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AI 비서 시대? 끄떡없는 휴먼 비서!

이승재 논설위원입력 : 2019-06-19 10:09
4차산업혁명 시대…AI 비서 vs ‘휴먼 비서

<이승재 칼럼-지·여·당>은 현 시대(지금), 삶의 현장(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당신)을 톺아보는 칼럼입니다. 기획취재는 '지금', 현장르포는 '여기', 인터뷰에선 '당신'을 크게 씁니다.

“00야 오늘 날씨 알려줘” 매일 새벽 출근 전 거실로 나가 이렇게 '지시'한다. 곧바로 청아하고 낭랑한 목소리의 여성이 “네, 오늘은 비가 와요. 우산 준비하세요.”라고 상냥하고 공손하게 답한다.

필자는 2년 전부터 개인비서를 두고 있다. 단 얼굴은 없고 목소리만 들을 수 있다. 왜냐면 그는 인공지능(AI) 스피커 안에 있기 때문이다. 가입한 통신사에서 준 AI스피커를 인터넷TV(IPTV)와 스마트폰에 연결했더니 ‘램프의 요정’같이 나만의 비서가 홀연히 등장했다. 외출 전 날씨 확인부터 약속·알람 등 일정을 알려 주는 건 기본, “좋은 노래 들려줘”라고 말하면 내 취향의 음악까지 알아서 선곡해 들려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누구나 개인비서를 곁에 둘 수 있다. SK, KT, LG 등 통신회사의 AI스피커는 물론 삼성 빅스비, 애플 시리, 구글 어시스턴트 등 많은 IT 기업들이 내놓은 인공지능비서가 맹활약 중이다. 앞으로는 음성 뿐 아니라 움직이는 로봇 비서의 등장도 머지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진짜 사람 비서, 휴먼(Human) 비서는 어떻게 될까. 한국비서학회를 통해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휴먼 비서들을 만났다. AI비서, 로봇비서가 그들의 직업을 위협하고 있을까? 정말로 비서는 없어질 직업일까?

[사진=전성희 제공]


◆40년 경력 ‘명품비서’ “비서 포에버”
2008년 <성공하는 CEO 뒤엔 명품비서가 있다>는 책을 펴내 큰 화제를 모았던 전성희 대성그룹 회장 비서(이사)는 여전히 비서다. 지난 40년간 대성그룹 비서로 일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장수 비서’, ‘비서계의 대모’다. 10년 전 책을 출간한 뒤 '비서 출신 첫 스타'가 됐지만, 이내 본업으로 돌아갔다. 몇 년 전부터는 언론사 취재 요청도 정중히 거절하고 후배 비서들과 비서업무에 충실하고 있다. 사실 필자는 전 이사가 비서 업무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40년이라는 것을 처음 알고 난 후 대형·단독 인터뷰를 청했지만 그는 "아유, 아휴"하고 웃으며 고사했다.

그런 그가 “AI시대 비서의 미래에 대해 묻고 싶다”는 요청에는 선뜻 말문을 열었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후배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승락한 듯했다. 전 이사는 대뜸 필자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AI 시대를 맞아 비서의 역할, 지위가 흔들린다는 취지의 취재라고 들었습니다. 근데 그게 맞아요?”라고. 그러면서 전 이사는 사람 비서, 휴먼 비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비서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손님 접대, 전화 응대, 일정 관리, 수행원 역할 등이 있죠. 그중에서 IT, 디지털이 할 수 있는 건 일정관리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손님이 오시면 커피는 누가 들고 가겠어요. 로봇 비서요? 로봇이 커피를 내오는 것 보다 미소 지으면서 ‘드셔보시겠어요’라고 상대방 마음을 읽으면서 해야지요. 그걸 로봇이 어떻게 하겠어요. 그리고 전화가 왔을 때 분위기와 상황을 잘 판단해서 ‘회장님 안계십니다’라고 거짓말을 할 때도 있는데, 로봇은 할 수 없죠. 제가 조만간 은퇴할 때 비서로서 가져야 하는 정성이나 진심어린 마음, 임기응변 같은 비서의 기본을 AI, 로봇에게 넘겨줄 수도 없고, 가르쳐 줄 수도 없죠.”

