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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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7-12-0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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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무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해서도 빨치산 토벌을 준비하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감은 전삼조(全三祚) 전북도경국장으로부터 정식으로 무주(茂朱) 경찰서장 발령장을 받았다. 그때가 1951년 11월 28일이다. 전(全) 국장은 “24시간 내로 부임해 그곳의 치안을 확보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차일혁은 갑작스런 경찰서장 발령에 마음이 착잡했다.

그래서 도경국장에게 “국장님, 행정이 서툰 저에게 제18전투경찰대대 보급주임 이근찬 경위와 작전참모인 조명제 경위를 함께 데려가도록 조치해 주십시오.”라고 건의했다. 그 두 명은 모두 경상도 출신으로 행정 능력이 뛰어난 부하들이었다.

차일혁은 부하들을 기용할 때 고향이나 학력 등을 고려하지 않았다. 능력만 있으면 됐다. 이른바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했다. 차일혁에게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지, 과거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평소 부하들의 능력을 눈여겨봤다가 적합한 자리에 데려다 쓰만 그만이었다. 그것이 바로 차일혁 만의 인사특징이었다. 보급주임과 작전참모도 그런 경우에 해당됐다. 무주 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차일혁에게 그 두 사람은 꼭 필요했다. 빨치산 토벌 못지않게 보급 행정 업무도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정들었던 제18전투경찰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철주부대(鐵舟部隊)와 헤어질 시간이 피부에 와 닿음을 느꼈다. 차일혁은 철주부대원들을 전원 집합시켰다. 그동안 기합도 많이 주고, 숱하게 고생을 시켰던 대원들을 한명씩 번갈아보면서 차일혁은 그동안 그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했던 감회가 새롭게 떠올랐다. 특히 호국(護國)의 영령이 되어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고 먼저 산화(散華)했던 전우들의 모습이 유난히 눈앞에 아른거렸다. 차일혁은 그들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작별 인사를 고(告)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철주부대가 해체됨과 동시에 전투경찰을 떠나, 나와 여러분이 많은 피를 흘렸던 무주(茂朱)의 경찰서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충심(衷心)으로 나를 믿고 따라준 여러분들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의 피맺힌 사연들은 접어두고라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주먹밥으로 함께 새운 밤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정(情)들었던 여러분과 헤어지면서 먼저 조국을 산화한 동지들과 유가족들에게 뜨거운 눈물로 다시 한 번 사죄(謝罪)를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의 무한한 건투(健鬪)를 빕니다.”

그런 후 차일혁은 함께 피와 땀을 흘리며 고생한 부하들에게 먼저 거수(擧手)경례를 했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하리라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까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부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禮儀)’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사나이의 진정성이 담긴 경례’였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은 경례를 하면서 어금니를 깨물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감출수가 없었다. 대원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나누면서 그들과의 옛 추억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중대장으로 진급한 이한섭 경위와 악수할 때는 감개(感慨)가 무량했다. 욕도 많이 하고, 유난히 기합도 많이 줬던 부하였다. 감정이 복받쳤다. 빨치산토벌대장으로 활약했던 차일혁에게 고맙고 미안한 부하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숱한 부하들이 그에게는 고마운 존재들이었다. 거기에는 전투 못지않게 부대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준 경리주임 박대훈 경위을 비롯하여 최봉환 경사, 소병문 순경, 취사반장 송 경사 등등이 있었다. 차일혁에겐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얼굴들이었다.

