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의 개항협상… 김가진이 뛰었다

류은혜 기자입력 : 2019-01-21 16:09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⑦서세동점(西勢東漸)의 최전선(最前線)에서

동농이 개화파 유길준에게 보낸 답서.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조대비가 스무 살 가진을 인견(引見)하는 계기가 된 병인양요 때, 대원군이 팔도의 백성에게 양이(洋夷)를 막아낼 방도를 물었다. 차력(借力)과 환술(幻術)에 도통한 이들을 불러모아 차력환술특공대를 조직해 양이를 물리치자. 무슨 <반지의 제왕>도 아니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조정이 채택한 아이디어다. 엽기적인 일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우선(鶴羽船). 글자 그대로 학의 깃털로 만든 배다. 학의 날개털을 겹겹이 엮어 아교(阿膠)로 붙여 배를 만들면, 가벼워서 화살처럼 빠르고, 양이의 총포에 맞아 구멍이 뚫려도 새털이라 바로 아물어서 가라앉지 않을 거란 얘기였다. 여기에 대원군이 혹했다. 즉시, 팔도에 학을 잡아들이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이리하여 그 이름도 유장(悠長)한 학우선의 진수식이 거행되었는데….
깃털의 부력(浮力)이 승선한 수군(水軍) 병사의 무게를 감당할 리 없다. 대원군의 비밀병기 학우선은 비선(飛船)이라는 제식 명칭이 무색하게, 띄우자마자 물이 새어 가라앉았다. 물에 빠진 병사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양화나루 망원정(望遠亭)에 올라 이 꼴을 지켜보던 대원군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6년 뒤, 망원정 앞에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때 좌초한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원군. 증기기관(蒸氣機關)을 떼어내 철갑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던지, 도성 안 백성 수만을 진수식 구경꾼으로 동원했다. 하지만, 이치를 알아야 흉내라도 내지. 대원군의 철갑선은 두 식경(1시간)이 지나도록 열 걸음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나라가 모아두었던 애꿎은 동철(銅鐵)만 탕진한 채. (이규태, <역사산책>, 신태양사, 1986, p86~88)


◆역설의 덫에 걸린 동도서기(東道西器)

서세동점(西勢東漸)에 직면한 조선의 위정자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관중(管仲)이 농민에게 땅을 나눠주고 군(軍)의 주력을 귀족에서 평민으로 바꿈으로써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으뜸으로 만든 고사를, 그들이 모를 리가 없다. 자고로 부국강병은 의무와 권리가 수렴해야 달성된다.
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무신(武臣)이 문신(文臣)의 자리를 빼앗을지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업과 공업이 신분 위계질서를 뒤흔들까 걱정했다. 천자(天子)의 책봉(冊封)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성공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나자, 그들의 관심은 철두철미 특권을 늘리는 데 집중됐다. 사대와 특권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로 얽혀 있는 한, 부국강병은 결코 국정 지표(指標)가 될 수 없었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양이(洋夷)들이 자유를 숭상하고 평등을 추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경악했다. 파란 눈과 노랑머리는 백성의 눈을 가리는 주술(呪術)의 도구로 쓰였을 뿐이고, 이것이 서양인을 오랑캐로 배척한 진정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양이들은 계속 밀고 들어왔다. 왕조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독버섯을 퇴치하려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무기를 가져야 한다. 군함과 대포는 중세의 암흑을 뚫고 나온 근대문명의 산물인데, 이를 빌려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의 싹을 자르겠다는 이 어이없는 역설.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은 까닭은, 조정이 동농에게 부여한 기기국 총판이라는 임무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이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다. 신식무기를 개발하되, 백성이 헛된 꿈을 꾸지 않도록 하라. 기술이란 게 공납(貢納)과 부역(賦役)으로 축적할 수 있는 건가. 책임자인 총판조차 차별받는 신세다.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출생부터 역설의 덫에 걸렸다.


◆“믿고 맡길 인재는 김가진뿐이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중국이나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해 수차(水車)와 수레를 보급하자는 건의가 골백번도 넘게 나온다. 조정의 대답은 언제나 “불가(不可)”였다. 대원군의 망신은 자초한 것이자 예고된 것이었다. 천년만년 이어질 것이라 믿었던 사대의 우산이 찢어지고, 그제야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조정은 서양문물을 얻으려고 허둥댔다.
사업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된 건 당연지사다. 방학 내내 미뤄두었던 숙제를 꺼낸 개학 전날 하필이면 체하거나 고뿔에 걸리듯이, 무슨 일을 할라치면 꼭 사고가 났다. 기기국 일도 그랬다. 총판에 임명된 지 두 달도 채 안 된 7월 10일, 동농은 인천으로 떠나게 되었다. 1년 전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의 여파 때문이었다(오른쪽 박스기사 참고).
실은, 동농은 기기국 총판으로 임명되기 4개월 전인 1883년 1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로 발탁된 바 있다. 한직(閑職)으로만 맴돌다가 처음으로 요직(要職)에 발을 들여놓은 셈인데, 이 역시 이조연의 천거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때 함께 주사로 발탁된 인물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쓴 대표적인 개화파 유길준(俞吉濬, 1856~1914)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로 넉 달, 기기국 총판으로 두 달. 성과를 기대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조정의 인사정책은 갈팡질팡, ‘돌려막기’에 바빴다. 제물포조약(1883년 7월)을 체결하고(왼쪽 박스기사 참고), 급히 감리인천항통상아문(監理仁川港通商衙門)을 설치했는데, 협상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마땅치 않았다.
우선 일본어에 능해야 하고, 외국 사례를 참고해서 조선의 이익을 지키려면 청국어나 영어 실력도 겸비해야 한다. 김가진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는 게 조정의 중론(衆論)이었으리라. 기기국 일을 두 달 만에 접고 감리인천항통상아문 주사로 옮기는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개항장은 외세와 부딪치는 최전선이다. 동농은 무거운 사명감을 느끼며 인천으로 향했다.


