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日난입 뒤 ‘피마른 수습책’… 동농, 갑오경장 208조를 주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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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기자
입력 2019-01-2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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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⑫ 농민군 핑계로 들어온 日… 국난에 맞선 ‘해결사의 고뇌’

[개화당은 농민군과 손을 잡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이었다. 사진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가운데).]



단재 신채호는 묘청(妙淸)의 난을 두고 “조선력사(朝鮮歷史) 일천년래(一千年來) 일대사(一大事)”라고 평한 바 있다. 민족사가 사대의 굴레를 쓰게 되는 변곡점(變曲點)이라는 뜻이겠다. 갑오농민전쟁은 자주(自主)와 예속(隸屬)의 갈림길이었다. 관군은 농민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농민군은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왜놈의 길라잡이로 나선 관군. 우금치에서 피를 뿌린 농민군. 이웃을 위해 항의해본 적이 없는 자들만이 망국의 역사를 피동태(被動態)로 서술한다.
조선의 농민은 외로웠다. 임금, 양반, 아전에, 심지어 공노비까지, 그들의 피를 빨아먹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농민의 체력을 바닥냈고,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은 그들의 정신을 층층시하 겹겹이 짓누르며 갉아먹었다. 이 땅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나라를 지켜 온 사람들은 누구인가. 갑오년의 농민군은 망각의 심연(深淵)에 봉인되어 있던 존엄과 긍지를 불러냈다. 그것은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경이(驚異)의 순간이었다. 개화당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왕은 물론이고, 태생이 같은 양반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 외세는 이용하려 들었을 뿐이다. 개화당은 누구와 친구를 맺어야 했을까. 그들의 사부 박규수는 진주민란 때 안핵사(按覈使)였다. 그가 비록 “오로지 전 우병사(右兵使) 백낙신(白樂莘)이 탐욕을 부려 침학(侵虐)한 까닭으로 연유한 것”이라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난 백성을 달래려 함이었다.
정다산(丁茶山, 1762~1836)이 자신의 필생 역작 집필을 끝냈을 때, 그보다 거의 100년 전 볼테르(F. Voltaire, 1694~1778)는 “자기 머리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목민(牧民)”과 “천부인권(天賦人權)”의 정신적 거리는 조선과 프랑스의 지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멀었다. 개화당은 농민과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기관포를 갈겨댔을 때, 농민군의 손에는 죽창뿐이었다.

◆농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일본군은 고종을 위협하고
외교무대에서 물러난 동농은 유길준 등과 어울렸다. 김가진은 고종의 신임을 받는 ‘근왕파’ 개혁관료의 선두주자. 유길준은 김옥균의 맹우(盟友)로서, 갑신년(甲申年)에는 미국 유학 중이어서 정변에 가담하지 못했으나, 급진 개화당의 명맥을 대표하는 인물. 이 당시 유길준은 7년 동안의 유폐(幽閉) 생활에서 풀려난 직후였다(고종은 그가 갑신정변 다음 해 자진 귀국하자 극형에 처하려 했다). 두 사람의 잦은 만남은 민씨들과 친청(親淸) 수구당이 독주(獨走)하는 정세에 균열을 낼 또 하나의 물밑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고종 31년(1894) 2월 15일,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봉기했다. “서면 백산(白山), 앉으면 죽산(竹山).” 일어서면 농민들의 흰옷만 보이고, 앉으면 죽창만 보인다는 부안(扶安) 백산에 결집한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하고,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했다. 민씨들은 위안스카이에게 구원을 청했다. 일본군의 개입을 두려워한 민영준에게 민비(閔妃)가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에 피신했던 일을 상기시키며 역정을 낸 게 바로 이때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잽싸게 움직였다. 일본공사 오오도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고종에게 청나라와 관계를 청산할 것을 강요한 게 5월 13일. 농민군의 전주성 점령보다 보름 이상 빨랐다.

“비록 현재의 상황이 경성(京城)은 물론, 부산·인천에까지 미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걱정할 만한 위급사태는 아니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정부가 출병문제를 거론함은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감이 있다는 평을 면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무쓰 무네미쓰, 김승일 역, <건건록(蹇蹇錄)>, p33)

청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가 그의 회고록에서 인정했듯이, 일본군 출병의 목적은 거류민의 보호가 아니라 조선을 삼키는 것이었다. 조정의 대응은 두 갈래였다. 농민군이 일본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진격을 미룰 뜻을 보이자, 전주에서 화약(和約)을 체결했다. 농민군은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廢政改革)에 나선다. 그러나 조정은 농민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일본과 협상에 들어갔다.

◆도망간 위안스카이, 일본 등에 업힌 개혁
민씨들의 계산은 청나라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일본과 말이 통하는 인사들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민영준은 김가진과 유길준을 떠올렸다. 자기네들 손으로 밀어낸 게 불과 1년 전 일이다.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바 아니었겠지만, 두 사람은 난국 타개의 일념으로 관직을 수락했다.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에 임명된 지 한 달도 못 되어,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제수받고 판서사무(判書事務)를 서리(署理)하게 되었고, 이틀 뒤인 6월 24일에는 병조참판에 판서사무 서리, 겸해서 외무독판사무(外務督辦事務) 서리(署理)까지 맡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한 달 사이에 내무차관, 외무장관 서리, 국방장관 서리에 연달아 임명되었다는 얘기다. 김가진 한 사람에 의지하다시피 사태를 수습해야 했을 만큼, 민씨들의 위기관리능력은 형편없었다. 일본은 병력을 동원해 사대문(四大門)을 장악했고, 위안스카이는 어느 틈엔가 줄행랑을 쳤다. 마침내 일본군은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 일본의 양심으로 존경받는 사학자 나카츠카 아키라의 글이다.

