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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⑥] ‘중국 영화황제’가 된 한국 배우 김염…문혁 때 장칭에 박해 받아

임대근 한국외대 교수 입력 : 2017-11-23 13:20수정 : 2017-11-26 09:29
독립운동가 아버지 따라 중국으로…출중한 외모에 표준 중국어 구사 배우로 발탁 수많은 작품에 출연…대표작 상하이 첫 항일영화 '대로'

영화 '대로'의 한 장면.[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 배우 김염.[사진 출처=바이두]

김염(金焰). 본명 김덕린(金德麟).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의사인 김필순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사촌. 두 살 때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독살당하고 고아가 되고 만다. 고모의 손에 성장한 그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꿈을 이루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간다.

영화배우가 되겠다던 그의 꿈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빛을 발했다. 김염은 재능을 알아본 쑨위(孫瑜) 감독에게 발탁된다. 미국에서 영화를 배우고 돌아와 상하이 영화를 중흥시킨 2세대 감독, 쑨위도 감독으로서 막 첫발을 떼고 있던 때였다.

김염은 출중한 외모에 표준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배우였다. 1931년 중국 첫 유성영화 ‘가녀 홍모란(歌女紅牧丹)’이 선보인 뒤로 상하이 영화계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했다. 전국적으로 수많은 방언이 혼재한 중국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라면 표준어가 필수적이었다.

1929년 ‘풍류검객(風流劍客)’으로 데뷔한 그는 1930년 ‘야초한화(野草閑花)’가 인기를 끌면서 이내 스타덤에 올랐다. 김염은 △일전매(一箭梅, 1931) △도와읍혈기(桃花泣血記, 1931) △연애와 의무(戀愛與義務, 1931) △은한쌍성(銀漢雙星, 1931) △세 모던 여성(三個摩登女性, 1932) △사람의 도리(人道, 1932) △들장미(野玫瑰, 1932) △도시의 밤(城市之夜, 1932) △모성의 빛(母性之光, 1933) △황금시대(黃金時代, 1934) 등 중국영화사에서 주옥같은 작품들에 열정적으로 출연했다.

김염이 없었다면 중국영화사는 조금 빛이 바랬을지 모른다. 1930년대 상하이 영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스타 김염은 일본의 침략으로 전쟁의 암운이 감도는 상황에서도 영화 촬영에 몰두했다. 1932년 영화 전문 일간지 전성일보(電聲日報)는 주기적으로 ‘관객이 뽑은 영화배우’를 선정했다.

1년 간 계속된 조사에서 김염은 당시 중국 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배우에 뽑혔다. 신문은 그를 ‘영화황제’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조국을 떠나 디아스포라로서의 삶이 예술의 빛으로 승화하는 순간이었다.

‘대로(大路, 1934)’는 김염의 대표작이다. 김염은 주인공 진거(金哥) 역을 맡았다. 진거, 라오장(老張), 장다(章大), 한샤오류쯔(韓小六子), 샤오뤄(小羅), 정쥔(鄭君) 등 여섯 친구는 각박한 도시 생활을 참지 못하고 도로 건설 현장으로 달려간다.

일본은 1931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하고, 이듬해 1월 28일에는 상하이마저 공격했다. 중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도로 건설은 중국의 군사 전략과 근대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일본은 스파이를 활용해 도로 건설을 방해한다. 그러나 온갖 감언이설과 돈을 이용한 매수 작전에도 여섯 친구는 변절하지 않는다. 급기야 스파이는 여섯 친구를 자신의 집 지하실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도로 건설 노동자의 식사를 맡아오던 딩샹(丁香)과 모리(茉莉)는 수상한 상황을 직감하고 이들을 구출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라오장은 격투 중에 안타깝게 희생을 당한다.

마을로 돌아온 진거는 현지 주둔군에게 상황을 알리고 스파이를 체포한다. 도로가 성공적으로 개통됐으나,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된다. 다섯 친구는 도로를 지키기 위해 항쟁에 들어간다. 그러나 적의 전투기에 난사당한 친구들은 하나씩 쓰러지고 만다. 친구들의 장렬한 죽음 속에 홀로 살아남은 딩샹의 눈앞에는 희생당한 이들이 다시 일어나 힘차게 ‘대로가’를 부르며 전진하는 환상의 장면이 펼쳐진다.

‘대로’는 상하이 영화가 대체로 멜로드라마 위주로 흘러가던 상황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항일 소재 영화였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여섯 친구가 건강한 신체를 뽐내며 도로 건설 현장에 투입되는 장면은 ‘여성의 시각화’에 초점이 맞춰졌던 영화들과는 다른 독창성을 보여준다. 회상과 현실로 이어지는 플롯 구성과 유성으로 집어넣은 ‘대로가’ 합창 장면, 이중노출을 통한 판타지 장면 등은 지금 봐도 돋보이는 연출력이다.

시대 상황에 휘둘릴 수밖에 없던 김염은 일본군의 선전 영화 출연도 거부하고 나중에는 멜로영화도 찍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사회주의 중국이 들어선 뒤에도 꾸준히 영화배우로서 활약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2년 53세 때 위궤양 수술 중에 신경 손상을 입어 평생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하는 장애를 입고 만다. 겨우 밥만 먹을 정도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1930년대 상하이 영화계에서 란핑(藍苹)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장칭(江靑)이 당시 영화계 인사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면서 피바람이 불었다. 김염도 부인 친이(秦怡)와 함께 수용소로 격리되고 만다. 김염은 1983년, 74세의 나이에 폐부종이 악화되면서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영화인으로 살았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학계와 언론 등에서 한국인 디아스포라로서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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