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뉴스인문학]하늘이 문(文)을 버리는가, 사문난적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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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8-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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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노동신문]


# 하늘이 내게 문을 줬는데, 사람이 나를 죽이겠는가

공자가 광(匡)이란 마을에서, 포악했던 노나라 장수(양호)로 오해를 받아 마을사람들에게 포위를 당했다. 양호가 광마을을 침략했을 때 공자의 제자(안각)가 양호를 수행했는데, 이 안각이 공자와 함께 마을에 들어오자 두 사람을 착각한 것이다. 사람들은 공자를 죽이려 했다. 공자는 순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때, 이런 말을 한다.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문왕기몰 문부재자호?
天之將喪斯文也, 천지장상사문야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후사자부득여어사문야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천지미상사문야, 광인기여여하?

다급한 말이었을 것이다.

"주나라 문왕이 이미 죽었지만, 문(文)은 이 몸에 있지 않은가?"

공자가 이 말을 한 것은, 그가 문왕이 남긴 '문(文)'을 지속하고 번성시킬 미션을 맡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절박한 가운데 왜 이런 말을 꺼냈을까. 광나라 사람들은 자신을 모르기에, 쉽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들의 자비와 분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공자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이 문(文)을 문왕이 죽은 뒤에 없애고자 했다면, 후세 사람인 내가 이 문(文)에 들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하늘을 거론한다. 내가 보통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죽이는 일이 하늘로서도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문왕 이후에도 하늘이 유지하도록 바라고 있는 문(文)을 지키는 사람이다. 하늘이 문(文)을 유지하는 일을 바라지 않는다면 나를 죽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문왕이 죽은 뒤에 아예 문(文)의 전승 자체를 없앴을 것이다. 하늘이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문을 지키는 나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공자는 특유의 삼단논법으로 이렇게 결론을 낸다.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지 않는데, 광마을 사람들이 나를 어쩌겠는가."

하늘이 나를 죽일 수 없는데, 사람이 어찌 나를 죽일 수 있겠는가. 급박한 상황에서 터져나온 공자의 이 말은, 임기응변의 말이 아니라 평소에 깊이 생각하고 있던 심연의 의식을 발설한 말로 볼 수 있다.

# 공자의 종교는 '평화의 텍스트'인 문(文)이었다

공자가 믿는 '하느님'은,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과 어떻게 다를까. 예수는 하나님과 모든 것에서 일체(一體)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만, 공자의 하느님은 오직 그에게 '문(文)'의 전승만을 지시한 존재다. 공자는 하느님과 동격도 아니며 그의 완전한 지지와 신뢰를 받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문(文)이 하늘이 원한 바임을 알기에 문(文)을 믿는 것일 뿐이다. 하늘은 공자를 아들로 삼지 않았고, 인간 중에서 자신의 가치인 문(文)을 전파할 메신저로 공자를 택했다. 논어의 '자한(子罕)편'은 공자의 신앙과 하늘의 관계를 드러낸 의미심장한 챕터다.

공자가 엉겁결에 세번이나 반복해서 말한 '사문(斯文)은 무엇인가. '사문'으로 말한 것은 세번이지만, 문왕과 '문(文)'을 거론한 앞의 것을 포함하면 다섯번이나 된다. 공자는 주나라 문왕을 완벽한 문(文)의 실천자로 보았다. 그 칭호가 문(文)왕이라는 점도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문왕의 문, 이것이 뒤에서 표현하는 '사문(斯文)'이 가리키는 것이다. 혹자는 '사문'을 this culture로 풀어 설명하지만, 문(文)은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문(文)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영어에서 가장 가까운 말을 나더러 고르라면, text를 택하겠다. '사문'을 영어로 풀면 the text가 적절할지 모른다.

문왕의 문(文)이 의미하는 것은, 세상의 전쟁과 살육과 탐욕과 증오를 부추겨온 무(武)의 폭력들을 제어하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자는 철저히 '텍스트(text)'로 기록되고 정리된 시스템에서 온다고 믿었다. 그는 인간 내면에 이 텍스트를 기입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으며,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인간의 행위와 욕망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꿈꾼, 문왕의 성(聖)은 이 텍스트를 내면화하고 확장하고 실천으로 이끌어 '전쟁과 폭력과 비명횡사 없는 세상'을 만들어내는 리더십의 귀감을 의미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공자가 '무(武)'를 아예 폐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다. 다만 '무'에, 문(文)이 지닌 이성과 분별을 달아주겠다는 생각이었다.

#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 전부를 가리키는 말, 사문(斯文)

공자가 '사문'을 말한 다음부터, '문(文)'은 그 자체가 하나의 신앙처럼 여겨졌다. 유학이 말하는 수많은 개념들은, 저 '문' 한 글자 아래에서 모두 고개를 숙인다. '문'의 정신은, 공자가 업그레이드하고자 한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꿈을 담고 있다. 공자가 주문한 수많은 언설들은 '문'을 담은 텍스트이며, 문의 사용설명서이다.

성호 이익은 퇴계 이황의 언행록 '이자수어'를 펴내면서 "퇴계의 언행은 사문의 맥을 부지하였다"고 말한다. 사문은, 공자가 말한 유학의 핵심 가치를 상징하는 말이 됐다. 이 공자말씀의 해석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겼을 때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말이 등장한다. 박세당과 윤휴가 주자의 해석과 다른 경전해석을 내놓자 송시열은 이들을 사문난적으로 칭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한다. '사문'은 공자가 말씀하신 '원천적 취지'이며, 난적은 그것을 엉뚱하게 해석하여 어지럽힌 도적같은 놈이라는 욕설이다.

문왕의 The Text. 하늘이 내린 극무(克武)의 교범. 사문(斯文)에는 이 땅의 선비들이 수천년 동안 죽기살기로 지키려 했던, 삼엄한 '문(文)'의 신앙이 들어있다. 이윽고 전쟁과 갈등 없는 세상을 꿈꾸던 문왕과 공자의 '문'이 끊기고, 사문난적이 창궐하는 세상으로 다시 바뀌고 있는가.

# 사문난적이 창궐하는, 글로벌 정글

동북아는 정글이 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은 저마다 국가이기주의에 기반한 계산서와 국력을 들고 상대를 제압하는 일에 골몰한다. 트럼프와 시진핑과 아베와 푸틴과 김정은. 호전적인 이를 드러내고 근육을 세우고 무기를 돋우며 춘추전국으로 귀환하는 장수의 이름들이 날마다 뉴스에 출몰한다. 그 가운데 이 나라의 평화적 운신(運身)은 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어렵게 되어간다. 그들과 비슷해져야 살 수 있다는 현실적 대응론이 튀어나온다. 호전성과 적개심이 애국이나 용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공자가 요즘 한반도를 본다면, 광마을 사람들 만날 때보다 더 떨지 모른다. 글로벌이 온통 '광마을'의 살의로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하늘이 문(文)을 버리는 것인가. 이 와중에 평화를 말하는 자는 비웃음을 사기 십상이다. 사문난적은 너무나 드세고, '문'은 속수무책에 빠진 듯 하다. 현실적 생존법칙을 묻는 제자들 앞에서, 공자가 부르짖었던 평화의 텍스트, 문(文)은 날마다 조롱당하는 형국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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