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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05] 누가 최대의 피해자인가?

배석규 칼럼니스트입력 : 2017-12-06 09:26수정 : 2017-12-06 09:26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인질 보내고 분쟁 일단 마무리

[사진 = 민중부대 항몽]

이처럼 본토에서는 엄청난 고난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강화도에 틀어박혀 있는 고려조정과 무신정권은 섬을 고수하는데 급급했을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저 한다는 일이 민중부대의 저항을 독려하거나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섬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눈에 띠는 특이한 일이라면 부처님의 가호로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조판작업에 착수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귀한 문화재를 남겨 놓기는 했지만 전황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소극적인 고려조정과는 달리 고려의 민중부대는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몽골군을 괴롭혀 몽골군 진영에서도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이 점을 간파한 고려조정은 사신 김보정(金寶鼎)과 어사 송언기(宋彦琦)를 몽골에 보내 조공을 바칠 테니 전쟁을 끝내 달라고 호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장기간에 걸친 어려운 싸움에 지쳐 있던 몽골은 얼른 이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래서 고려왕이 몽골에 입조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내건 채 서둘러 철수했다. 고려는 왕족인 영녕공(永寧公) 준(繜)과 귀족의 자제 10여명을 인질로 보내면서 일단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 구육 사망으로 몽골군 철수

[사진 = 강화도 고려성터]

고려는 몽골군이 철수한 뒤 약속과는 달리 조공도 바치지 않았고 고종이 몽골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고타이가 죽고 몽골 내부에 권력 투쟁이 이어지는 동안 몽골은 고려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동안에는 잠정적인 평화가 불안하게 유지됐다. 고려조정은 여전히 강화도에서 나오지 않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1246년 구육이 대칸에 취임하면서 몽골은 다시 전쟁 준비에 나섰다. 이듬해 7월 다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바투와의 갈등 때문에 서방원정길에 나섰던 구육이 갑자기 숨지자 몽골군은 곧바로 퇴각했다. 1251년 뭉케가 대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몽골은 대대적인 고려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전국으로 확대된 전란
1253년, 예구(也窟)를 사령관으로, 아모간과 홍복원을 부장으로 하는 몽골군이 다시 고려로 밀어 닥쳤다. 5차 침공이었다. 몽골군은 동진군과 서진군으로 나뉘어 전 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강원도 지역까지 전화에 휩싸였다.

몽골군은 여전히 출륙환도, 즉 고려조정이 섬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했지만 최항의 고집으로 왕실과 무신정권 간에 갈등만 빚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몽골 재침에 대비해 대부분 피난해 버렸기 때문에 몽골군은 거침없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몽골군은 충주성 공격에서 또 한 차례 곤욕을 치러야했다.

▶ 신분 제약 철폐 약속으로 사기 높여

[사진 = 충주성터]

충주성은 사르타크를 살해한 뒤 승려생활을 청산하고 충주 방호별감으로 임명된 김윤후가 지휘하고 있었다. 충주성 공격에 나선 몽골군은 총사령관 예구가 직접 지휘하는 주력부대로 70일간에 걸쳐 대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덤비는 충주성의 항전에 성을 함락시키기가 불가능했다. 그들의 결사 항전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충주성을 지키던 군대는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 즉 노비군과 잡류병력이 주축이었다. 몽골군이 밀어 닥쳤을 때 양반들과 관리들은 대부분 달아나 버리고 천한 신분의 이들만 남아 성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포위 속에서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나고 병사들이 지치게 되자 김윤후는 과거 1차 몽골 침공 때 충주성을 지켜 낸 노비군과 잡류군의 승리를 상기시키면서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조치를 취했다. "만일 능히 힘을 내어 싸워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관직을 제수케 하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관노들의 호적을 들고 나와 보는 앞에서 직접 불살라버렸다. 또 적에게서 뺏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자유를 꿈꿔왔던 관노들은 감격한 것은 물론 사기가 백배로 올라 몽골군에 대항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의 승리
강력한 항전의 벽에 부딪친 몽골군은 마침내 충주성을 포기하고 충주 이남지역에 대한 공격도 단념한 채 퇴각 길에 오르게 된다. 충주성의 항전은 군사적인 의미도 의미지만 자유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 큰 뜻을 찾을 수 있다. 몽골군을 격퇴한 이 전투로 김윤후는 감문위(監門衛)상장군으로 승진됐다. 관노와 백정 등 병사들은 그 공에 따라 차등으로 관직이 주어졌다. 이와 함께 충주는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됐다. 충주성은 이후 충렬왕 때 성을 개축하면서 성벽 일부에 연화문을 새겨 넣어 예성(藝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퇴각하는 명분을 얻기 위해 몽골은 고려조정과 화의를 위한 회담을 제의했다. 최항의 반대 속에 고종은 몽골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육지로 나와 몽골의 사신을 맞이했다. 몽골은 왕의 입조와 함께 개경으로 천도할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하며 그들로서도 지긋지긋한 충주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물론 몽골군에 협력하거나 항복한 장군과 관리들의 목을 베거나 귀향을 보내는 식으로 강경 대응했다.

▶ 고려인 포로 20만 명 넘어

[사진 = 여몽전투도]

1254년 차라타이(車羅大)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여섯 번째로 고려를 다시 공격해 왔다. 몽골은 이번에는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자세로 전국을 유린했다. 경상도 전라도 지역까지 전란에 휩싸였다. 몽골군은 수전까지 감행해서라도 강화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때 포로로 붙잡힌 고려인만도 20만 명 이상이었다. 살육된 사람은 그 보다 더 많았다. 고려 땅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상태였다.
 

[사진 = 여몽전투도]

1255년 고종은 몽골에 입조하고 육지로 나가겠다는 약속을 하자 차라타이는 압록강 남쪽으로 물러나 고려가 약속을 지키는 지를 지켜봤다. 하지만 고려는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반년 뒤 다시 쳐들어 온 몽골군은 광주와 목포 신안 등 남쪽 지방까지 내려가 분탕질을 계속했다. 수군까지 동원해 섬 지방에 대한 공략까지 시도했다.

▶ 한고비 넘어선 여몽전쟁

[사진 = 뭉케 초상화]

상황이 악화되자 고종은 몽골 조정에 시어사(侍御史) 김수강(金守剛)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김수강은 대칸 뭉케에게 몽골군의 철군을 요구했다. 뭉케가 고려 조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을 탓하자 김수강은 "사냥꾼에 쫓긴 짐승이 굴로 들어갔는데 사냥꾼이 활과 칼을 가지고 굴 앞을 지키고 있다면 곤궁에 처한 짐승이 어디로 나오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수강열전(고려사)]

김수강의 언변에 탄복한 뭉케는 화친을 결정하고 차라다이에게 철군을 지시했다. 6차 침공이 있고 난 뒤 최항이 죽었다.
 

[사진 = 고려 고종묘(강화)]

최항의 서자 최의가 그 자리를 대신했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했던 그는 1258년 유준, 김인경 등에 의해 피살됐다. 이로써 60년에 이르던 최씨 무신정권은 무너졌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조정에는 몽골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됐다. 고려 조정은 몽골에 최이의 죽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이듬해 태자 왕전을 비롯한 40여명이 몽골에 입조함으로써 28년 동안 지속된 전쟁은 일단 한고비를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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