차일혁은 대원들의 환송을 받으면서 전주를 떠나 무주로 향했다. 이번에는 식구들도 함께 동행(同行)했다. 운전병 서 순경은 잔뜩 긴장하여 험난한 고개를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5살 난 막내아들은 새로운 경치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자동차 소리에 여기저기서 푸드덕하고 날아오르는 꿩과 놀라 뛰어가는 노루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가족들이 마치 소풍 길에 나선 것 같았다. 그렇지만 1년 전만 해도 이 길은 함부로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빨치산들이 출몰하는 위험지대였기 때문이다. 이 길은 전주에서 무주를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많이 사람들이 이 길을 사용했다. 그런데 빨치산들이 이 길을 장악하면서 그러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놔두고 대전에서 영동을 거쳐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뒷자리에 앉은 2명의 보신병(保身兵)들은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했던 산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잔뜩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비좁은 지프차에는 차일혁을 비롯하여 아내와 막내아들, 보신병인 유도수와 최순경, 그리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난초 그림을 팔러왔다가 함께 살게 된 할머니 등 모두 여섯 명이 타고 있었다. 차일혁의 집에 얹어 살게 된 할머니는 그동안 식구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할머니는 막내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며 집안의 대소사(大小事)를 거들어 주었다. 그런 까닭으로 할머니는 이번 무주 길에도 동행하게 됐다. 그만큼 차일혁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며 대해줬다.

그때였다. 차일혁의 뒤에서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보신병 최순경이 긴장한 나머지 오발(誤發)사고를 냈다. 다행히 총구가 위로 향해 있어서 차량의 겉 커버만 뚫고 지나갔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은 오발사고를 낸 최순경에게 점잖게 한마디 했다. “전투에서 오발하면 어떻게 되지?”하고 묻자, 최순경은 “즉결처분(卽決處分)입니다.”라며 바로 대답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에서는 “전투를 앞두고 오발사고로 작전에 실패할 경우 죽음으로 사죄해야 된다.”는 교전규칙(交戰規則))이 있었다. 차일혁은 비록 전투를 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더 이상 뭐라고 야단치지 않았다. 이는 차일혁 특유의 교육방식이다.

무주는 예로부터 “올 때도 울고, 갈 때도 운다.”는 말이 있다. “험한 재를 넘을 때는 왠지 귀양살이 오는 것 같아 서러워서 울고, 떠날 때에는 인심이 넉넉하고 후할 뿐만 아니라 경관(景觀)이 뛰어나 떠나기가 못내 아쉬워서 운다.”는 말이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무주경찰서에 도착한 차일혁은 구천동 작전에서 낯을 익힌 김계천 사찰계장의 안내를 받아 서장실에서 김민호 무주군수와 김진원 면장 등 유지(有志)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무주경찰서 연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했다. 무주지역 대한부인회장과 무주여중의 박종자 교사가 무주 군민(郡民)을 대표해 꽃다발을 증정했다. 차일혁은 답례로 연병장에 모인 주민들에게 인사말을 했다.

“친애하는 무주 군민 여러분! 뜨거운 환영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이 환영 속에 들어 있는 무언의 기대와 격려에 보답할 수 있도록 분골쇄신(粉骨碎身) 맡은바 임무를 기필코 다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단시일 내에 빨치산들을 격멸하여 치안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이곳 무주의 산기슭 개천마다 저와 공비들과의 결전장이 아니었던 곳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전우들의 고귀한 피가 뿌려져있는 이곳에서, 산화(散華)한 대원들의 복수를 함으로써 그들의 명복(冥福)을 기원할 작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빨치산들이 이곳 무주에 절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아가 민주경찰(民主警察)로서 위상을 견지하며 민폐(民弊)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그런 경찰관을 철저히 근절시키겠습니다. 저는 항상 밝은 얼굴로 여러분들의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어느 지역보다 전쟁의 상처를 많이 안고 있는 우리 무주를 하루 속히 복구시키는데 앞장서겠습니다. 그런 저에게 힘을 보태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차일혁은 주민들과 인사를 끝나자, 관내(管內) 경찰들을 시찰(視察)했다. 그러나 관내 경찰들의 모습을 보고 차일혁은 곧 실망했다. 관내 경찰들의 나약해 보이는 모습이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차일혁은 차렷과 열중쉬어 구령을 반복해서 내렸다. 이내 장내는 긴장됐다. 그런 후 차일혁은 그들을 한 명씩 쳐다보았다. 그러자 관내 경찰들은 차일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지 긴장한 모습들이었다. 그 중 한 대원이 차일혁의 눈길을 끌었는데 바로 김용식 순경이었다.

