
 

1970년 11월, 구자경 LG 명예회장(테이블 앞줄 오른쪽)이 금성통신 창사 1년만에 독일 지멘스를 비롯해 독일해외개발공사와 일본 후지전기 등 3개국 4개 회사가 제휴한 '통신 전기기기 제조판매 수출사업을 위한 합작투자 기본계약'을 체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LG 제공]

◆ 경영 선진화 주도···전문경영인 체제 안착 

구 명예회장은 개방과 변혁이 소용돌이 치는 1980년대를 겪으면서 국경 없는 국제 경쟁을 예견하고 깊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그는 스스로 경영혁신 방향 수립을 진두지휘해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 '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으로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은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을 수행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문경영인 체제가 보편적이지만, 당시로써는 LG 내부에서도, 그리고 재계에서도 선뜻 실행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경영체제 개념이었다.

시행 초기 그룹 내부에서도 '중요한 결정 권한은 회장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계열사 사장들 또한 타율적인 태도를 쉽게 버리지 못해 회장을 찾아가 의사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곤 했다.

1990년 2월에는 '고객가치 경영'을 기업 활동의 핵심으로 삼은 새로운 경영이념으로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을 선포했다. 고객가치 경영은 한국 재계에서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새로운 경영 조류였다. 이를 경영이념으로 선포한 것은 기업경영의 축을 공급자 중심에서 고객 중심으로 전환한 혁신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일일이 임직원들을 만나 경영혁신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꼬박 2년에 걸쳐 그룹 전 임원 500여명과 오찬 미팅을 했고, 어느 해에는 1년 동안 현장의 임직원들과 간담회 형태의 대화 자리를 140여차례나 갖기도 했다.

◆ 그룹 내부 문서에 '고객결재' 칸 만들어 
 
임직원뿐만 아니라 고객의 목소리도 직접 들으러 나섰다. LG전자의 서비스센터를 비롯해 당시 LG가 사업하고 있던 분야에서 고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생생한 고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구 명예회장은 현장에 갈 때마다 "고객의 입장에서 듣고 생각하라. 이것이 혁신이다"라는 말을 항상 잊지 않고 강조했다.

그룹 내부에서는 사내 문서의 결재란에 '고객결재' 칸을 회장 결재 칸 위에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마련했다. 무슨 일을 하든 항상 고객을 생각하고, 모든 회의에서 고객의 의견을 최고로 존중하겠다는 문화를 만들어갔다.

구 명예회장의 자율과 책임경영이라는 혁신적인 경영체제 도입과 이를 정착시키고자 쏟아 부은 열정은 LG에서 전문경영인 경영 방식이 조기에 정착되고, 나아가 훗날 LG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수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선진화된 지배구조와 투명경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문화적 토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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