전 이사는 비서의 업무는 커피 잘 타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한다. “비서 스스로 내가 타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자부하면 자신감이 생긴다.”면서. 1979년 대성그룹 입사 이후 커피에서 비롯된 그 자신감이 40년 뒤 ‘나 같은 할머니도 최고경영자(CEO)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뀐 거다. 낭랑하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는 외친다. “휴먼 비서, 포에버!”
 

[사진=서유정 제공]


◆경력 20년차 비서 “AI 비서는 내 부하”
중견 해운사에서 일하는 서유정 차장은 비서 경력 20년차,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많은 일을 거뜬히 잘 해내고 있는 능력자다. 서 차장 입사 후 지난 8년 동안 회사는 매출 1조원을 바라볼 정도로 등 외형·내실이 동반 급성장했다. 때문에 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소화해야만 하는 ‘멀티플레이어 비서’가 됐다. 그는 AI시대, IT기술 발달이 자신의 비서 업무 역량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말한다.

“시공간에 대한 제약이 없어졌어요. 스타벅스에 커피 몇 잔을 사러 갔는데, 기다리면서 모바일기기로 견적계산을 할 수 있으니까요. AI 비서요? 비서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요. 비서는 모시는 분과 파트너 관계입니다. 보좌관처럼 모든 걸 다 관여하거든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 일도 많고요. 그래서 AI비서가 도리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일정 관리 같은 단순한 일들을 AI가 해준다면 저는 더 고차원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서 차장은 AI비서가 과연 어디까지 발전할지 자못 궁금하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 그는 AI, 4차산업혁명시대, IT 기술을 비서 업무에 잘 활용하고 있다.

그와의 인터뷰 이후 미래 AI 비서와 휴먼 비서가 서로 경쟁하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상호보완, 역할 분담을 하는 ‘상생(相生)의 게임’을 할 거란 그림이 그려졌다.
 

[사진=이명근 제공]


◆입사 2년차 男 비서 “내 일자리는 확고”
이명근 비서는 회사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홍보팀 지침에 충실했다. 모시는 CEO와 회사 보다 자신이 부각되는 걸 다소 부담스러워 하는 느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젊고(28세) 잘 생긴 친구는 자신의 비서 일에 대해 큰 프라이드와 강한 확신을 가진 직업인이었다.

이 비서는 인하대학교 항공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다시 전문직 비서의 꿈을 꾸고 나사렛대학 글로벌비서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지난해 10월 중견업체에 비정규직 수행비서로 입사한 그는 ‘모시는 분’의 고속승진과 함께 정규직으로 전환된 케이스. 운전, 의전, 경호 등 이른바 비서의 6대 수명업무를 홀로 하고 있는 신참 비서다.

