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칼럼] 극일,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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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전 KOTRA 베이징·상하이 관장
입력 2019-08-1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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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와 내부 시스템·프로세스에 대한 근원적 처방 필요 -

김상철 전 KOTRA 베이징·상하이 관장

글로벌 시장에서 영원한 절대강자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강자에게 시장에서 패권을 넘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S'와 ‘L' 브랜드는 가전제품 글로벌 매장의 한 귀퉁이에 진열되어 소비자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시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 전자 상가에는 일본 전자 제품을 사려는 한국인들로 늘 북적거렸다. 일본 브랜드를 능가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난공불락의 철옹성과 같았다.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 브랜드 간의 역전이라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본 메이커들의 1등 사수를 위한 지나친 집착과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얄팍한 상술이 오히려 2등에게 반전의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일본인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전 브랜드의 몰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참 뒤떨어진 2등 한국 브랜드에 추월의 빌미를 제공한 자만과 독선 경영에 대한 반성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제조 원천기술을 비롯해 자동차, 로봇, 2차전지, 공작기계 등 핵심 분야에서는 여전히 우리보다 월등한 우위에 있다. 일본 소비자들의 한국 상품 외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작년 일본에서 팔린 한국차가 고작 5대에 불과했을 정도다.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 살고 있는 교민이나 주재원들까지도 일본차 구매를 더 선호한다. 반면에 일본차는 한국에서 무려 4만대 넘게 팔렸다. 서글프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인뿐만 아니고 중국인들까지 일본 상품 구매에 열을 올린다. 입으로는 반일(反日)을 외치지만 행동은 정반대의 양상이다. 일본 상품 혹은 관광의 매력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잘 헤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소비자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한 상품 기획과 기술력, 그리고 아날로그적 세심한 배려 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중·일간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약 2년 동안 중국 소비자들의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했다. 지금은 완전히 딴판이다. 중국 소비자들의 일본차 구매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고, 화장품은 한국산보다 더 잘 팔린다. 관광도 한국을 외면하는 대신 일본의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일본과의 갈등으로 한국에서도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거세다. 언제까지 갈지 모르나 당분간은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술 더 떠 정부는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원천 기술 투자를 늘리고 관련 기업에 대해 우대하겠다고 아우성이다. 우리의 정확한 주소를 되돌아보고 내부 환경을 근원적으로 정비하는 계기가 된다면 기대해볼 만도 하다. 그러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다시 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적지 않다. 기개만 있고 디테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글로벌 먹거리 경쟁에서도 우리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후하지 않다.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고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먹튀와 좀비만 양산, 결국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날 수도 있다.

일본의 위협이 치명적인 것은 그들이 우리의 아킬레스건을 꿰뚫고 있기 때문

숲을 보려면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글로벌 기업들 간의 ‘오픈 비즈니스(Open Business)’가 대세로 정착되고 있다. 개별 기업의 경우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가치에만 특화를 하고 나머지는 모두 외부로부터 아웃소싱을 한다는 취지이다. 심지어 가치사슬의 가장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기술과 아이디어 부문도 외부에서 조달하는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에 이르기까지 아웃소싱은 전방위로 확대되고 있다. 각각의 강점을 가지고 소재·부품, 중간재, 완제품 등의 단계적 가치사슬에 참여함으로써 파이를 키우고 나눈다. 그렇지만 이 사슬의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영향력과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 기업들은 원천기술을 배경으로 가치사슬의 업스트림 부문인 소재·부품에 위치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미들스트림 부문인 중간재에, 중국 등 기타 개발도상국들은 완제품을 생산하는 다운스트림 쪽에 포지셔닝을 하고 있다. 가치사슬의 하단으로 갈수록 경쟁자들이 많고, 사슬에서 이탈될 확률도 높아진다. 최근 미·중 무역 전쟁에서도 기술이 전면에 부각하고 있는 것은 중국이 가치사슬의 위쪽으로 치고 올라오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시키고 인도 혹은 동남아로 대체하려 한다. 일본이 경제보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기술 냉전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상단에 위치하는 중소·중견 기술 기업을 키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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