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시를 오독해, 친일 누명쓴 독립투사 동농 김가진의 통곡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5-21 15:01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동농 김가진(1846~1922)은 조선말 외교관으로 청나라 · 러시아 · 일본 사이에서 구국외교를 펼쳤다. 국망(國亡)에 이르러 항일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국가주권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 독립만세시위 비밀조직 대동단 총재를 결성했고 그해 10월에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한다. 조선의 고위관리였던 그의 임정 참여는, 초기 정부의 명분과 존재감을 크게 높인 기폭제였다. 동시에 일제의 의도적인 임정 폄하를 일거에 불식시킨 대사건이기도 했다.

평생을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던 그에게, 두 개의 치명적인 꼬리표가 붙어 있다. 하나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제가 이 땅의 지도층을 포섭하기 위해 발표한 조선귀족령으로 그에게 남작(男爵)이란 귀족작위가 주어졌고, 그가 이것을 명시적으로 물리치지 않은 일이다. 같은 일을 당한 이들 중에서 작위를 거부한 경우도 있었기에 김가진의 침묵을 묵시적 동의로 해석하게 된다.

당시 저명인사이기도 했던 그의 다양한 행적들이 뉴스로 등장하면서, 그의 이름 뒤에는 일제가 부여한 남작이란 칭호가 붙여졌다. 항일활동을 펼치면서도 9년간 남작 작위를 스스로 나서서 폐기하고자 하지 않았던 그 태도에 '친일'의 딱지가 붙는다. 이 문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수도 있다. 비록 그것이 당시로선, 일제를 안심시켜 감시를 완화하면서 구국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략이라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이론의 여지를 모두 재우긴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다만 당시의 어떤 여론도, 그를 다른 친일 귀족들처럼 비판대에 올리지 않았다는 점은 상기해볼 만하다. 김가진이란 조선고관 출신이 보여지는 것과는 달리 물밑에서 독립을 위해 분투한다는 사실을, 그 시기에는 지금보다 더 분명히 더 다양하게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유추해볼 수 있다.

여기에 그의 '친일 혐의'를 결정적으로 돋운 시 한편이 발견된다. 이 시는 1908년 5월에 씌어진 '이토 히로부미 생일 축하 시'다.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를 찬양하는 듯이 보이는 김가진의 시는 유림 어용단체의 기관지인 '대동학회'에 실렸다. 한일 합병의 원흉인 이토를 향해 그는 왜 민족이 가슴을 쥐어뜯을 그런 행위를 했을까. 필자 또한 이 문제가 궁금했다. 지난 2월15일자에 아주경제 칼럼으로 실은 '동농 김가진이 이토를 조롱한 생일 축하시의 비밀'은 그 궁금증을 찾아나선 결과였다. 거기에서 필자는, 후세 사람들이 간과해왔던 몇 가지 문제들을 발견하게 됐다.
 

[동농 김가진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자료)]



첫째는 1908년이란 시기다.

1906년 이토가 조선으로 왔고, 1907년에 헤이그 사건이 있었고, 1909년에 안중근 의거가 있었으며, 1910년에 한일합병으로 치달았다. 이 시간적 맥락 속에 있는 '시의 함의'를 읽어야 한다. 1906년 이토는 을사조약에 따라 초대통감으로 부임했다. 영국 유학파이며 일본 헌법을 기획하고 메이지유신 시대를 연 이토는, 조선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장악하려는 일본내의 온건파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후 그는 통치방식을 180도 바꾸고 강제병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가진은 이렇게 달라진 이토에 대해 항의를 할 구실을 찾았을 것이다. 그 방식이 바로 '생일 축하를 가장한 맹렬한 추궁의 시'였다. 그 시는 김가진의 일본 외교관 시절, 그를 방문한 이토와 나눴던 '평화의 맹세'시에 대한 답가 형식이었다. 그땐 그토록 두 나라의 평화를 말하더니, 지금은 그걸 잊은 건 아니겠죠? 하는 힐문을 담은 것이었다.  안중근의사가 1909년 이토를 처단한 이유도, 그가 동양평화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국가를 침탈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항의였다. 

둘째는 1889년 시에 대한 독해 소홀이다.

동농 김가진은, 이중의 맥락을 감춘 1908년시에 대해 대중과 후세의 오해가 있을 것을 염려해서 이 시가 1889년 두 사람이 읊은 시를 떠올리며 쓴 답가 형식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밝혀놓았다. '생일 축하 시' 한편으로 읽으면, 단순한 찬양시처럼 보이지만 두 개의 시를 연결해놓고 그 시의 맥락을 살피기 시작하면, 이 시의 취지가 어디에 있는가가 금방 드러난다. 김가진은 이토가 이 시를 읽고도 반박을 하거나 불쾌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사실을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토는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시는 양국 공존의 평화를 말하던 사람이 돌변했음을 따지고 있는 시다.

칼럼을 올리고 난 뒤, 일부 독자의 질의가 들어왔다.  생일 축하시와 이전의 작별시를 연관지은 근거가 없다는 얘기가 있었고, 국화와 관련한 이견도 제기했다. 또 초지(初志)가 이토의 뜻이 아니냐고 묻는 질문도 있었다. 그에 대해 이 칼럼을 통해 답변을 하고자 한다. 

(1)생일 축하시와 이전에 지었던 작별시를 연관지은 근거가 없습니다.

- 있습니다. 詩中春色唱還酬(시중춘색창환수)
시 속에 춘색을 읊은 노래에 답가를 돌려드립니다(동농의 생일 축하시)

운을 맞췄다고 했는데, 운을 맞추려면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글자를 써야 합니다. - 운은 그야말로 운만 맞추면 됩니다. 같은 운을 쓰고 있습니다. 1889년 시는 맹(盟)과 성(城), 1908년 생일 축하시는 영(英) 정(精) 청(淸) 맹(盟) 영(盈)

생일 축하시와 작별시는 형식부터가 율시와 절구로 서로 다르므로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 율시와 절구의 차이는, 동농의 선택일 뿐입니다.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할 근거가 되기는 어렵습니다.

(2)국화 운운한 것은 이토의 생일이 10월(가을)이기 때문에 언급한 것 뿐입니다.

- 그럴 수는 있습니다만, 송나라 한기의 ‘구일수각’을 인용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老圃와 黃花가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죠. 송나라 한기가 이 시를 읊고나서 만절(晩節, 꿋꿋한 절개)을 보일 거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인용했다는 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지요.

(3)처음의 뜻[初志] 운운한 것은 동농의 뜻이지 이토의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 暮年出處慙初志(모년출처참초지) 행의 초지(첫마음)가 동농의 마음을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동농의 초지와 뒤행에 이토의 뜻(老謀)를 대비시켜놓은 것은, 이토의 마음을 슬쩍 걸고 넘어지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시행을 대비시킬 때는 다 뜻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해석을 무리한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관성적 해석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동농 김가진의 일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다. 역사의 저편에 있는 한 사람을 비판적으로 재단하는 일은 쉽지만, 그 비판에 올려진 무거운 돌을 내려놓는 '인식의 전환'은 참으로 어렵다는 점이다. 돌을 들기는 쉬워도, 그 돌이 진짜 옳은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김가진이, 당시의 상황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거나 소신이 묽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는 끝내 임정 활동을 통해 애국의 마지막 열정을 보탠 사람이다. "사람을 보려면, 그 끝을 봐야 한다"는 속담이 의미하는 뜻을 곱씹어볼 필요도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