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한담冬夏閑談] 죽어야 사는 이름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입력 2017-12-14 05:00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通衢大哭怒風號(통구대곡노풍호, 거리에서 통곡하니 성난 바람도 울부짖고)
並命同時有一刀(병명동시유일도, 같은 때 나란히 숨진 곳, 칼 하나 남았네)
成就千秋賢弟義(성취천추현제의, 현명한 아우의 뜻 천추토록 이루었으니)
女人之質丈夫豪(여인지질장부호, 그여인의 자질은 장부처럼 호기롭다)
- '섭앵'(聶嫈)
 
비극의 극치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아우의 시신 앞에서 누이가 울부짖는다. 성난 바람을 타면 그 소리는 더 크게 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리를 가득 채운 통곡도 잠시였고, 아우가 숨진 곳에서 누이 역시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데, 이 주인공들은 바로 전국시대 자객으로 유명했던 섭정(聶政)·섭앵(聶嫈) 남매이다.
 
세상에 아쉽지 않은 죽음이 없을 것이고, 그 이면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 애절하지 않은 바가 없다. 섭정·섭앵 남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섭정은 자객이었다. 사마천의 붓끝에서 살아난 자객과 협객은 지사(志士)나 의사(義士)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선악의 판단이 모호해지기도 한다. 사람을 죽였다는 결과보다, ‘왜’라는 동인(動因)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위의 시를 통해 이미 감지했을 것이다. 섭정과 섭앵의 죽음에는 모종의 울분과 원망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섭정은 전국시대 위(衛)나라 엄수(嚴遂)에게 발탁됐지만 엄수를 배신한 협루(俠累)를 죽인다. 거사를 치른 후 스스로 눈알을 뽑고 얼굴 피부를 도려내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나서야 자결하는데, 이는 자신과 연루된 측근들에게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협루의 무리들은 그의 신원을 알아내려 저자거리에 시신을 던져놓고 현상을 걸기에 이른다.

이를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는 섭앵이었다. 섭정은 누이가 가장 먼저 달려올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의 모습을 훼손해 누이를 감춰야만 했고, 누이는 아우의 의기(義氣)를 세상에 드러내야만 했다. 결국 섭앵은 자신만 구차하게 살아남아 아우의 뜻을 왜곡시킬 수 없었기에 돌기둥에 머리를 찧고 죽음을 선택했다.

세상엔 죽어야만 사는 이름들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범부(凡夫)일수록 그러하고 필부(匹婦)일수록 그러하다. 지금껏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들은 그저 ‘호언(豪言)의 에누리(루쉰의 잡문 제목 '豪語的折扣')’ 로 쉽게 인정을 받아 왔다. 그 반면 여전히 수많은 섭정과 섭앵들은 죽음으로 호소해야 그 이름을 얻는다. 안타깝고 처절할 뿐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