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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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5-0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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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불심(佛心)에 의지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호국경찰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불교(佛敎)와의 인연이 깊었고, 그에 따라 불심(佛心)도 남달랐다. 차일혁의 불교와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처럼 깊어만 보였다.

 어쩌면 기연(奇緣)처럼도 보였고, 또 달리 보면 어찌할 수 없는 필연(必然)처럼도 보였으나, 차일혁의 인생 전체를 조망해 볼 때 그것은 운명(運命) 내지는 숙명(宿命)이 아니었는가 싶을 정도로 불교와의 인연은 남다른 특별한 데가 있었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차일혁은 불성(佛性)을 품고 태어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탓인지 차일혁은 평생을 두고 염주(念珠)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마음이 심란할 때 염주에 의지하여 마음을 달래고 추스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차일혁이 광복 후 6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불심과 그 불심이 헛되이 흩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붙잡고 정화시켜 줬던 염주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제로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염주를 굴리면서 상념에 잠기는 것이 오랜 습관이 됐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온갖 번뇌를 염주로 삭이곤 했다.”고 술회했다. 차일혁에게 염주는 그런 존재로서 육신(肉身)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차일혁과 불교와의 연(緣)은 마치 예정된 것이라도 돼 듯 일찍 찾아왔다. 홍성공업학교 시절 차일혁은 일제(日帝)에 불온한 언동을 했다하여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인 교사를 연행해 가던 일본 순사에게 항의하며, 그를 구타했다. 민족의식과 의협심이 강했던 차일혁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차일혁이 불과 16세이던 때의 일이다. 그리고 보신(保身)을 위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부랴부랴 피신했던 곳이 바로 전주 송광사(松廣寺)와 대원사(大院寺), 그리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금강산 신계사(神鷄寺)의 사찰(寺刹)들이었다. 차일혁은 금강산 신계사에 머물던 중 곤경에 처한 귀부인을 도와주고, 그 인연으로 그 집 수양딸과 갑작스러운 결혼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장인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평생의 스승’이 될 지강(芝剛) 김성수(金聖壽)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된다. 일련의 이런 일들이 모두 부처님을 모신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불교와의 인연은 차일혁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오는 변곡점(變曲點)들로 하나씩 점철(點綴)되기 시작했다.

 차일혁은 북한군 남침 이후 ‘옹골연유격대장’으로 활약했다. 차일혁의 유격대는 북한군 보급차량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적병도 사살했다. 그때 차일혁은 경각산(鯨角山)에 토굴을 파고 은신하면서 인근에 위치한 정각사(正覺寺)를 이용하여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다 1950년 12월 중순 전북 및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제18전투경찰대대의 대대장에 취임하면서 사찰과의 인연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지리산 인근의 천년사찰 보호에 힘쓴다. 천년 고찰(古刹)들은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전화(戰禍)에 휩쓸리기 쉬웠다. 실제로 전북 및 지리산 지역의 많은 사찰들이 차일혁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화마(火魔)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의 꾸준한 교육과 노력의 결과였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불심에 의지하여 토벌작전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켜내는데 전력을 다했고, 또 불심에 귀의(歸依)하여 부처님을 모신 천년사찰들을 보호하는 ‘수호신 역할’을 자처했다.

 차일혁은 “어떤 경우라도 사찰이 불에 타서는 안 되다.”는 입장을 취했다. 빨치산토벌작전을 할 때마다 차일혁은 작전지역 내에 사찰이 있으면,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로 사찰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해서 지켜낸 천년 고찰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가호(加護) 덕분인지 차일혁의 부대는 승승장구했다. 나아가 차일혁의 사찰보호를 위한 헌신적인 노력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자 천년사찰들과 인연이 있는 인사들이 차일혁에게 사찰과 관련하여 부탁하기도 했다.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고창 선운사(禪雲寺) 인근에서 태어났던 서정주는 선운사를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이었다. 1951년 3월, 차일혁 부대가 고창지역에 대한 빨치산토벌작전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서정주 시인은 제18전투경찰대대 종군기자였던 전북일보 김만석(金萬錫)에게 부탁을 했다. 당시 서정주는 전북일보에〈기미 3·1운동 약사〉를 연재 중에 있었기 때문에 차일혁 부대의 종군기자였던 김만석 기자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도 얼추 비슷했다.

