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니엘 스페셜칼럼] 징용공, 경제, 사회정의

노다니엘 아시아리스크모니터(주) 대표이사, 정치경제학박사 입력 : 2019-07-04 05:11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차이에 따른 한일 갈등
 

[노다니엘]


한국에서 징용공 배상에 관한 재판이 확대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일본 기업이 특정한 물질을 한국기업에 판매하지 않겠다는 것을 일본 정부가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접한 한국인의 첫번째 반응은 분노일 것이고, 그 분노가 가라앉으면 궁금증이 몰려올 것이다. 일본 정부가 무슨 아프리카의 부족통치기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몰상식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반도체생산물질이라면 외교나 국방이 아닌 시장의 이야기가 아닌가?

일본과의 관계가 날로 악화하는 상황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내력을 밝혀 새로운 것을 통찰하는’ (温故知新) 기회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현재 한국에서는 과거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노무자로 끌려간 ‘징용공’ 피해자나 그 후손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수십건의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이 소송이 더 활성화된 계기는 2018년 10월 30일에 있었던 대법원의 판결이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들이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고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고등법원의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나아가서, 1965년에 맺어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별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한 것으로 볼 수도 없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판결에 일본 기업과 정부는 승복하지 않고,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따져보자는 반론을 제기하더니, 나아가서 기업을 통한 보복에 해당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자세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인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한국이 돌아설 수 있는가? 그렇지가 않다면, 일본 정부의 생각을 정확히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중립적인 입장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는 작금의 사태를 두 가지 차원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매크로한 것으로서 국가간의 차원이고, 또 하나는 아베정권 차원이다.

1910년의 조선 병탄 이후 군국주의의 길을 걸은 일본은 1937년에는 중국을 상대로, 그리고 1941년에 미국을 상대로 커다란 전쟁들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동원되어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전쟁시설에서 노역을 하였다. 그 사람들이 ‘징용공’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이 ‘그 사람들이 정당하게 보상을 받았는가’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한일기본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해결이 되었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 주장의 근거는 이 조약의 제2조1항으로 다음과 같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1951년 9월 8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

전후 내내 한·일관계를 규율하던 이 조약의 효력을 뒤집은 것이 위에서 말한 2018년의 대법원 판결이다. 동 판결은 국가 사이의 재산권청구협정은 그렇다하더라도 개인의 청구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결을 존중하며, 최고통치자를 포함하여 행정부나 입법부도 사법부의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위화감을 느끼며 반발한다. 일본을 연구하고 관찰한 입장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법이나 조약 등의 인간 사이의 협정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과 태도에 있어 한·일 간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법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복종의 전통이 있다. 내부적으로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범인 오키테 (掟)에 대한 승복이고, 이것이 국가적 차원에서는 법과 조약이라는 도구에 대한 승복이다. 특히, 아시아에서 일찍 개화하여 서양과 교류한 일본은 ‘약속은 지켜져야한다’ (pacta sunt servanda)는 법격언을 생존과 발전의 황금칙으로 활용하였다. ‘조약국’이라는 조직이 일본외무성에서 가장 엘리트 집단이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노다니엘 대표 제공]


이에 반하여, 한국의 역사에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사회적 관념이 강하다. 따라서 법이나 조약이 일본인에게 교통신호와 같은 ‘생존의 도구’라고 한다면, 한국인에게는 법 조문 그 자체보다도 그 이면에 바탕이 되는 정신성이나 윤리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법감정’이라는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힘이 재판을 좌우하는 풍토는 이러한 배경에서일 것이다.

한국에는 법이나 약속을 동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의라는 추상적인 토대 위에서 운용한다는 풍토가 있기에, 법과 약속을 사정의 변경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할 수도 있다. 나아가서 그 내용이 군대를 위한 성노예라거나 강제노역이었다면, 인류의 강행규범에 어긋나는 것이고, 따라서 법의 기계적인 적용은 오히려 회피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또 하나는 국가사회의 연속성과 통일성에 대한 관념의 차이이다. 1965년에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맺은 협정은 그 정부의 구성원이 바뀌어도 계속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역사관이다. 일본이라는 정치적 공동체는 연속성을 가진 동일체이고, 따라서 설혹 50년 전에 맺은 협정이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불완전한 것이라도, 협정은 그대로 지켜져야한다는 교조적인 태도를 일본사회, 따라서 그곳에서 탄생한 정권은 가지고 있다. 아베 정권은 이 경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한국의 입장을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비난함에 있어 두드러질 뿐이다.

한편, 한국사회에는 ‘민심은 천심’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기억이 있다. 천심(天心), 즉 governing mechanism은 당시 사회 구성원의 다수의사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에는 혁명과 정권교체가 왕성하고, 과거의 왕실 또는 정권이 맺은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 정의로울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65년에 우파 군사정권이 ‘졸속으로’ 맺은 일본과의 협약은 안 지키는 것이 정의롭다는 판단을 지금의 ‘촛불정권’이 가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이는 일본에서 본다면 사회의 연속성과 통시간적 일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러한 바탕 위에 있는 한국에서의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작금의 한·일 간의 갈등은 국익의 계산에 따른 갈등이 아니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차이에 따른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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