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반도체 반사이익 챙길 한일 분쟁, 트럼프가 말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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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위원
입력 2019-07-1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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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 중공업에 대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한일협정의 효력을 둘러싼 양국 갈등의 진원이 됐다. [<연합뉴스>]

 3개 핵심소재에 대한 일본의 수출 규제는 노림수가 많은 다목적 카드다. 우선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따른 신일철주금과 미쓰비시의 자산 압류와 매각 조치를 막고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 안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은 징용공 문제에서 무릎을 꿇으면 일제 강점기와 관련한 보상 논란이 위안부나 징병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의 ‘과거사 공세’에 넌덜머리를 내던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기업에 대한 한국법원의 자산압류와 매각이 집행된다면 화이트 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가 명단) 제외 같은 강한 조치로 맞받을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언론도 극우 반한논조의 산케이신문을 제외하고는 아사히 마이니치 니혼게이자이 신문 등이 아베 총리의 무역보복에 비판적인 사설을 실었다. 미국 언론도 사태 초기에는 사실관계 보도에 그쳤으나 뉴욕타임스(NYT)가 처음으로 침묵을 깼다. NYT는 아베 총리가 오사카에서 G20 지도자들에게 “자유무역과 개방경제가 세계평화와 번영의 기반”이라고 말해놓고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애매하고 불특정한 이유를 대며 한국의 전자산업에 들어가는 필수 소재의 수출을 제한했다”고 비판했다.
 일본은 한국의 수출 효자종목에 직격탄을 날림으로써 ‘일본한테 잘못 보이면 재미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 한·일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두 나라의 경제력 격차는 크게 좁아졌다. IMF가 산정한 PPP(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한국 4만1351달러, 일본 4만4227달러로 근접했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같은 산업에서는 한국이 압도적 우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한국의 1등 종목을 때리면 참의원 선거에서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한·일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일관계를 오래 담당했던 전직 외교관은 “대법원 판결의 집행을 유보하고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1993년 3월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제기한 ‘도덕적 우위에 따른 새 한·일관계 접근’을 예시했다.
 YS는 취임 직후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대수비)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내년부터 우리 정부 예산으로 보상하겠다. 그래야 도덕적 우위를 갖고 새 한·일관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YS의 대수비 발언은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제정(1993년 6월)으로 이어졌고, 일본도 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를 발표했다. 박근혜 정부 때 일본 정부가 100억원을 출연한 아시아 여성 기금을 통해 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시동을 걸었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이 합의를 파기했다. 친한파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양국 정부의 외교적 합의가 좀 부족해도 계승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한·일협정을 통해 징용공의 임금을 포함한 5억 달러를 받은 지 54년이 지났다. 정부는 5억 달러를 받아 포스코를 세우고 경부고속도를 건설하며 경제개발의 종자돈으로 썼다. 정부가 그동안 징용공에 대한 보상을 했다고 하지만 불충분했음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서도 인정됐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임금이 아니라 강제징용에 따른 정신적 피해 등 위자료를 원고 한명당 1억원씩 인정한 것이다.
 이번 징용공 판결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상고법원을 만들기 위해 징용공 판결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딜을 했던 사법 적폐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위안부 합의 파기 등 문재인 정부의 강경한 대일정책이 몰아치던 분위기에서 나왔다. 이제 와서 확정된 대법원 판결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사법외(外)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는 방안은 징용공 피해자나 유족에 대한 보상을 우리 정부가 떠안으면서 피해자와 유족을 설득해 대법원 판결의 집행을 중단시키는 것이다.
 한국이 돈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으로 비치면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우리의 입장이 떳떳한 마당에 제3국에 의한 중재나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를 마냥 거부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일본과 한국의 분쟁이 길어지면 결국 상호 파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두 나라의 테크 산업은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상호보완적이다. 한국이 반도체 생산과 연구에서 뒤처지면 그 빈 자리를 화웨이 등 중국기업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메울 것이다. 한국이 OLED 스크린 생산에 어려움을 겪으면 일본 기업들은 최고급 TV 세트를 생산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 악화는 중국에 유리한 지정학정 환경을 조성할 수밖에 없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견제했듯이 중국은 한·미·일 3국이 군사동맹과 경제협력을 통해 태평양 지역에서 자국의 군사력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전쟁이 결국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는 미국의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망이 길어질 수 없다는 관측도 있다.
 아베의 이번 무역보복은 트럼프의 중국 등을 상대로 한 무역보복 조치에서 배운 듯하지만 무역의존도가 높은 일본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자해협박 수준이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시진핑 중국 주석이 한국의 사드 배치를 이유로 중국 내 한국기업들에 대한 무차별 보복과 한국관광 중단 같은 조치를 한 것과 더 닮았다.
 우리도 차분하게 되돌아볼 대목이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일왕의 사죄 발언을 한 것이 최근 10여년간 한·일관계 악화의 시발이었다. 2012년 독도방문은 현직 대통령으로선 최초였지만 최악이었다. 징용공 위안부뿐 아니라 한국 국민 모두가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사람들도 정치적 민족주의 발언과 정책을 자제해야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도덕적 우위론은 현 시점에서도 유용하며, 김대중 대통령의 실용주의 한·일외교도 돌아볼 대목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문화를 개방할 때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컸지만 최근 방탄소년단의 일본 공연에서 보듯이 대중문화는 반도체와 OLED 스크린처럼 한국이 일본을 압도하는 분야가 됐다.
 세계 메모리칩 시장 점유율 63%인 한국이 타격을 받으면 글로벌 공급 체인에 문제가 생기고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굴기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것은 화웨이 이상으로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 일본이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시작하기 전에 미국에 설명했을 개연성은 있지만 아베와 트럼프의 ‘합작’이라는 시각은 미국 외교의 큰 그림에 맞지 않는 관점이다. 한·일 관계의 악화는 한·미·일 안보협력과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 참의원 선거가 끝나는 시점에서 한·일 분쟁의 조정자로 나서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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