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의 酒食雜記] 가인난재득(佳人難再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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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권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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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종권 칼럼니스트]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이다. 빈의 미녀 오페라 가수가 궁정 작곡가 살리에리에게 묻는다. “모차르트 직접 보니 어때요?” “별로야. 못 생겼어.” 그녀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남자는 재능 아닌가요?”

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말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1㎝만 낮았으면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남재여모(男才女貌)라는 말인가. 남자는 능력, 여자는 얼굴이라는. 

하지만 ‘재사박명(才士薄命), 미인박복(美人薄福)’이라 했다. 천재는 요절하고, 미녀는 삶이 기구하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일견 그렇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본기(本紀)에서 열전(列傳)까지 130편인데, 인물 전기가 112편이다. 이 중 57편의 주인공이 비운의 인물이다. 비감에 젖는 전기도 20편이다. 모두 120명의 재사들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진시황을 도와 천하통일을 이뤘지만 지록위마(指鹿爲馬) 조고(趙高)의 모함에 걸려 아들과 함께 극형에 처해진 이사(李斯)가 대표적이다. 세난(世難)을 통해 유세의 어려움을 갈파한 한비(韓非)는 옥중에서 죽었고, 남문의 나무를 옮겨 추상 같은 법령을 세운 상앙(商鞅)은 거열형을 받았다. 귀거래사의 굴원(屈原)은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멱라수에 몸을 던졌고, 어질고 능력이 출중했던 위공자(魏公子)는 폭음으로 최후를 맞았다. 하기야 어진 선비의 대명사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그래서 사마천도 “이른바 하늘의 도(道)가 옳으냐, 그르냐”고 처절하게 반문한다.

절세가인(絶世佳人) 역시 끝이 좋지 않다. 하(夏)의 마지막 걸왕(傑王) 옆에 말희(妺喜)가 있었다. 낮이 없는 장야궁(長夜宮)의 주지육림(酒池肉林) 안주인이다. 상(商)의 마지막 주왕(紂王)에게 달기(妲己)가 있었다. 숯불로 달궈지고 기름 번지르르한 구리 기둥을 걷는 포락형(炮烙刑)을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두 미녀 모두 역성(易姓) 혁명의 희생자가 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은 미소로도, 찡그림으로도 나라를 기울게 한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유왕(幽王)은 무표정한 포사(褒姒)의 웃음이 보고 싶었다. 거짓 봉화에 제후들이 달려와 어리둥절해하자 그녀가 웃었다. 거짓 봉화는 계속됐고, 결국 견융의 습격에 멸망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으로 섶에서 자며 복수의 칼을 갈았던 오(吳)의 부차(夫差)는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에 넋이 빠졌다. 그녀가 찡그리자 모든 궁녀가 덩달아 찡그렸다. 결국 곰 쓸개를 맛보며 권토중래를 노렸던 월(越)의 구천(句踐)에게 멸망한다. 포사는 견융의 여인이, 서시는 범려의 여인이 됐다고 전해진다.

이뿐이랴. 천하일색 양옥환은 남편의 부친, 즉 시아버지인 당(唐) 현종(玄宗)에게 재가한다. 바로 양귀비(楊貴妃)다. 하지만 ‘안록산의 난’에 도망치다 현종 앞에서 병사들에게 주살된다. 백거이(白居易)는 장한가(長恨歌)에서 “하늘이 내린 아름다움을 스스로 버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 양귀비지만 “말 앞에 굴러 죽으니, 떨어진 꽃비녀도 줍는 이 없다”고 했다.

중국 4대 미녀는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이다.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西施), 하늘을 보자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 땅에 떨어졌다는 왕소군(王昭君), 보름달도 살짝 구름 속으로 숨었다는 초선(貂蟬), 모란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는 양귀비(楊貴妃)다.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건네지 않아 흉노의 호한야(呼韓邪)에게 시집간다. 남편이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배 다른 아들 복주루약제 왕과 결혼한다. 첫 남편과는 아들, 두번째 남편과는 두 딸을 낳는다. 초선은 동탁의 첩이 됐다가 그 양아들인 여포의 애첩이 된다. 둘 다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부자(父子)와 통정한다.

땅은 넓고 미녀도 많다. 몸매가 날렵하고 발이 작아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는 작장중무(作掌中舞)의 조비연(趙飛燕)을 양귀비도 질투했다. 이백(李白)이 청평조사(淸平調詞)에서 비연과 닮았다고 한 것이다. 사실 조비연은 한(漢) 성제(成帝)의 두번째 황후였다 나중에 서인으로 강등돼 자살했다. 이백은 미모로 황제의 총기를 흐린 비연을 짐짓 비유했던 것이다.

한무제(漢武帝) 때 이연년(李延年)이 지은 가인곡(佳人曲)에서 ‘경국(傾國)’이란 말이 처음 나온다. “북방에 미녀가 있는데, 세상에 견줄 이 없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위태롭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운다.” 그래도 가인무죄(佳人無罪)이다. 탕왕과 무왕에 의한 방벌(放伐)은 걸주(桀紂)가 초래한 것이지, 미녀가 두 번 돌아봤기 때문이 아니다.

이사(李斯)는 아들과 함께 뒷산에서 토끼를 사냥하고 싶었다. 왕소군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둘 다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이사에게 사마천의 열전은 자랑이 될까. 왕소군에게 이백의 시는 위안이 될까. 역시 누항(陋巷)의 행복인가. 그럼에도 가인은 다시 얻기 어렵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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