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강경화 장관, ‘갓끈’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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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7-08-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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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 이재호 초빙논설위원·동신대교수(정치학)]


강경화 장관, ‘갓끈’을 아세요?

1960년대 중반, 김일성은 남한이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했다. 자유당 정권에서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걸 보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남한이라는 갓은 미국이라는 갓끈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으므로 이 끈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그래야 갓이 벗겨진다고. 지어낸 얘기가 아니다. 북조선 연감에 나오는 얘기다.

1972년 1월12일, 김일성은 일본 요미우리(朝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제안한다. “조선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남북 간 평화협정을 맺자.” 이 제안은 1974년 3월25일 최고인민회의 5기 3차 회의에서 바뀐다. 당시 허담 외무상은 (남조선 대신)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한다. 김일성은 그 무렵 미국이 파리에서 월남 월맹 베트콩과 4자 회담을 갖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자(1973년 1월28일) 크게 고무돼 있었다. 4자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월맹 간 회담이었다. 헨리 키신저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레둑토(黎德壽)) 월맹 공산당 정치국원이 막후에서 모든 걸 결정했다. 월남은 들러리였다. 요즘 말로 월남 패싱(Vietnam Passing). 파리평화협정 체결 후 미국은 월남전에서 발을 뺐고, 월남은 2년 뒤 패망한다. 김일성은 그 때 거듭 확신한다. 갓끈을 자르려면 미국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고.

1991년 3월 우리 정부가 황원탁 육군소장(한미연합사 부참모장)을 판문점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 임명하자 북한은 정전위를 보이콧한다. 정전협정 당사자도 아닌 한국이 수석대표를 맡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북한은 정전위에 참여하는 대신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한다. 이른바 ‘정전위 무력화 사건’이다. 이번에도 노림수는 분명했다. 미국과 독대(獨對)할 수 있는 자리를 제도적으로 만들 셈이었다. 언제든 미국과 1대1로 마주할 수만 있다면 갓끈은 끊어진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핵을 갖게 된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김정은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마침내 미국 본토까지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의 성공을 목전에 두었다. 지난달 29일 새벽 발사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은 일본 홋카이도 위로 2700㎞를 날아가 북태평양에 떨어졌다. 일본이 뒤집어지고 미국이 난리가 났다. CNN이 톱뉴스로 이를 보도하면서 서툰 한국어로 ‘김정은’을 언급할 때마다 그는 신이 난다. 그리고선 절감한다. 선대의 판단이 옳았음을. 그는 “앞으로 태평양을 목표로 삼고 발사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미국의 언동을 계속 주시할 것이며 그에 따라 차후 행동을 결심할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다. 미국 나오라는 소리다.

하루 전,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공개 브리핑을 통해 대북(對北) 대화 의사를 거듭 천명했다. “북한의 당 창건기념일인 10월10일까지 한반도 상황이 잘 관리되면 비핵화 대화를 위한 외교가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기까지 점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 모양이 우습게 됐다. 경솔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다른 장관도 아닌 외교부장관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시기까지 못 박는 건 외교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화를 원하는 대통령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강 장관에 대한 기대도 여전하다. 왜곡된 엘리트주의와 특정 학맥이 지배해온 외교부의 적폐를 청산하는데 큰 역할을 할 거라고 다들 믿는다. 하지만 이번엔 좀 성급했다.

장관의 체면보다 더 중요한 건 상황인식이다. 강 장관은 “한·미 간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북·미 간 대화도 적극 격려해야 할 대화”라고 밝혔다. 북·미 대화와 수교가 1988년 노태우 정권의 7·7 선언을 기점으로 ‘금기사항’에서 ‘권장사항’으로 바뀐 지 오래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북이 핵을 갖기 전이다. 북이 ICBM을 개발하고 핵보유국으로서 미국과 직거래를 하겠다고 나대는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 설령 북·미 수교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더라도 가슴 속에 묻어둬야지 대놓고 말할 때는 아니다.

강 장관이 북·미대화를 ‘격려’하면 자칫 한국 패싱(Korea passing, 정확히 말하면 South Korea Passing)을 조장할 수도 있다. 더 거칠게 말하면 한반도의 운전석에 앉고자 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트럼프나 김정은을 앉히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북이 끊고자 하는 갓끈을 우리가 알아서 끊어주게 된다는 얘기다. 김정은이 보기에 갓끈은 이미 덜렁거리고 있다. 미사일을 쏠 때마다 트럼프는 아베와 통화를 하지, 대통령은 휴가 중이지, 극한의 응징을 말하면서도 ‘대화’를 빼놓는 법이 없지··· 한국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정작 큰 문제는 이런 얘기를 해도 이 정권 사람들은 우파 꼴통 보수들의 트집잡기 쯤으로 치부하고 만다는 데에 있다. 이념과 편 가르기는 한 세력을 결속감과 사명감으로 충만하게 만든다. 그래서 얻는 성과도 이익도 적지 않다. 그러나 무지와 무능, 게으름과 상상력의 부재(不在)를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이런 적폐는 전 정권 한 번으로 족하다. 제발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안목을 가져줬으면 한다. 방향을 바꾸기 어렵다면 완급이라도 조정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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