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익 칼럼] 법이 정의롭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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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익 사회부 부장
입력 2019-07-2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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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법과 정의에 관한 한·일의 시각차



 

법은 항상 정의로운가. 

법원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는 건 그렇지 않다는 방증이다. 법과 정의의 괴리는 대체로 시간과 공간, 개인에 따라 정의의 해석이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사회체제인 법은 관념인 정의의 다양성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모든 경우의 수를 담아내지 못한다.

문학 속에선 법의 부조리에 대항해 자신의 정의를 지킨 주인공이 영웅이 된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대표적이다. 안티고네는 오빠를 반역죄로 몰아 죽이고 들개 먹이로 내던진 삼촌 크레온 왕에게 저항한다. 크레온 왕은 반역자를 매장하지 못하게 한 법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안티고네는 이미 절반이 물어뜯긴 시체에 모래를 뿌리고 장례를 치른다. 가족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는 건 법을 넘어선 신의 율법이라고 믿어서다. 안티고네는 사형을 당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주인공 장발장은 조카에게 먹일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옥살이를 한다. 장발장은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된 사회 부조리의 희생양이지만 법은 이를 고려할 만큼 자비롭지 않다. 시장이 된 장발장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자베르 경감에게 “나는 빵 한 조각을 훔쳤을 뿐"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사회를 전혀 모르지 않소"라는 장발장의 절규에 자베르는 대답한다. “나는 법을 다루는 일을 할 뿐”이라고.

문학이 크레온 왕이나 자베르가 아니라 안티고네와 장발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기존질서보다 그에 대한 저항이 더 드라마틱해서다. 안티고네와 장발장은 다른 시각으로 보면 어쨌든 범법자다.   

역사에선 부조리한 법을 수호함으로써 영웅이 된 이도 있다. 젊은이들을 현혹했다는 죄로 독배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소포클레스나 빅토르 위고와는 다른 법과 정의에 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는 법원의 판결이 과도하며 그 과정이 모함에 의해 왜곡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탈출의 기회를 포기한다. 그는 부정한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인의 정의보다 폴리스라는 공동체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현실에서 보자. 최근 일어나는 많은 국가간 갈등은 이같이 법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강제노동 배상판결을 둘러싼 한·일갈등이 그렇고, 핵협정과 관련한 이란과 서방세계의 분쟁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갈등의 공통점은 국제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 협정을 어느 한쪽이 깨는 게 발단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 당시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을 번복했다. 강제 징용 노동자 개인에 대한 배상이 빠진 국가간 협정은 정의롭지 않기에 이를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게 문재인 정부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란과 맺은 핵협정을 깼다. 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와 독일 등 6개국과 이란 간에 맺어진 이 협정은 핵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하는 게 골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합의가 이란 핵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며 지난해 협정에서 탈퇴했다.

근대 민주주의 이후 통치자 입장에서 정의는 일반적으로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더 많은 유권자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게 이들 입장에서의 정의다. 안티고네와 장발장의 정의가 그들의 가족이란 틀 내에서의 개념이라면 국제법에 저항한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의는 자국 국민, 즉 국가를 단위로 한다. 

문제는 문학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상대의 입장에서는 정의에 대한 해석이 정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와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협정위반을 명분으로 강력한 보복에 나서는 건 문재인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그들의 입장에선 어쨌든 협정을 위반한 범법자여서다. 우리에겐 아베가 크레온 왕이나 자베르 경감처럼 악역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시각에선 정의의 수호자다. 

똑같이 협정을 깼지만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정부 사이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이란의 반발을 컨트롤할 힘이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국제관계에서 정의를 지키는 건 힘의 문제다. 

문화적 상대성 관점에서 법과 정의를 보는 시각도 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한·일 갈등은 법과 정의를 대하는 양국의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의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이고, 일본은 사무라이의 국가였다. 그 결과 한국은 이(理)의 나라이고 일본은 법(法)의 나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치에 맞지 않으면 법원의 판결도 뒤집을 수 있다. 일본은 법으로 정해지면 따라야 한다. 설령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도 지키는 게 정의다.

김 교수의 이 같은 시각은 문화적 상대성을 근거로 양비론을 펴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일 갈등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풀기 위해서는 이 같은 상대성을 우선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의 골자다.

경제·군사력에서 미국의 상대가 안 되는 이란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서는 것은 쿠란에 나오는 키사스란 율법이 배경이란 분석도 있다. 키사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비례 대응 원칙이다. 상대가 눈을 뽑으면 눈을 뽑고, 가족을 죽이면 그의 가족을 죽이란 것이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과 일맥상통한다.

최근 영국령 지브롤터 당국이 유럽연합(EU) 제재를 위반했다면서 이란 유조선을 억류하자, 이란은 영국 유조선 억류로 맞대응했다. 

알리 라리자니 이란 의회 의장은 이에 대해 "영국의 도적질을 그대로 돌려줬다"라고 했다. 키사스 율법에 따른 대응이란 것이다. 미국이나 EU가 이 같은 율법적 배경을 무시하고 이란을 힘의 논리나 국제법으로 굴복시키려 한다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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