이 비서는 AI 비서, 로봇 비서 시대에 직업으로서의 비서라는 가치가 더욱 소중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많은 직업이 기계에 대체되는 시대가 오면 기업이 노동의 질을 따질 겁니다. 사람이 능률이 높지 않고 능력이 없으면 바로 잘리는 시대에서 회사의 가장 중요한 CEO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대체될 수 있을까요? CEO와 비서는 사람 대 사람의 입장으로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비서 업무가 즐겁고 보람있습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CEO와 비서는 일을 함께 하는 파트너 관계다. AI 비서, 로봇 비서가 등장해도 사람과 사람의 일에는 대체 불가능한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일자리로서 휴먼 비서는 그가 모시는 분의 진퇴와 무관하게 그 분의 ‘자리’가 없어지지 않는 한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거꾸로 AI가 CEO인 회사, 로봇이 CEO가 되는 미래의 시대가 온다면? 휴먼 비서는 더더더 중요하고 책임있는, 파워풀한 자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P.S 한국비서학회 심재권 회장(위 사진) 인터뷰
Q. 현직 비서들 인터뷰 결과, AI 비서가 등장했음에도 도리어 사람 비서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A. AI 비서가 스마트폰이나 스피커 정도로 이용되는 상황이라 아직은 현실적으로 우리한테 와닿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AI 비서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다. 비서라기 보다는 우리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조수의 개념이다.
Q. 비서학회에서 마련한 관련 학술대회에서는 어떤 얘기가 나왔나?
A. 4차 산업혁명, AI 시대 비서역량 강화, 특히 AI를 통한 일정관리를 주로 다뤘다. 현재 관련 부분들이 구글로 지원되고 있는데 CEO가 이를 능숙하게 다루기엔 어려운 면이 있다. 이를 활용하면 일정업무 외 다른 업무에 더 전념하게 된다.
Q. 로봇 비서 얘기가 나왔는데 로봇 비서를 컨트롤해야하는 역할도 필요하니 오히려 사람비서 역할이 커진다는 얘기도 있다.
A. 의사가 수술을 할 때 부족한 부분을 로봇의 정확도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인 부분이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서와 CEO와의 관계에서 로봇 비서가 그런 감정적인 부분들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AI 시대가 오면 ‘젊은 여비서’ 프레임에서 벗어나, 남자들은 물론 나이 든 각계 전문직 경력자가 제2,제3의 직업으로 비서를 택하는 트렌드가 생길 거다.
Q. 비서학이라는 말은 익숙치 않다.
A. 그렇다. 비서학은 일종의 관리학, 매니지먼트 분야다. 요즘 외국에서는 비서라는 말은 잘 안쓴다. 비서학과라는 이름도 많이 바꾼다. 대학들이 학과명을 글로벌비서학과, 국제비서학과, 국제사무학과라고 쓴다.
Q. 비서학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나.
A. 대학에서 사무역량을 가르치는 곳이 많이 없는데 비서학과는 다르다. 문서관리, 사무정보 등을 가르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만큼 커뮤니케이션과 인간관계론 등을 가르친다. 외국어 포함 언어능력도 필수다. 자료를 분석하고 의미를 찾는 능력도 중요하다. 이전에는 정보를 빨리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지만 요즘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누가 가치 있는 정보를 찾아내는지, 즉 정보 필터링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빅데이터 분석도 가르친다. 보고서 작성, 프리젠테이션, 서비스 매너 같이 졸업하고 바로 실무에서 필요한 다양한 내용을 습득한다.
Q. 졸업하면 어느 분야로 진출하나.
A. 정말 다양하다. 전문비서로 가는 졸업생은 물론 일반 사무직, 매니저, 로펌, 병원으로 가기도 한다. 공기업, 공무원, 일반 기업도 선호한다.
Q. 젊고 예쁜 치마 입은 여자들이 차를 내오는 비서의 시대는 끝났나?
A. 그렇다. AI시대가 오면 더 그럴 거다. 오너리스크 때문에 기업 주가가 폭락하고 흔들리는데 이걸 예방할 수 있는 건 역량있고 경험이 풍부한 비서들이다.
Q. 청와대의 비서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A. 동양에서 비서의 다른 말은 후설(喉舌)이다. 목구멍의 혀라는 뜻이다. 그 만큼 자기 목소리를 내선 안 된다는 건데, 언제부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비서들이 많아졌다. 그건 스스로 좋은 비서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셈이다. 비서는 자기가 모시는 사람의 2인자가 되어야 한다. ‘비서는 입은 있으나 말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청와대에서 비서를 하려면 먼저 교육을 받아야 할 거 같다.
Q. AI 비서시대에 대한 전망을 종합 정리하면.
A. 비서라는 직업이 갈수록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사실 CEO의 문제점은 비서가 어떻게 커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비서들이 잡무에 시달리느라 중요한 부분을 보좌하는데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AI 기술 등장으로 비서들이 잡무 보다는 더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게 됐다. 문제해결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을 가진 비서의 일자리 전망은 더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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