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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 헌신(獻身)

배철현 서울대 교수(종교학)입력 : 2018-07-09 04:00수정 : 2018-07-09 04:00
요가수트라 I.23
 

배철현 교수(서울대 종교학)


‘홀로코스트'
여기 49.195km를 완주(完走)하려는 마라톤 선수가 있다. 그(녀)는 지난 4년 동안, 올림픽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매일매일 달리기를 연습해왔다. 그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최적화된 상태로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마라톤 경주에 걸림돌이 되는 습관들을 제거해왔다. 마침내 마라톤 경주에 참가했다. 그는 가장 가볍고 통풍이 잘되는 운동복을 착용하고 가볍고 탄력성이 훌륭한 운동화를 신었다. 그는 출발선에서 자신이 결승점에 도착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는 자신을 위한 신기록을 몸과 마음에 안배할 것이다. 그 결승점에 도달하기 위해 지녀야 할 간절한 마음가짐이 ‘헌신(獻身)'이다.

헌신은 체념이나 포기와 다르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헤아려 알아내고 그것을 선택하여 매진하는 용기다. 헌신은 자신에게 감동적인 큰 뜻에 기꺼이 승복하겠다는 결심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는 제사보다 신에 대한 충성과 마음가짐, 그리고 신의 뜻을 행하겠다는 의지인 승복이 더 낫다고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이 신앙심이 넘쳐, 전쟁 노획물로 잡은 양들을 불에 태워 신에게 바쳤다. 제사장만이 적절한 의례 절차를 거쳐 양을 도축하는 제사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예언자였던 사무엘이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울에게 말한다. “승복이 제사보다 훌륭하다”('사무엘 상' 15,22). ‘승복’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셰모아(shemoa)'다. 셰모아의 근본적인 의미는 ‘듣기’다. 승복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섬세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에서 시작한다. 승복은 강자의 힘에 눌려 이뤄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고유한 임무에 대한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반응이다.

헌신이란 한자는 인간이 아직 야만인 시절에,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관습 그대로 남아있다. 인류는 기원전 3만년부터 야생 늑대를 사육하면서 최상위 포식자가 됐다. 인간은 먹을 것을 찾아 인간 거주지로 내려온 늑대에서 먹을 것을 줬다. 늑대의 사육화가 시작됐다. 굶주린 늑대는 인간 거주지 주변을 배회하면서 먹을 것을 찾는다. 그것이 다른 동물을 사냥하는 것보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늑대가 오늘날 ‘개’의 모습으로 점점 변했다. 사냥을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확보하게 된 개는 인간을 위해 무엇인가를 제공한다. 개는 인간의 재산 특히 가축을 노리는 야생동물이나 외부 인간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밤에 지킨다. 전기가 없던 시절 인간은 처음으로 밤에도 편히 잘 수 있게 됐다. ‘개’는 그 때부터 인간생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헌신의 첫 글자 ‘헌(獻)'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다. 고대 중국에서 조상신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세발 달린 솥’을 뜻하는 글자 권鬳)과 개(犬)의 합성어다. 제사를 신에게 올리는 인간이 자신의 몸(身)의 일부를 드리는 심정으로 개를 커다란 가마솥에 담아 바치는 행위다. 헌신이란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 주는 개를 신에게 바치는 결심이자 행위다.

유목생활로 연명하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양’은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양젖으로 치즈나 우유를 만들고, 양털로 추운 겨울을 견딜 수 있는 가죽옷을 제작했다. 양고기는 황량한 사막생활을 든든하게 만들어주는 고기를 선사했다. 그들이 신에게 드리는 가장 귀한 제물은 양이다. 히브리인들은 양 전체를 완전 연소시켰다. 양이 태워질 때 뿜어져 나오는 향기가 하늘로 올라가 신이 그 향기를 맡는다. 히브리인들은 이런 제사를 ‘올라가다’라는 히브리 동사 ‘알라’의 명사형 ‘올라(olah)', 즉 ‘번제(燔祭)'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영어로 옮겨지면서 ‘전체를 태운다’란 의미를 지닌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됐다. 나치스가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불에 태워 학살한 사건도 역설적으로 홀로코스트라고 불렀다. 헌신’은 자기 자신을 불사를 정도의 결심과 단호한 결단, 그리고 그것과 일치하는 용감한 행동을 의미한다. 파탄잘리는 요가수련의 목적을 ‘연습’이란 ‘이욕’과는 달리 ‘신을 위한 헌신’이라고 파격적으로 주장한다.
 