 서정주의 부탁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곧 고창작전을 나가는 차 대장에게 선운사와 도솔암 등 우리의 천년사찰이 훼손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만석 기자가 “차 대장에게 직접 만나서 얘기하라고 했더니”, 서정주는 “차 대장이 어려워서 못 만나겠다.”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 말은 전해들은 차일혁이 서정주의 부탁이 없었어도 전라북도의 자랑인 선운사를 보호했을 터인데, 서정주의 부탁이 있었으니, 얼마나 더 유의해서 작전을 했을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차일혁의 병화(兵禍) 및 화마로부터 사찰보호 노력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일혁의 불심과 노력으로 화엄사, 선운사, 천은사, 백양사, 쌍계사, 금산사 등 우리의 전통문화 유산인 천년고찰이 살아남게 됐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많은 부하들을 잃었다. 그때마다 차일혁은 그들의 위패를 절에 모시고 영혼을 위로했다. 부하들의 위패는 전주 완산동에 있는 원각사(圓覺寺)에 안치했다. 구이작전 3명, 칠보공방전 12명, 고창수복 11명, 내장·덕태산 토벌 13명, 명덕리 탈환 및 고창 문수산·완주군 주변 산악전투 9명, 가마골·금산면 남이면 전투 8명, 무주 구천동전투 27명 등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정성껏 기도했다. 작전이 끝나고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곳을 찾아 꽃다운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산화한 부하들의 영혼을 달랬으나, 마음은 언제나 허공을 헤맸다. 그럴 때마다 차일혁은 젊은 육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그들의 생전 모습을 그리워하며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흐느낌은 곧 통곡(痛哭)으로 변했다. 주지 스님은 차일혁의 그런 애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차 대장은 참으로 강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참으로 섬세한 사람이군요.”라며 달래줬다. 차일혁은 불심(佛心)으로 부하들의 영혼을 달래고, 불심에 의지하여 자신의 인간적 고뇌와 슬픔을 감내했다. 그 모든 것은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에 있었다. 이른바 불심에 의지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심(護國心)의 발동이었다. 그럴 적마다 차일혁의 마음을 흔들리지 않도록 꼭 붙들어 매 준 것은 ‘심우(心友)’나 다름없는 염주였다.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차일혁의 대미(大尾)는 경남 하동의 천년고찰 쌍계사(雙磎寺)였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으로 보직된 차일혁은 ‘빨치산총수’ 이현상(李鉉相)이 있는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쌍계사에 2연대 본부를 설치하고 이현상 ‘체포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현상은 차일혁의 기지(奇智)에 의해 은신처가 노출되면서 차일혁의 수색대에 의해 생포되지 못하고 사살된다. 사살된 이현상의 사체는 연대본부가 있는 쌍계사로 옮겨졌다. 이현상의 몸에서는 일기와 한시(漢詩)가 적힌 수첩, 가래와 소련제 소형권총, 그리고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염주가 나왔다. 불교신자였던 차일혁도 “종교는 아편”이라며 금기시하던 골수 공산분자이자 적장이던 이현상의 몸에서 염주가 나온 것에 적잖게 놀랐다. 차일혁은 이것도 ‘불교의 연’으로 봐야 할 것인가 하고 상념(想念)에 빠졌다. 쌍계사에 빨치산토벌 본부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작전을 지휘하여 빨치산총수를 사살하여 시신을 옮기고, 그의 몸 안에서 염주가 나온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불심이 깊었던 차일혁은 이현상이 가늘 길에 마지막 보시(普施)를 했다. 비록 이현상이 다년간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혼란에 빠트린 빨치산총수라고는 하지만, 이제는 초라한 시신으로 놓여 있는 이현상에게 차일혁은 마냥 냉정하게만 대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 전시를 마친 이현상의 시신은 이현상의 숙부조차 ‘나라의 역적’이라며 시신 거두는 것을 꺼려하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 지리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현상의 시신은 누가 봐도 딱해 보였다. 그러나 주위의 시선이 두려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불심이 유난히 깊었던 차일혁은 그런 이현상의 시신을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교식으로 화장을 해주고, 인근 사찰에서 스님을 초치(招致)해 불경을 외우게 하며 극락왕생을 기원해 줬다. 그렇게 이현상의 넋은 아는지 모르는지 섬진강 물 따라 천도(薦度)됐다. 그것도 부처님의 법에 따른 인연이 아닐런지!

 차일혁의 총체적인 일생과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의 기나긴 여정에는 이처럼 불교와 무관한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차일혁은 불교와 인연이 깊었고, 불심 또한 깊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이후 정각사에서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화엄사와 선운사 등 천년고찰을 거치며 쌍계사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적장이지만 갈 곳 없는 이현상의 영가(靈駕)를 극락왕생으로 인도했고, 지리산의 평화를 통해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안정시키는 선업(善業)으로 결말을 짓게 됐다. 차일혁의 그런 모든 행위는 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호국불교(護國佛敎)’와 ‘호국경찰(護國警察)’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차일혁의 그런 불심에 귀의한 호국불교 정신과 호국경찰로서의 위상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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