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때문에, '기생충'감독이 봉스트라다무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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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9-0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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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이 국내 개봉된 것은 지난 5월 30일이었고, 이후 관객수 1000만명을 넘겼다. 이 땅의 인구 5분의1이 극장에 가서 봤던 이 영화는 석달 뒤인 지금,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하고 있다. 갑자기 감독 봉준호를 향해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 뺨칠 '봉스트라다무스'라고 혀를 내두르는 이까지 생겼다. 

아버지 기택(송강호)은 딸 기정(박소담)이 깔끔하게 재학증명서를 위조해내는 솜씨를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와,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것 없나?"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작품인지라, 이 대사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를 놓고 번역자인 달시 파켓(47·미국 영화평론가)은 몹시 고심했다고 한다. 이틀간 밤샘까지 하면서 내놓은 작업의 결과는 이거였다.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

파켓은 직역을 할 경우 서울대가 상징하는 의미를 전달할 수 없었기에, 고심 끝에 옥스퍼드대학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도 '문서위조학과(a major in document forgery)'가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송강호의 이 대사가 새삼 기억을 소환하는 까닭은 법무장관의 부인이 '직인'까지 받아놓고 대학 표창장 문서를 위조한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정에게 건네진 문서위조학과라는 칭찬은 이제 현실적인 인물에게로 돌아가야 할 판이 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놀라울 텐데, '기생충'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위조한 서울대 대학증명서를 지니고 과외 면접을 보러 가는 장남인 재수생 기우(최우식)는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혹시 이 영화의 첫 예고편을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기우의 저 말이 떨어지자, 내레이터가 불쑥 등장해 "그건 엄연한 범죄입니다"라고 반박한다. 예고편은 예비관객들의 재미와 흥미를 돋우기 위해 천연덕스런 기우의 말에 재치있는 토를 달아준 것이다. 

이 대목은 법무장관 부부가 어느 대학총장에게 했던 전화통화의 내용을 리얼하게 유추하도록 해준다. "우리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급하게 관련 당사자인 총장을 설득해야 했을 심정을 생각해 본다면, 이런 정도의 해명은 완곡한 편에 속했으리라. 

'위조'의 백미는 기우의 다음 대사에 있었다. "전 내년에 꼭 이 학교 학생이 될 거거든요." 지금은 비록 가짜 '재학생'이지만, 내년에 입학하면 위조가 아니라는 억지논리다. 최근 법무장관과 관련해 불거졌던 누군가의 '인턴 예정증명서'가 떠오르기도 하는 대목이다.

아들 기우의 말을 개봉 당시 영화로 들었을 때는, 그냥 어이없는 자기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쟤가 정상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다시 들어보니, 저 말에는 심각한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결여가 엿보인다. 아버지 기택이나 아들 기우는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야말로 1도 없다. 오직 집안을 일으키고 삶을 개선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들 가족 내에서는 그 수단을 활용하는 솜씨에 대한 '문서위조학과' 같은 칭찬이 있을 뿐이다. 

봉준호가 영화 제목을 '기생충'이라고 붙인 것은 기생충의 바깥에서 보는 경멸의 시선과 기생충의 내면에서 보는 '생존'의 시선을 동시에 지니고 겹눈으로 영화를 바라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관객은 기생충이 되었다가, 기생충의 무서운 생리에 놀라 그 몸체에서 빠져나와 그것을 경계하며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우린 이 경험을 광풍처럼 뉴스를 휩쓸어온 '조국 소용돌이' 속에서 체험했다. 

부자와 빈자, 승자와 패자가 양쪽 진영이듯, 최근 심화된 진보와 보수의 갈등 또한 서로 섞이기 어려운 진영의 격한 다툼 양상을 보인 게 사실이다. 인간과 기생충의 진영 속에서 기택이나 기우가 하는 말은 그들 내부에서 아무런 문제의식이나 통증 없이 유통되지만, 그 바깥에선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상식적이고 이상하다. 그들이 이런 '죄'의 결과로 응징을 받게 될 때조차도, 그들은 '기생충' 진영의 패배로 당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며 독자적 삶도 아니다. 오로지 '무리'의 한 개체이며 하나의 '입'이다. 당연히 독립적 인간으로서의 반성이나 후회 따윈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위조와 범죄' 그 자체에 대해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대하는 진영적인 인식을 걱정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상식적이고 독립적인 한 주체로서의 사고와 판단이 멈추는 순간, '기우'가 탄생한다. 집단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선 '자잘한' 위조나 범죄 따윈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숙 여사와 함께 지난 6월 23일 영화 '기생충'을 관람했다. 한번 더 본다면,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일지도 모른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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