◆감리인천항통상아문(監理仁川港通商衙門) 주사(主事)

제물포는 조선 최초의 개항장이다. 이를 강제한 강화도조약(丙子修好條約, 1876)은 조선이 외세와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이기도 하다. 동농은 주어진 임무의 중차대함을 인식하고, 조선이 당할 불이익을 줄이기 위해 애썼다. 동농이 처리한 개항통상 업무를 김위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어떻든 철저히 준비한 결과,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을 무리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근년 들어 두드러지게 외국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국내외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7월 인천에 부임한 후만 하여도, 10월에는 영국․독일과 수호조규, 통상장정 등을 수정하였고, 12월에는 부평부(富平府)에 기연해방영(畿沿海防營)을 설치하였다. 수없이 드나드는 외국선이 혹여 침범할 수도 있기에 미연의 방비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다음 해 3월에는 청나라와 인천구청상지계장정(仁川口淸商地界章程)을 조인하였다. 청나라 상인들과 주민간의 마찰을 염려하여 지계를 만들어 놓을 필요에서 장정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 상인들에게 내지통상(內地通商)도 허락하였다. 또 그해 윤5월에는 이태리와 한의(韓義)수호조규를 조인하였고, 같은 달 러시아와 한아(韓俄)수호조규를 조인하는가 하면, 8월에는 한성부가 용산을 개항장으로 정하였다.”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21)
동농이 인천에서 일한 기간은 2년이었다. 이 시기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외교관으로 경험을 쌓았고, 개화에 몸을 던질 각오를 굳혔으며,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 하나. 궁중암투와 외세의 개입으로 영일(寧日)이 없던 도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동농에게는 실로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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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며느리 민비와 불구대천의 사이였다. 대원군은 임오군란을 배후조종했고, 을미사변 때도 재집권을 노렸다.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모래 半섞인 쌀에 군인들 폭발
-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

고종 10년(1873)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로 실각한 대원군은 재집권 기회를 노렸다. 한편, 민비(閔妃)를 정점으로 하는 조정은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기기국(機器局) 등을 두어 서양문물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민씨 일파의 가렴주구는 국고(國庫)를 텅 비게 만들고, 백성의 공분(公憤)을 불러일으켰다.
별기군과 차별 대우로 불만을 삭이던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밀린 녹미(祿米) 한 달치에 모래가 반 넘게 섞인 것을 발견하고 격분, 민비의 측근 민겸호(閔謙鎬)를 살해했다. 사태는 폭동으로 번졌고, 대원군의 배후조종으로 성난 군민(軍民)은 민씨 일파와 일본영사관을 공격한 데 이어, 민비를 제거하고자 창덕궁에 난입했다.
고종은 대원군을 불러들여 뒷수습을 맡겼으나, 민씨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인 청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난병(亂兵)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텐진(天津)으로 끌어갔다. 일본은 자국인 13명이 살해당한 책임을 물어 조정에 제물포조약을 강요했다. 임오군란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군사개입의 명분을 제공해, 개화의 앞길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임오군란 핑계로 최악 불평등조약
- 제물포조약

제물포조약은 일본의 야심을 그대로 조문화한 불평등조약이다. 또한 과거 그들이 메이지(明治) 초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했던 쓰라림을 그대로 이웃나라에 굴레로 씌우는 조약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자주국가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개화의 근대화 운동으로도 그 탐욕과 침략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제물포조약 제1조에서 흉도의 체포를 20일로 기한을 정하고, 만약 그 기일 내에 체포하지 못할 때에는 일본측이 마음대로 처리하겠다고 한 것은 처음부터 조선의 치안주권을 무시하는 규정이다. 제3조에서 그들의 군사비까지 배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적 탐욕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5조에서 공사관 경비를 위해 약간의 병력을 한성에 주둔시킨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1개 대대의 대병력을 진주시켰으며, 병력 주둔에 필요한 병영의 기본 시설과 수선비․유지비까지도 우리에게 부담시켰다.
조약의 내용은 ①지금으로부터 20일을 기해 조선국은 흉도를 포획하고 수괴를 가려내 중벌로 다스릴 것, ②일본국 관리로 피해를 입은 자는 조선국이 융숭한 예로 장사지낼 것, ③조선국은 5만원을 지불해 일본국 관리 피해자의 유족 및 부상자에 지급할 것, ④흉도의 폭거로 인해 일본국이 받은 손해 및 공사를 호위한 육․해 군비 중에서 50만원을 조선이 부담하며, 매년 10만원씩 지불해 5년에 완납 청산할 것, ⑤일본공사관에 병사 약간 명을 두어 경비하게 하며, 병영의 설치․수선은 조선국이 책임을 지고, 만약 조선국의 병․민이 법률을 지킨 지 1년 후에 일본공사가 경비를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때에는 철병을 해도 무방함, ⑥조선국은 대관을 특파하고 국서를 보내어 일본국에 사죄할 것 등이다.
수호조규속약은, 첫째 부산․원산․인천 각 항의 간행이정(間行里程)을 금후 확장해 사방 각 50리(조선리법에 따름)로 하고, 2년 후를 기해 다시 각 100리로 할 것, 둘째 일본국 공사․영사 및 그 수행원․가족의 조선 내지(內地) 여행을 허용하며, 예조에서 여행 지방을 지정하고 증서를 급여하되 지방관은 그것을 대조하고 호송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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