“일병(日兵)이 경복궁을 범궐(犯闕) 당시 궁중에 있던 문무백관들은 탈의(脫衣, 벗어 던진 관복이 궁궐에 즐비했다고 한다) 도주로 궁중은 일공(一空)하고 일병으로 충만한 괴변을 문경(問驚, 듣고 놀란) 선생은 곧 기마(騎馬) 단신(單身)으로 탄우(彈雨) 중임도 불구하고 진궁(進宮)한 바 궁중에는 오직 광무제 부자분과 내시 1인만이 시측(侍側)하였을 뿐" (<동농행장>, 한홍구 <김가진 평전>에서 재인용)

동농은 고종에게 수습책을 상주했다. 그런데 고종은 “도리어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대원군을 내세워 내정개혁을 추진하자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동농은, 일본이 청나라와 한통속인 민비(閔妃)를 믿지 못하니,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끌려간 적이 있는 대원군이 민씨들을 견제하는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종의 의심은 얼마 후 풀렸지만,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주군을 구하러 나타난 신하를 의심할 정도로, 그는 앞뒤 분간 못하는 암군(暗君)이었다.

◆208조 개혁안을 기초(起草)하다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고종 앞에 선 동농의 심정은 착잡했다. 일본군이 왕궁으로 난입했다. 그는 일본군 대대장 야마구치(山口)를 ‘외무독판이 돌아올 때까지 병사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설득하며, 일본군의 옹화문(雍和門) 진입을 막았다(나카츠카 아키라, 박맹수 역,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p75~77). 그리고 고종을 설득했을 게다. “전하, 개혁만이 조선을 살릴 수 있나이다.” 이 시각이 대략 7월 23일 오전 6시 전후. 사실상 고종이 적군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11시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대원군이 경복궁에 들어섰다. 어찌하여 이런 순간에 국왕의 아버지가 일본군 등에 업혀서 나타나는가. 고개숙인 아들, 경악하는 며느리.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고종은 곁을 지키는 김가진에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물었다.

“동농은 고종의 명을 받고 물러나와 그날로 시무(時務)를 아는 약간 인(人)을 뽑아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동농은 각종 사안을 주선하느라 16일간 눈 한번 붙이지 못하고 경회루에서 여러 의원(議員)들과 날마다 회의를 열어 폐정개혁에 대한 의안을 결정하였다. 이 법이 경장(更張)인데, 조금 조금 실마리를 풀어나간 것이 41일이나 걸렸다.”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89)

갑오개혁의 추진기구인 군국기무처는 이렇게 태어났다. <동농행장>은 “208조의 개혁안을 친자(親自) 기초하여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공포 시행케 하였던 것이 저 유명한 갑오경장이며 주창자가 선생이었던 것”이라고 쓰고 있다(한홍구, <김가진평전>에서 재인용). 우리가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갑오개혁안 208조는 동농 김가진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208개 조의 개혁안을 동농 혼자 만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군국기무처가 석 달 동안 통과시킨 200건이 넘는 의안(議案) 가운데 핵심이었던 신분제도 폐지에는, 동농의 손때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병인양요 때 조대비에게 상소를 올린 지 28년. 스스로 맹세했던 대로, 그는 조선을 질식시키던 신분의 족쇄를 벗겨냈다. 그러나 동농은 기뻐할 수 없었다. 개혁은 이제 시작인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동농 김가진, 49세.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 =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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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을 주도한 김홍집은 아관파천 직후 왜대신(倭大臣)으로 몰려 군중에게 맞아 죽었다.]





김홍집 내세워 긴급 내정개혁··· 日 압박에 ‘기울어진 근대화’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1896)

고종 31년(1894) 7월부터 고종 33년(1896) 2월까지 진행된 일련의 내정개혁을 가리킨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 한다. 갑오개혁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제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 주도하에 1894년 7월 27일부터 1894년 12월 17일까지 추진되었고, 이 기간에 약 210건의 개혁안을 제정․실시했다. 신분제도 폐지와 정치제도 개편이 핵심이었으며,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현물납세를 금납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제도 개혁도 단행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군국기무처는 일본군의 감시와 위협 속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근대화를 힘있게 추진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일본화폐의 국내 유통권 허용과 방곡령 반포 금지는 조선의 이익을 심각하게 침해했으며, 일본군에 협력해 농민군을 진압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의 에너지를 고갈시켰다. 정치제도 개편 역시 고종의 의심, 민비의 방해, 특히 대원군의 반발로 당초 목적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대원군은 고종과 민비를 폐하고 자신의 적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한편, 농민군과 손을 잡고 청국군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협격(挾擊), 축출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이를 알아챈 일본은 대원군을 은퇴시키고,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와 서광범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했다.
제2차 갑오개혁은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 추진되었고, 청나라와 절연(絶緣), 국왕 친정(親政) 및 법령 준수, 왕비와 종친의 정치 간여 배제 등을 골자로 한 홍범십사조(洪範十四條)가 반포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을 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내각의 친일적 경향은 더 짙어졌다.
제3차 갑오개혁은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제3차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주춤하면서, 친미파와 친러파가 내각에 다수 참여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사후처리에 있어 김홍집 내각이 보여준 친일적 성격과 단발령의 무리한 실시는 보수유생층(保守儒生層)과 백성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국왕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단행됨으로써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약 19개월 동안 지속된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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