‘안개 바다위의 방랑자’ 캐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작품 (1818, 유화 독일 함부르크 쿠스트할레 미술관) [사진=배철현 교수 제공]
 

신 ‘이슈바라’
파탄잘리는 '요가수트라' I.23에서 신(神)을 처음 언급한다. 그는 요가의 목적인 삼매경에 신의 은총으로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요가 수트라 I.23은 다음과 같다. “이슈바라 프라니다나드 바(īśvara praṇidhānād vā)” 이 문장의 번역은 이렇다. “또한 신에 대한 승복으로도 (요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신이란 의미를 지닌 ‘이슈바라(īśvara)'는 후기베다시대(기원전 1000-600년)에 이미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다. 이슈바라는 ‘특별한 권위를 지닌 자’ 혹은 ‘주인·주님’이란 의미의 ‘이슈(īś)'와 ‘최상의 선택을 하는’이란 의미의 ‘바라(vara)'의 합성어다.

이슈바라는 ‘최상의 선택하는 하는 권위가 있는 자’란 의미다. 이슈바라는 철학적인 담론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크리슈나나 비슈누처럼 이름으로 알려진 신이 아니라, 개인이 사적인 영역에서 이름이 붙여지지 않는 신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이슈바라는 비슈누·시바·크리슈나와 같은 신이 아니라, 개인의 무명신이다.

500년경 '요가수트라' 해설서를 펴낸 브야사(Vyasa)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지체 없이 삼매경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여기서 ‘지체 없이’라는 표현은 요가 수련자가 인내와 노력이 수반되는 ‘연습’과 ‘이욕’을 거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어려운 훈련 없이 신을 한 순간에 경험하겠다는 인간의 욕심처럼도 해설될 수도 있다. 파탄잘리는 I.23에서 ‘신에 대한 헌신’라는 표현으로 그 대안을 설명한다. 인도인들은 자신다운 자신을 찾는 궁극적인 행위는 신의 은총으로 가능하다고 오래전부터 믿었다. '까타 우파니샤드' II.20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참나는 작은 것보다 작고 큰 것보다 크다. 그것은 피조물의 마음에 숨겨져 있다. 사람이 욕망과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창조신의 은총으로 참나의 위엄을 볼 것이다” 요가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인 참나의 발견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브야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를 초월한다’라는 의미로 ‘작은 것보다 작고 큰 것보다 크다’라고 기술했다.

파탄잘리는 신에 대한 헌신이 참나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가 이전에 언급했던 ‘연습’과 ‘이욕’의 훈련은 부질없는 것인가? 그런 훈련없이 신을 만날 수 있는가? 그는 요가 수련에서 ‘신에 대한 헌신’의 해석의 열쇠를 I.23 산스크리트어 문장의 마지막 단어를 통해 표시한다. 그 단어는 산스크리트 분사(分詞)인 ‘바(va)'다. ‘또한' 혹은 '더불어’란 의미다. 분사는 산스크리트어가 속한 인도-유럽어의 중요한 품사로, 문장 전체의 의미를 넌지시 알려준다. ‘바’는 요가 수련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연습과 이욕의 대치가 아니라 이것들을 지탱하는 수련자의 마음가짐이다.

헌신 ‘프라니다나’
헌신이라는 산스크리트 단어 ‘프라니다나(praṇidhāna)'는 특별하다. 이 단어는 서로 상반된 의미를 지닌 접두어가 두 개나 붙어있다. ‘프라(pra)'는 ‘위로’, ‘니(ni)'는 ‘아래로’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나(dhāna)'는 ‘다(dha)' 동사의 명사형으로 기본의미는 ‘우주의 원칙에 알맞게 배치하다’이다.

프라니다나를 직역하면 이렇다. ‘상하좌우로 면밀하게 살펴 내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지금 이곳에서 적절하게 배치하는 마음가짐’이다. 프라니다나는 흔히 ‘절하다; 엎드리다; 승복하다’로 번역된다. 헌신은 매 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나 과거의 습관대로 행동하려는 자신에 대한 제어다. 수련자가 자신의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는 행위는 자신이 열망하는 신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에 대한 경배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전체를 붙이는 이유는 과거의 자신을 유기하고 새로운 자아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물 앞에서 절하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겠다는 다짐이다.

신은 헌신하는 자에게만 삼매경이라는 경내를 알려준다. 이 헌신은 자신의 생각, 말, 몸을 통해 표현된다. 신에게 시선을 고정해야 욕심이 스르르 사라진다. 자신의 욕망을 만끽하기 위해 수련하는 자는 그 욕망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더 큰 불행으로 시달리기 때문이다. 신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모시면 그 신이 수련자의 삶을 인도한다. 만일 수련자가 신에 몰입하면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결국 신과 합일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헌신의 요가를 ‘박티(bhakti)'라고 부른다. 신은 신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요가수련자에게 찾아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요가수련자가 수련하는 만큼 은혜를 베푼다.

요가 수련자는 신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수련자의 모습으로 등장한 신에 놀랄 것이다. 신은 자기의 삶을 위해 최선을 선택하는 하는 주체인 이슈바라다. 내가 나를 위해 최선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누가 선택한단 말인가? 내가 내 자신을 위한 신이 될 때 삼매경의 입구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동의한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교리에 갇힌 신을 신봉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발견되는, 당신을 위한 최상의 선택을 주관하는 자신을 신봉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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