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에게 답장을 쓰다…한중연, '박종악의 서신'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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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10-1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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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편지 105편을 모아 엮은 '수기'(隨記)

조선시대 신료 박종악이 임금인 정조에게 보낸 서신을 묶은 수기(隨記·왼쪽) 원본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이를 토대로 펴낸 '수기 – 정조의 물음에 답하는 박종악의 서신'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아주경제 박상훈 기자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으니 열 줄의 은혜로운 뜻이 말씀에 넘치고 만 길 높이의 은총이 종이 위에 빛납니다. 개나 말처럼 미천한 신이 외람되게 해와 달 같은 성상의 광채를 입었습니다."

조선시대 신료 박종악(1735~1795)은 임금인 정조의 성은에 감사하며 서신에 이같은 내용을 담아 보냈다. 그는 당시 천주교의 실상을 조사해 정조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면천, 당진, 천안, 아산, 예산, 대흥 등의 고을은 감영과 고을에서 누차 엄하게 신칙하여 거의 잦아들었습니다. 천안의 이존창이 바로 그 괴수인데, 일단 감영에서 잡아들인 뒤로는 원근이 징계되어 자못 두려워 그만둘 줄 압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기동)은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낸 편지들을 묶은 '수기'(隨記) 원본 가운데 124장의 서신 필사본을 따로 엮어 '수기 - 정조의 물음에 답하는 박종악의 서신'을 펴냈다.

정조가 쓴 편지는 그동안 공개된 것만 1200여 편에 이르지만, 신료가 정조에게 보낸 편지는 이전까지 단 한 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중연 장서각에 소장된 필사본 수기는 '때에 따라 기록한다'는 뜻의 제명 때문에 견문을 기록한 잡기 또는 일상생활을 적은 일기로 여겨졌으며, 편저자 미상의 책으로 전해오다 지난 2014년 장유승 연구원이 그 내용과 자료적 성격을 밝히면서 새롭게 주목받게 됐다. 

수기에 수록된 박종악의 편지는 1791년부터 1795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당대의 정치 현안이 두루 언급돼 있다. "입을 세 겹으로 꿰맨 것처럼 하라는 성상의 말씀"(39쪽)이라는 발언으로는 정조가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상소는 어제 하교하신 대로 내일 올리겠습니다."(158쪽)라는 말에서는 사건을 공론화하는 방법과 시기를 조율한 흔적도 엿보인다.

수기 속 편지의 내용은 △노비제 개혁을 비롯한 조정의 주요 정책 △충청도 초기 천주교회의 실상 △정조 후반 정국의 당파적 입장과 당파 간의 대립 관계 △사행(使行) 등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박종악은 1792년과 1794년 두 차례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왔는데, 특히 청 황제와 조정의 동향을 보고한 편지의 별지는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박종악의 편지 대부분은 "삼가 아룁니다"(臣謹按)로 시작하고, 뒤이어 극존칭의 인사말이 이어진다. 편지는 하루에 여러 편을 쓰기도 하고, 일주일에 2~3편씩 쓰는 일도 있었다. 한중연 관계자는 "인사말 수식어로만 보면 왕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하늘같은 국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는 기쁨과 자부심, 감사의 마음도 있었겠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고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하는 부담과 피로감 또한 대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십세를 넘긴 박종악은 건강이 좋치 않은 탓인지 여러 차례 자식에게 편지를 대신 쓰게 했고, 손님이 왔다고 대신 쓰게 한 경우도 있었다. 정조가 '대신 쓰기'를 허락했다는 내용도 발견된다. 또한 자신이 귀가 먹어 연석에서 하교하시는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대목도 있다.

왕과 신료라는 명확한 상하관계가 있었지만, 그 둘은 편지를 통해 생각보다 막역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이다. 

440쪽 | 3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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