김용식은 본래 ‘인민군’ 출신이 아니었다. 9·28 수복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국군에 쫓겨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러다 마을로 보급 투쟁을 나왔다가 무주경찰서 경찰들에게 생포됐다. 같이 생포당한 빨치산들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지만 김용식 만은 당시 김두운 무주 경찰서장의 선처(善處)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발이 빠르고 다부진 몸매의 김용식은 의경(義警)으로 채용되어 빨치산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산 속 지리에 밝고 빨치산들의 전법(戰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빨치산 토벌에서 전공(戰功)을 세우고, 정식 경찰로 특채(特採)됐다.

무주경찰서에서 김용식은 귀순자 또는 생포 빨치산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査察遊擊隊)를 지휘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어 주위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지만, 대원들을 지휘할 때는 전혀 말을 더듬지 않는 특이한 행동을 보인 사람이었다. 차일혁도 한 달 전 구천동 작전을 할 때, 김용식과 함께 작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용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그를 철주부대에 편입시켜 보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무주 경찰서장으로 오게 되면서 차일혁은 다시 그를 만나게 됐다. 차일혁은 김용식과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난 후 김용식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경정까지 진급하여 서울 용산경찰서 대공과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대공과장으로 재직 중 그만 순직했다. 아까운 인물의 안타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관내 경찰들을 둘러보고 난 차일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전라북도 지역에서 빨치산들이 드센 곳이 바로 무주였는데, 그에 대한 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곳을 보고 차일혁은 내심 실망도 컸고, 한편으로는 불안하기까지 했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관내 경찰에 대한 전투준비태세에 대한 자체 점검에 들어갔다. 차일혁식 점검이었다.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에 첫 출근하자마자 조회를 간단하게 마치고, 경찰서의 무기와 장비, 그리고 서원(署員)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해봤다, 예상했던 대로 엉망이었다. 소총은 소련제 아카보 소총과 일제 99식 및 38식 소총이 대부분이었고, 신식 소총에 해당되는 미국제 M1소총은 얼마 되지 않았다. 휴대하고 있던 중화기와 경기관총도 북한군에게서 노획한 것으로 대부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대원들의 무기를 하나씩 점검해 보니, 사용이 불가능한 소총도 더러 나왔다. 게다가 차일혁이 부임하기 직전, 빨치산들의 무주경찰서 습격사건으로 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차일혁이 그나마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김용식 순경과 사찰유격대였다. 사찰유격대는 구성원들의 대부분이 빨치산 귀순자들이었다. 그들은 김용식 순경의 지도로 군기가 잘 잡혀있었다. 차일혁은 김용식 순경을 사찰유격대장에 임명하고, 경사(警査) 진급을 전북도경에 건의했다. 사찰유격대만으로는 빨치산 토벌에 만전을 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차일혁은 대원들을 훈련시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직접 자신이 그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차일혁은 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킨 다음 구보(驅步)부터 시켰다. 차일혁의 다년간의 전투경험으로 볼 때, 빨치산을 잡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필요했고, 지구력을 위해서는 구보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다. 이는 실전경험에서 나온 조치였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경찰서장이 아니라, 마치 훈련소 조교처럼 서원(署員)들을 가열(苛烈)차게 훈련시켰다. 차일혁은 언제 있을지 모를 빨치산과의 전투를 위해 부하들을 단단히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는 차일혁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무주는 정읍과 마찬가지로 전북지역에서 빨치산들의 활동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특히 무주는 차일혁이 이현상(李鉉相) 부대에게 최초로 참패를 당한 곳이기도 했다. 전삼조 도경국장이 차일혁을 무주 경찰서장으로 보낸 데에는 그럴 말한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 그들에게 당한 설욕(雪辱)을 말끔히 씻고 무주의 빨치산들을 격멸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차일혁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굳이 차일혁을 무주경찰서장으로 보낼 이유가 없었다. 차일혁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무주경찰에 대한 전투준비태세를 직접 챙기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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